48화. 5월의 마지막 날 (2)
“둘이 같이 산다고?”
“부모님도 같이 있어요. 남는 방이 많다고 해서 거기 며칠간 있으려고요.”
희나는 놀랄 정도로 차분하고 서늘하게 충격을 받은 듯한 안경 너머 진혁의 눈을 마주 보았다.
“잘…… 됐네.”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는 주제에 감정을 절제하고 있다. 진혁이 하고 있는 행동이 옳다는 건 알았지만 희나는 속에서 뭔가 탁 막히는 듯 갑갑함을 느꼈다.
그와 평범하게 마지막 날을 보내고,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생과 선생의 경계를 넘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안다.
그렇지만 모순적으로 그가 더 아쉬워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훈과의 친밀함에 대해서 더 캐묻고 격하게 반응해줬으면 좋겠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 말고 더 감정을 드러내면 좋겠다.
더 몰아붙여서 보이지 않는 벽을 깨부수고 싶다.
충격을 받은 시선, 그리고 살짝 떨리고 있는 손가락, 불안정한 호흡.
모든 것이 그의 동요를 나타내고 있다. 그가 하는 말만 빼고.
나는 인정했는데…… 당신은 언제까지 인정하지 않을 건지.
희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까, 교문에서 우리 봤죠? 나지훈이랑 사귀기로 했어요.”
진혁은 꼼짝도 하지 않고 앞만을 주시한 채 묵묵히 있었다.
희나는 잠시 기다리다가 그가 계속 침묵하자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
“뭐 할 말 없어요?”
뭘 확인받고 싶은지 모르면서 그렇게 물었다.
“……잘됐네.”
아까와 같은 말이 그의 입에서 힘없이 흘러나왔다. 뭔가 더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희나는 진혁이 ‘축하해’라고 하려다가 그만두었다고 생각했다.
태연하게 굴지도 못할 거면서. 떠보면 다 넘어가는 바보 주제에.
“나…… 그래도 공부 가르쳐줄 거예요?”
희나의 질문에 진혁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의외의 질문을 받아 조금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잠깐 대답할 말을 고르는 듯하다가 곤란해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르쳐줄 수 있지만…… 안 그러는 게 좋지 않을까.”
“왜요?”
“지훈이가 별로 안 좋아할 거 같은데.”
예상한 답변이었지만 희나는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은, 나와의 접점을 그렇게 쉽게 놓을 수 있는 거야? 그런 허술한 핑계라도 없으면, 이젠 다신 못 만날지도 모르는데?
“왜 싫어해요?”
그렇게 묻고 희나는 진혁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쏘아붙이듯 말을 내뱉었다.
“나랑 선생님은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요.”
스스로가 뱉은 말에 깊이 상처를 받는다. 이제 명백히 창백해진 진혁의 얼굴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살짝 입술을 벌리고 있는데도 마치 호흡이 멈춘 것처럼 보였다.
“그래, 그렇지.”
꺼지는 듯한 목소리에 희나는 울 거 같은 기분이 되어 고개를 휙 돌려서 창밖을 보았다.
그걸로 괜찮은 거야? 정말로……?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거 아니었어?
밥도 먹지 않고 그렇게 멍하니, 각자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에도 시곗바늘이 너무 빠르게 돌아간다. 너무 조용해서 째깍대는 낡은 시계 소리가 귀를 찌르듯 깊게 파고들어 온다.
이제 시간이 얼마 없는데. 계속 묵묵히 있는 진혁을 보니 희나는 조금씩 애가 탔다.
자신이 방금 전까지 뱉은 말들이 후회되기 시작한다. 괜히 오해받을 만한 소리만 해버린 거 같다. 계속 심하게 말하면 붙잡아 줄줄 알았는데, 움직일 기미도 없다.
내가 느꼈던 거보다 선생님이 나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어른이니까, 다른 여자 친구들도 있었으니까 어쩌면 나 같은 건 그냥 지나가면 잊어버릴 수 있는 어린애로 생각할지도 모르는 거다.
