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Stuck (5)
지훈이 통화 중인 걸 보면 휴대폰을 뺏어 무슨 소릴 할지 몰라 불안했다. 내일이 실습 마지막인데 진혁에게 지훈에게 들킨 걸 알아차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성격에 분명히 자기가 다 뒤집어쓰고 책임지려 할 게 뻔하니까.
휴대 전화를 다시 주머니에 넣고 희나는 고민에 잠겼다.
이제 어쩌나. 들킨 이상 선생님의 집에 있을 순 없어.
하지만 반면에 일단 선생님 집에서 나오면 어느 정도 알려질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다.
지훈이 누구에게 뭐라고 하든 같이 살지 않으면 딱히 사귄다는 증거는 없으니까.
잠시 고민하던 희나는 지훈의 제안을 수락하기로 결정했다. 며칠만 지훈의 집에 있으면서 입을 막고, 어떻게든 모아둔 돈으로 자취집을 구해서 독립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보증인은…… 진혁만 아니면 된다. 되어줄 것 같은 사람도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진혁과 계속 살고 싶은 마음이 강했기 때문에 솔직히 내키지 않는 결정이었지만 앞으로를 생각해서 희나는 그러기로 했다.
실습은 겨우 하루 남았을 뿐인데 근시안적으로 고집을 부려 위험을 자초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선생님은 4학년이고, 6개월만 있으면 학교를 졸업한다. 앞으로 공부를 봐주겠다고 했고, 모델 아르바이트를 시작해서 접점과 시간만 확보하면 걱정만큼 멀어지지는 않을 거다.
그렇게 대강 결론을 내렸을 즈음 문이 열리고 지훈이 들어왔다. 손에는 직접 만든 듯한 샌드위치가 들려 있었다.
“피자 주문했어. 오기 전에 이거라도 간단히 먹자.”
굳이 피자 없어도 충분할 정도로 푸짐해 보였다. 꽤나 먹음직스러운 비주얼이었으나 진혁 생각에 입맛도 별로 없어서 희나는 그쪽에 눈길을 주지 않고 지훈을 쳐다보았다.
결론을 내린 듯한 그 눈을 보고 지훈이 물었다.
“마음은 결정했어?”
“응. 여기 있을게.”
희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하자 지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잘 생각했어-. 내가 진짜 재미있게 해줄게.”
“쭉 있겠다는 건 아냐. 며칠간만 있다가 나갈 거야.”
“뭐? 어디로 가려고……?”
“선생님 집으로는 안 가. 여기 있는 동안 혼자 살 만한 곳을 알아볼래.”
진혁에게 안 간다고 말해도 지훈의 표정은 불만스러워 보였다.
“선생님에 대한 건 잊어버려. 선생님이랑은 정말 아무 일 없어. 그럴 사람이 아니야.”
“글쎄. 계속 그렇게 말할수록 더 의심스러워지는데.”
“나, 너랑 사귈게.”
불쑥 나온 말에 샌드위치를 집어 들던 지훈의 움직임이 멎었다.
“선생님한테도 그렇게 말할게. 그럼 믿는 거지?”
“……또 날 바보 취급하려고?”
자신이 원하던 대로 하겠다고 말했음에도 지훈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가 불신에 가득 찬 표정으로 툴툴거리듯 말했다.
“아까까진 의미 없다고 말해놓고 이제 와서? 나 없는 사이에 전화해서 둘이 그러기로 짠 거 아냐?”
짠 건 아니었지만 눈치가 정말 빠르다. 희나는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냐! 정말 아무 일도 없어. 이제 선생님은 내버려 둬.”
“싫어. 아무래도 직접 얘기해야겠어. 더러운 짓 그만두라고 면상에 대고 말하지 않으면 마음이 안 풀려.”
“그러지 마!”
희나는 소리치듯 언성을 높여 말하며 떨리는 손으로 지훈의 팔을 잡았다.
“그러지 마. 선생님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렇게 니가 감쌀수록 그 자식이 더 비겁해 보이는 거 알아?”
“좋아하는 건 나야.”
지훈의 눈이 심각하게 변했다. 진심이 입 밖으로 나오자 제대로 숨을 쉬기도 힘들다. 희나는 입술을 바들바들 떨며 말을 이어갔다.
“선생님을 좋아해, 내가.”
스스로 인정도 하지 못하던 마음을 당사자도 아닌 다른 사람에게 고백해버렸다. 말로 뱉어내니 더 실감이 되어서 말할 수 없이 속이 상했다. 희나의 눈시울이 빨개졌다.
“그 사람은 착해서 내 억지에 휘둘린 거밖에 없어. 내가 자기 좋아하는 것도 몰라…….”
“…….”
“알리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선생님은 그냥 내버려 둬.”
눈가가 빨개져도 눈물은 흘리지 않았지만 지훈은 손을 뻗어서 마치 눈물을 닦아주듯 희나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훈은 그 상태로 희나를 쳐다보며 말이 없다가 한참이 지나서 입을 열었다.
