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5월의 마지막 날 (1)
“좀 놓고 걸어.”
“사귀는 사이인데 뭐 어때.”
학교 근처 골목에서 지훈과 함께 바이크에서 내린 희나는, 내리자마자 손을 잡아 오는 지훈에게 투덜거렸다.
그는 희나의 투정에도 아침부터 싱글벙글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학생끼리라도 동거하다 걸리면 정학 정도는 당할걸?”
“걱정 마, 안 걸리니까.”
태연하게 말하며 지훈은 희나를 잡아끌며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사실 손잡고 같이 등교하는 정도로 학생 동거를 의심받을 리는 없다. 희나의 학교는 이성 교제 규제가 없는지라 교내 커플도 꽤 많았고 손잡고 다니는 것도 꽤 흔했으니까 더더욱.
“저녁에 기념으로 놀러 가자. 현상이랑, 너 친구 민지도 불러서.”
“오늘은 좀……. 그래.”
잡힌 손이 어색해 주변 눈치를 보면서 희나가 거절하자 지훈이 살짝 눈썹 끝을 치켜 올렸다.
“내가 뭐 하자고 하면 다 거절할 거야? 그런 거면 마음의 준비라도 좀 해놓게 미리 말해줘.”
“그런 거 아냐. 짐도 챙겨 와야 되고……. 몸도 아직 안 좋아.”
“옮기는 거 도와줄 테니 나랑 같이 가.”
짐 얘기를 하자마자 진혁의 집을 연상했는지 지훈이 빠르게 말했다.
“그냥 나 혼자 갔다 올게. 거기에 너랑 가는 건 좀 그렇잖아.”
“……내가 어제 한 말 잊어버렸어?”
“선생님은 안 만날 테니 걱정 마. 우리 반 전체 뒤풀이 있으니 늦게 올 거야. 그 사이에 가서 빨리 챙겨 올게.”
지훈은 납득했는지 내키지 않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교문에 도착했다.
교문 주변에는 들어가지 않고 둘러서서 웅성거리는 학생들이 꽤나 있었다.
뭔가 해서 쳐다보니 아이들의 가운데에 마지막 교문 지도를 나온 진혁이 보였다. 다른 반 여자아이들에 잔뜩 둘러싸여 있었다.
그가 이쪽을 보지 않길 바라며 희나가 빠르게 걸으려 하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진혁이 이쪽을 본다. 붙잡힌 손이 뜨겁다.
희나를 발견한 진혁의 표정이 아주 천천히, 미세하게 변했다. 늘 웃고 있는 입가가 충격을 받은 듯 굳어졌고 생기를 잃은 듯 보였다.
지훈도 그를 봤는지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그의 반응에 비로소 둘이 공모해서 속이는 게 아니란 걸 믿게 되었는지 진혁과 대조적으로 조금 즐거워 보이는 미소가 지훈의 입가에 걸렸다.
지훈이 일부러 과하게 도발적인 시선을 보내는 느낌이 들어 희나는 손을 잡아당기며 낮게 말했다.
“그만 쳐다보고 빨리 가자.”
“음……. 역시 저 사람은 맘에 안 들어.”
불만스럽게 툴툴거리면서도 지훈은 희나가 잡아끄는 대로 끌려왔다. 진혁이 뒤를 쳐다보는 듯 뒤통수가 따끔따끔했지만 희나는 돌아보지 않은 채 도망치듯 빠르게 걸었다.
“그럼 조금 있다가 봐.”
교실 앞까지 빈틈없이 데려다준 후 지훈은 자신의 교실로 돌아섰다.
지훈과의 다정한 등교에 주변에서 묻는 듯한 시선이 잔뜩 날아왔다.
희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슬아슬하게 학교에 왔기 때문에 5분만 있으면 조례 시간이다. 진혁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빠른 속도로 걸어서 종이 치기 직전 희나는 사회과 지도실로 들어섰다. 1교시 수업은 제칠 생각이었다. 자유로운 시간은 길지 않으니 빨리 이런저런 행동에 착수해야 한다.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휴대폰에 충전기를 연결하고 페이스 북에 접속했다.