아직 어린 희나는 바로 옆에 앉은 진혁의 마음을 점점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점점 초조하고 불안해지는데 진혁의 표정은 미동도 없이 계속 그대로였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정말 다신 못 만나게 되면 어쩌나.
희나는 참지 못하고 웅얼거리듯이 말을 꺼냈다.
“지훈이는 상관없어요. 공부하고 싶어지면 선생님 집에 내가 가면 되니까요.”
스스로도 조금 구차하다는 생각이 들어 볼이 약간 뜨거웠다. 그런데 간신히 꺼낸 그 말은 진혁의 말에 부딪쳐 희나를 다시 굳어버리게 만들었다.
“이제 집에는 안 오는 게 좋아.”
“오지 말라고요?”
“그게 좋다고 생각해.”
심장이 지끈거리는 거 같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파에 앉아서 그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수다 떨고 같이 장난을 쳤다.
이제 그럴 수 없는 걸까.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진혁이 너무 멀게 느껴진다.
“그럼 연락은…….”
“사적으로는 안 하는 게 좋겠지만…… 간간이 잘 지내나 확인시켜 줘.”
핏기가 삭 사라지는 느낌이다. 희나는 멍해진 시선으로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점심시간은 10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가 끊어내는 말을 들으니 뜨거워진 머리가 식는 것 같다. 점점 멍해져서 이게 마지막이라는 현실감이 잘 안 든다.
희나는 묘하게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다시는 여기 이렇게 있을 일은 없겠네요.”
“그렇겠네.”
“선생님 애들이랑 뒤풀이 갈 거죠?”
“응, 아마 그럴 거야.”
“집에 가서 짐 챙겨서 나갈게요.”
“……그래.”
그리고 다시 대화가 끊기자 진혁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는데 나가 버릴 모양이었다.
희나는 마구 어그러진 기분으로 일어선 진혁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방금 전까지의 멍하던 머리가 급격히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이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텐데.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다 털어놓고 싶은 충동이 밀려온다.
다른 일은 어떻게 돼도 좋으니까 나를 가장 중요시해 달라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당신이라고.
끝없이 몰려오는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희나는 계속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금이 삶의 모든 순간인 건 아니다.
지금은 힘들지만, 지나고 나면 결국 이렇게 하는 게 최선이다. 지나고 나면 지금의 선택을 잘했다고 생각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와 다시 못 만나는 건 아니니까, 일단 급한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바로잡을 시간이 있을 거야.
하지만…….
“그래도 혹시라도…….”
희나의 내면의 갈등은 진혁의 작은 목소리에 잠시 멈췄다. 진혁은 돌아보지 않은 채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아프거나 힘든 일이 있거나 하면 꼭 연락해. 아무 때라도 괜찮으니까.”
“…….”
“그럼 나중에 보자. 먼저 가볼게.”
그대로 돌아보지 않은 채로 진혁의 발걸음이 떼어지는 순간 희나가 그를 불렀다.
“선생님.”
무거운 발걸음이 천천히 멈춰 섰다. 희나는 책 더미에서 몸을 일으켜서 서 있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냥 이렇게 갈 거예요?”
“그럴 수밖에 없잖아.”
진혁이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리고 여전히 바스라질 것 같은 얼굴로 앵무새처럼 비슷한 말을 했다.
“결국 널 위해서…… 잘된 거라고 생각해.”
“선생님은 어떤데요?”
“……내 기분은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거짓말을 못 하는 그는 아무렇지 않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그게 표현할 수 있는 한계겠지. 끝까지 물러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다.
나를 너무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바라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참을 수 없는 감정이 치밀어 올라서 희나는 진혁의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리고 빠르게 팔을 뻗어 예전에 모텔에서 그랬던 것처럼 진혁의 안경을 벗겼다.
당황한 얼굴이 드러나는 것과 동시에 그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쉬자 밀착된 몸이 경직되는 게 전해져 왔다.
“……왜 그래.”