“……정말 나랑 사귈 생각이야?”
“……여기 있는 동안은.”
오래 사귈 생각은 없었으므로 희나는 일단 확실히 해두었다. 실습이 끝나고, 집을 구해서 나가면 지훈과는 거리를 둬야지. 선생님의 집에서 나오기만 하면 서로 만나도 떳떳할 수 있을 거다.
지훈은 또렷한 눈으로 희나를 지그시 쳐다보며 말했다.
“넌 곧 그 녀석 잊어버릴 거야. 날 좋아하게 만들 거야.”
“…….”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희나는 굳이 부정하지 않고 잠잠히 있었다.
“당장 날 좋아하라고 하진 않을 테니까. 열린 마음으로 있겠다고 약속해.”
“……알았어.”
“믿어도 되는 거지? 상황 모면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지? 나 연애는 내 방식대로 할 거야.”
“니 맘대로 해.”
희나는 될 대로 되란 심정으로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갑자기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시 올려다보니 지훈의 얼굴이 지척에 있었다.
“그럼 키스해도 돼?”
희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희나의 당황한 시선이 눈앞의 지훈을 응시했다.
캐러멜 빛의 피부와 긴 속눈썹이 드리워진 또렷한 눈. 다소 중성적인 인상을 줄 수 있는 얼굴은 잘 정돈된 짙은 눈썹과 또렷한 콧날이 밸런스를 맞추듯 남자다움을 부여하고 있었다.
충분히 보기 좋은 예쁜 얼굴이지만, 희나는 뒤로 주춤 물러서고 말았다.
눈동자가 기억에 있는 남자의 눈을 하고 있었다. 그녀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눈은 진혁의 것과 달리 그 충동을 감출 생각도, 억누를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렇게 무서워하지 마.”
달래는 듯한 목소리가 낮게 희나의 허리를 울린다.
지금 느끼는 반응이 두려움인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꺼림칙하다. 상황이 거북하고 당장이라도 도망쳐버리고 싶은 마음이 치밀어 오른다.
이제 따뜻한 숨이 느껴질 정도로 가깝다. 입술이 맞닿을 것 같다.
키스 같은 거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넘기고 싶지만…….
“싫어…….”
거부감이 소리가 되어 흘러나왔다.
싫다. 이런 건 싫어. 희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러자 바로 앞에서 하- 하는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몸이 앞으로 휙 이끌려 가며 입술에 뭔가 닿았다.
입술만이 아니라 얼굴 전체에.
뭔가에 푹 파묻힌 듯한 느낌에 희나는 슬쩍 눈을 떴다.
그리고 지훈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도가 되어 살짝 고개를 들자 지훈이 내려다보며 조금 입술을 내밀었다.
“나랑 키스하는 게 그렇게 싫어……?”
“갑자기 키스라니. 당연하잖아.”
희나는 안고 있는 지훈을 살짝 밀어내려 했지만 몸을 감싼 팔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지훈은 한 팔로 진정하라는 듯이 그녀의 등을 살짝 토닥거리며 떠보듯 물었다.
“그 녀석이랑 키스도 안 했어?”
“그런 사이 아니랬잖아. 이상한 말 좀 그만해!”
얼굴을 붉히며 쏘아붙이자 지훈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다.
“진짠 거 같네. 열 받긴 하는데, 미묘하게 안심되기도 하고.”
“…….”
지훈은 희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옅은 갈색의 눈동자가 마음속까지 뚫어보는 거 같다.
그의 손가락이 희나의 통통한 복숭앗빛 입술에 닿자 희나는 움찔해서 고개를 숙였다.
“너 혹시…… 키스한 적 한 번도 없어?”
희나의 반응에 지훈이 눈을 살짝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대답 대신 희나는 빨개진 얼굴로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그러자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리고 눈앞에 있는 지훈의 목울대가 살짝 움직였다.
“아, 진짜 하나하나 귀여워 죽겠네.”
지훈의 팔이 아까처럼 가볍게 안는 게 아니라 완전히 꼭 끌어안아 왔다. 깜짝 놀란 희나가 전기에 맞은 듯 파드득대자 지훈이 웃으면서 안심시키듯 말했다.
“걱정 마, 아무것도 안 할 테니까.”
“벌써 끌어안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안 하긴 뭘 안 해-.”
희나의 낮은 불평에 대한 반응 대신 지훈은 다정하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듣기 좋은 목소리가 희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첫 키스는 나랑 하는 거야. 이런 방 같은 데서 말고, 더 좋은 데서.”
“…….”
“재미있는 것도 많이 하고, 맛있는 거도 많이 먹고, 매일매일 재미있게 지내다가 어느 순간에 정신 차려 보면, 나랑 있는 거밖에 생각 못 하게 될 거야.”
다른 가능성은 생각도 하지 않는 듯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희나는 그럴 거 같지 않다고 말하듯 고개를 젓다가 지훈의 입술이 머리카락에 와 닿자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랐다.