빠른 속도로 찾고 있는 이름을 입력하고 스크롤을 내려 나열된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흔한 이름이어서 동명이인이 꽤 많았지만 희나는 곧 원하는 프로필을 찾아내었다.
이수진. 서울대학교.
얼른 클릭해서 들어갔다. 프사나 얼굴이 나온 사진은 없었지만 말투나 행적을 볼 때 수진이 확실해 보였다.
다행히 꽤나 활발하게 사용하는 것 같았다. 바로 30분 전에도 리플에 대답한 흔적이 있었다.
희나는 어느 정도 확신이 들 때까지 타임 라인을 훑어본 후 메신저를 구동시켜 말을 걸었다.
「언니, 저 주희나예요. 갑작스럽지만 좀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요.
전화번호는 010-XXXX-XXXX예요. 연락 기다릴게요.」
메시지를 전송하고 잠시 고민하다가 희나는 한 줄 더 덧붙였다.
「선생님한테는 제가 연락했다고 말하지 말아주세요…….」
굳이 직접 연락한 시점에서 숨기고 싶을 거란 걸 눈치챌 법한 똑똑한 사람이지만 노파심에 덧붙였다.
전송하고 나니 조금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어느 정도 자신감은 있었지만 과연 생각대로 풀릴지 알 수 없었다.
희나는 계속 초조하게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연락이 꼭 와야 했다. 오지 않는다면 여러 가지로 계획을 다시 세워야 할 것이다.
밤새 고민한 끝에 희나는 수진에게 집 계약을 부탁해보기로 했다. 물론 보증금은 그간 모아 놓은 돈을 털어서 지불할 것이다.
계약의 주체가 될 사람은 마음대로 보증금을 빼서 달아날 염려가 없고, 그러면서 희나를 위해 귀찮은 계약에 나서 줄 사람이어야 했다.
여태까지 집을 탈출하지 못했던 만큼, 희나가 기존에 알던 어른들 중에는 그런 계약을 맡길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잘해주는 어른이 간혹 있지만 돈이 걸린 문제인 만큼 단순히 호의를 가진 사람보다 이해관계가 맞는 사람이 더 믿을 만하다.
그런 의미에서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겨우 한 번 본 사람일 뿐인데도 희나는 수진이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문대학교에 재학 중인 수진이 희나의 돈을 삥땅치고 도망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런 면에서 믿을 만한 사람인 데다 그녀는 진혁에게 호감이 있다. 희나를 진혁에게 눈치채이지 않는 방법으로 그에게서 떼어놓고 싶어 할 것이 분명했다.
진혁의 친구들 중에 굳이 수진을 선택한 이유는, 그녀만이 진혁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어서였다.
희나는 오전 수업을 통째로 제치더라도 기다릴 각오를 했으나 다행히 그럴 필요는 없었다.
메시지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희나?]
의아해하는 목소리는 짧은 말만 했음에도 수진의 것이 확실했다. 딱 부러지는 당당한 목소리가 희나의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었다.
“갑자기 연락해서 죄송해요. 언니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부탁? 무슨 부탁? 왜 나한테?]
“언니만…… 선생님한테 말 안 할 거 같아서요.”
그 말에 수진이 잠시 침묵하더니 쿡쿡 웃었다.
[요즘 애들은 너무 영악해.]
“화나셨어요?”
[아니. 일단 무슨 얘긴지 들어나 보자.]
희나는 보증금을 모아 두었으며, 진혁의 집에서 나오고 싶으니 원룸 계약만 해달라는 내용의 말을 차근차근하게 전했다.
“보증금은 제가 지불할게요. 만약에 제가 월세 안 내고 도망쳐도 보증금이 있을 테니까 언니한테 피해는 안 갈 거예요.”
“그 돈 내가 먹고 나르면 어쩌려고?”
“안 그러실 거잖아요.”
수진은 생각에 잠긴 듯 또 잠잠하다가 수상하다는 듯 말했다.
[진혁이한테 해달라면 될 텐데, 그걸 왜 굳이 비밀로까지 하면서 나한테 부탁해?]
“선생님한테 해달라고 할 수가 없어요.”
[왜? 난 니 계산대로 순순히 움직이고 싶진 않은데.]