뻣뻣하게 굳어진 몸은 미동도 없지만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나한테 이러면 안 되잖아.”
그리고 밀어내지는 못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입바른 말을 한다.
이제가 아니라 계속 밀어냈잖아. 여긴 아무도 없고 우리 둘뿐인데 당신은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야. 바보 멍청이. 둔탱이에 겁쟁이. 한 번도 솔직해지지 않을 거야?
쏟아 내고 싶은 말이 잔뜩 있었지만, 희나는 말하는 대신 더 힘을 주어서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서 감정을 가득 실은 눈으로 진혁을 올려다보았다.
하얗고 단정한, 혼란스러워하는 아름다운 얼굴. 그러나 시선을 피하지 않고 희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이 바보 같은 망설임으로 가득 찬 얼굴이 너무 밉다. 싫다. 바보 같고, 아무튼 간에 밉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어제 지훈과 안고 있었을 때의 감정과 너무 다르다. 이렇게 붙잡고 있고 싶다. 떨어지기 싫다.
이 품이 아닌 다른 사람의 품은 싫다.
진혁은 아주 곤란한, 갈등에 휩싸인 표정을 하고 있다. 체념한 듯하던 눈이 점점 남자의 그것을 띠기 시작한다.
등에 무언가 닿는가 싶더니, 단단한 팔이 마주 안아 왔다. 그리고 그 팔은 곧 희나를 휘감고 부서질 정도로 세게 끌어안았다.
희나는 팔을 뻗어 한참 위에 있는 목덜미를 휘감았다. 자신의 좋아하는 향긋한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심호흡을 했다.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면, 선택할 수 있다면, 처음이 당신이라면.
무슨 일이 있건 견딜 수 있을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촉즉발의 터질 것 같은 긴장감 속에서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듯한 희나의 목소리가 진혁의 귓가에 울렸다.
“키스해주세요.”
밀착한 목덜미가 움찔했다. 곧 진혁이 고개를 돌려 희나를 내려다보았다.
희나는 눈앞의 남자의 눈동자 속에서 감정의 불길이 확 타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떨리는 손이 희고 보드라운 얼굴에 가서 닿았다.
진혁의 눈이 홀린 듯이 희나를 바라보았다.
하얀 얼굴은 발그레하고 흑진주 같은 커다란 눈동자가 똑바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혁의 손가락이 떨리며 보드라워 보이는 분홍빛 입술을 쓸듯이 만졌다. 진혁의 입술 사이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무슨…… 말을…….”
“키스해주세요.”
그녀는 아주 나직하게, 하지만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방금 한 말을 반복했다. 그녀의 흰 팔이 목을 꼭 끌어안고 있어서, 얼굴이 정말 놀라울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진혁은 욕망을 삼키듯 다시 침을 삼켰다.
계속 머릿속에서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시선을 돌리지 않으면 충동이 이성을 잠식할 것 같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눈앞의 소녀를 자석에 이끌려 가듯 원하고 있다. 눈 바로 앞에 있는 이 작은 입술에 절실하게 입 맞추고 싶다. 하얀 목덜미를 입에 머금고 음미하며 내 흔적을 새겨 넣고 싶다. 그리고 헐떡이는 가쁜 숨이 내 이름을 부르게 하고 싶다.
그 다음에는 어딘가로 데려가서 나만 볼 수 있도록 감춰두고 싶다. 아무도 다시는 이 애를 상처 주지 못하도록.
진혁은 깊은 숨을 내쉬며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간신히 떼어내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리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러면 안 돼…….”
“내가 싫어요……?”
빨개진 얼굴로 작게 물어 오는 가는 목소리에 숨이 막힐 것 같다. 정말 하마터면 그녀를 밀어붙여 키스보다 더한 짓을 해버릴 뻔했다. 만지고 닿고 싶어서 미쳐버릴 것 같다. 어떻게 그녀를 싫어할 수 있단 말인가.
새빨개진 얼굴을 자각한 진혁은 그걸 감추듯 희나의 작은 머리를 잡아당겨 품에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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