“너, 너! 아무것도 안 한다고 했잖아!”
“에이, 뽀뽀는 벌써 한 번 했잖아. 이 정도는 빨리 익숙해져야지.”
지훈은 머리카락을 문지르며 밀어내는 희나의 팔목을 잡아 또다시 입을 맞췄다. 그리고 이제 잘 익은 사과같이 빨간 희나에게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계속 더 많이 할 거야. 지금 니가 나를 남자로 느끼지 않는 것 같으니까. 그 인식을 바꾸는 데는 사실 스킨십만 한 게 없고.”
“…….”
“두근두근하잖아, 이렇게 있으니까.”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도 정말 박동이 빨라져서 손목에 얼굴을 대고 있는 지훈을 속일 수가 없었다.
지훈은 잠시 그렇게 있다가 뭔가를 가라앉히듯 심호흡을 하더니 아쉬운 듯 희나를 놓아주며 말했다.
“이러다 정말 못 참겠다. 이제 자러 가자.”
지훈이 먼저 일어나 기다리는데도 희나가 움츠러든 채 일어나지 않자 지훈이 웃으며 팔을 끌었다.
“같이 자는 거 아냐. 손님방으로 안내해줄게.”
희나는 쭈뼛대며 지훈을 따라 나와 복도를 하나 지나 안쪽으로 들어갔다.
지훈이 문 한쪽을 열고 방 안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자면 돼.”
안쪽을 들여다본 희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푹신한 러그가 깔린 방 한가운데에 전에 모텔에서 본 침대만큼 커다란 침대가 있었다. 향긋하고 포근해 보이는 분위기에 아까 본 방들처럼 넓진 않지만 도리어 그게 더 안정감을 주었다.
희나가 정신없이 쳐다보는 걸 흐뭇하게 바라보며 지훈이 설명했다.
“샤워는 저 안쪽 문 열고 들어가서 하면 돼. 가운도 걸려 있으니까 교복 대신 입고 자고.”
“응, 알겠어.”
“방은 마음에 들어?”
거짓말이라도 아니라고 할 수 없어서 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헤- 잘됐다. 그리고 내 방은 바로 옆방이니까…… 밤에 무섭거나 외로우면 아무 때나 와-.”
“절대 안 가!”
지훈은 쿡쿡 웃었다. 그리고 희나가 안으로 들어가자 인사를 하려고 하다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아, 맞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뭔데?”
“나도 네가 싫어하는 건 안 하는 대신 너도 내가 싫어하는 건 안 했으면 좋겠어.”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조금 사라지고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뭘 안 했으면 좋겠는데?”
“그 사람 만나지 마.”
그 사람이 누군지 묻지 않아도 뻔했다. 희나는 동요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
“너랑 사귀면 사람 만나는 거도 다 허락받아야 되는 거야?”
“그렇게는 말 안 했어. 다른 남자는 괜찮아. 하지만 그 사람은 안 돼.”
“선생님은 아무 잘못도 없다고 내가 말했잖아.”
“네가 좋아한다며. 그러니까 안 돼. 나도 네가 싫다고 하는 사람은 다 안 만날게.”
거절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듯 아주 강한 어조였다. 희나는 마지못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뛰어들었다.
“내일이 마지막이야. 잘 자.”
인사를 한 지훈은 문을 닫아주고는 방을 나갔다.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희나는 힘없이 고개를 방 안으로 돌렸다.
지훈의 집은 희나가 어렸을 때부터 이런 집에서 살 수 있다면 뭐든 다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그런 꿈같은 집이었다. 하지만 희나는 소박한 진혜의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방을 더 빨리 구해야 해. 여기서 더 빨리 나가야 돼.’
푹신하고 넓은 침대에 오도카니 앉아 있다가 희나는 어색하게 기어들어 갔다.
너무나 포근한 감각이 도리어 뻣뻣한 몸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혼자가 되자 불편한 몸에 감각이 되돌아오는 것 같다. 다리는 여전히 참혹하고, 등도 아리고, 복부에도 많이 빠지긴 했어도 아직 멍 자국이 선명하다.
상처를 생각하자 희나는 그 하나하나를 부드럽게 치료해주던 커다란 손이 떠올라서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어버렸다.
희나는 살짝 몸을 일으켜 충전하지 않아 배터리가 간당간당한 휴대폰을 슬며시 꺼냈다.
희나가 전화를 끊은 뒤 더 전화가 오진 않았지만 카카오톡 메시지가 와 있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걱정하고 있으니까 괜찮아지면 연락해.」
짧은 메시지에 눈이 순간 시큰했다. 걱정하고 있을 게 눈에 선해서 맘이 아프다.
나는 도움이 안 되나 보네- 하고 슬픈 듯이 말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안심시켜주고 싶지만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희나는 보내지 못할 메시지를 썼다 지웠다 하며 뒹굴거리다가, 해가 창을 하얗게 물들일 무렵에야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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