“다 말할게요, 선생님이 모르는 거까지.”
희나는 지훈의 일까지 전부 말할 생각이었다. 수진은 진혁에게 말을 안 할 거란 확신이 들었다. 자세한 사정을 알면 더욱 더. 진혁이 알면 희나를 걱정해서 어떻게든 나설 거란 걸 알 테니까.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수진도 조금 흥미가 동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캐묻는 질문에 모두 대답한 뒤 희나는 간곡하게 말했다.
“언니가 안 해주시면 전 부탁할 곳이 없어요.”
[그 남자애가 학교에 말 안 할 거란 건 확실한 거야?]
“제 생각에는 아마 그럴 거예요.”
나중에 지훈과 헤어지더라도 진혁의 집에서 나온 게 확실해지면 학교에 말하지 못할 것이다.
아까 사람들 많은 곳에서 지훈과 끝까지 손잡고 걸은 것도 일종의 보험이었다. 지훈과의 관계를 공인해 두면 지훈도 뒤늦게 희나와 진혁의 사이를 문제 삼긴 어려울 테니까.
머리 굴리는 소리가 나는 듯하더니 수진의 시원시원한 목소리가 다시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간단한 일은 아니니까 나도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해.]
“언제쯤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다음 주 안으로 한번 만나서 자세히 얘기하자. 수업 끝나면 다시 연락할게.]
“네, 알겠어요.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희나는 전화를 끊었다.
가타부타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거절할 생각이라면 만나자고 하지 않을 터였다. 희나는 사실상 확답을 받은 거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이 조금 놓인 희나는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쉬는 시간에 잠시 교실로 돌아갔다. 예상대로 지훈이 찾아왔다가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에 돌아갔다. 조례 이후로 오후까지 진혁이 교실에 들어올 일은 없었으므로 희나는 그대로 오전 수업을 받았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황급히 교실을 빠져나가 사회과 지도실로 향했다. 책 더미에 앉은 채 희나는 언제나처럼 진혁을 기다렸다.
서로 아무 말도 없었지만, 희나는 진혁이 오리란 걸 알고 있었다.
아주 긴 5분이 지나고, 사회과 지도실의 낡은 문이 열렸다. 침을 꿀꺽 삼키며 그녀는 키가 큰 진혁의 흰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평소보다 그늘지고 걱정이 가득한 표정이다. 교문 앞에서는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무척 피로해 보였다. 아마 잠을 거의 자지 못한 것 같다. 그건 희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어제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진혁은 묵묵히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희나에게 쏟아내듯 질문을 던졌다.
“급하게 가봐야 될 일이 있어서……. 미안해요.”
“무슨 일인데? 잠깐 연락도 할 수 없었어?”
“못 할 사정이 있었어요.”
“……지훈이랑 계속 있었어?”
조금 창백해진 표정으로 진혁은 나직하게 물었다. 희나는 그 견디기 힘든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진혁은 살짝 입을 벌리고 선 채 희나에게서 고개를 돌려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몸에서 활기가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듯 보였다. 손에 들고 있는 쇼핑백을 놓쳐버리기라도 할 것 같다.
하지만 진혁은 놓치지 않고 천천히 걸어와 언제나처럼 희나의 옆 바닥에 앉았다.
태연하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감출 수 없는 씁쓸한 빛이 짙게 풍겨져 나왔다. 그러나 희나는 그게 정말 그래서인지,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서 그렇게 보이는 건지 자신이 없었다.
“……그래. 무사하니까 됐어.”
한참이 지난 후에 진혁이 꺼낸 말에 희나는 맥이 탁 풀렸다. 진혁은 뭔가 잔뜩 묻고 싶은 듯한 눈을 하고 있으면서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한 걸음 물러나는 모습에 희나는 순간 주욱 시달리던 미안한 감정을 덮어버릴 정도로 이유를 알 수 없는 짜증이 났다.
어떻게 꺼내야 할지 고민되던 말도 냉랭한 어조로 사르르 흘러나왔다.
“이제 나 안 재워줘도 괜찮아요.”
“어……?”
“지훈이네 집에 있기로 했어요.”
시선을 피하고 있던 진혁이 고개를 들어서 희나를 올려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