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Stuck (4)
“…….”
굳어져서 서 있는 희나를 보고 그는 그럴 것을 예상했다는 듯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거 봐, 아무 사이도 아닌 거 아니잖아.”
희나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냥 떠본 건데 흔들린 거다.
[삐리리리릭.]
그녀가 뭐라고 반박하려고 하는 순간 낮은 음악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벽 쪽에 붙은 인터폰에서 빛이 나며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긴장감이 흐트러지고 지훈이 천천히 일어나서 인터폰 쪽으로 걸어갔다.
버튼을 누르자 곧 중후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훈아, 집에 있었어?]
“네, 아버지.”
방금 소란을 피우는 소리가 들린 모양이다. 집이 너무 넓으니까 내선으로 이야기를 하는구나. 희나는 아연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이런 설비가 있는 집이 있다니.
[왔으면 인사라도 하지그래. 얼굴 보는 시간이 얼마나 된다고.]
“죄송해요.”
[지금 곧 외출할 건데 밥 먹었어?]
“아뇨. 저 혼자가 아니에요. 지금 같이 내려갈게요.”
[어? 그래? 방해해서 미안하구나.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
곧 신호음이 들리고 인터폰이 끊겼다. 지훈은 희나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내려가자.”
희나는 머뭇거리며 일어나서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고쳤다. 방문을 잡고 나가기 직전 지훈이 멈춰 서더니 말했다.
“그 전에 말해둘게. 나 부모님한테 여자 친구라고 소개할 거야.”
“왜 그렇게 해?”
“넌 결국 내 여자 친구 될 거니까, 언제가 됐든.”
아주 확신에 찬 어조로 그렇게 말하고는 기막혀하고 있는 희나를 두고 지훈은 먼저 방을 나가 버렸다.
희나는 잠시 그대로 서 있었으나 그래 봐야 별수 없다는 걸 깨닫고 지훈을 따라갔다.
1층으로 내려가 아까 지나왔던 거실 왼쪽 복도로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꺾으니 타일이 깔린 다른 느낌의 복도가 나왔다. 그 왼쪽으로 또 하나의 거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현대적인 분위기였던 중앙 거실과 달리 따뜻하고 고풍스러운 느낌이었다. 중앙의 푹신한 소파 위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 사람들을 보고 희나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오- 친구가 여자애였어? 어서 와요-.”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호들갑스럽게 다가오는 여인은 어디로 보나 한국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키가 크고 붉은 머리에 녹색 눈을 한 우아해 보이는 백인이었다.
“반가워. 나 지훈이 엄마예요. 일레인이에요.”
이런 외국인이 엄마라니-.
풍부하고 어색한 외국인 억양으로 말하며 반갑게 내민 손을 얼떨떨하게 잡고 희나는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말했다.
“주희나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어머어머- 지훈이 걸프렌드? 아주 예쁘구나-. 일본 인형 같네-.”
“하하. 왜 인사도 없이 방으로 가서 콕 박혀 있었는지 알 만도 하군.”
아버지 쪽은 발음이 독특하고 교포 같은 분위기가 풍기긴 했지만 명백한 아시아인이었다. 지훈과 아주 많이 닮았는데 10대 아들을 둔 아버지라고 보기엔 나이가 상당히 많아 보였다.
지훈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얼굴을 바싹 들이댄 채 희나를 보고 있는 두 사람에게서 희나를 살짝 떼어내면서 물었다.
“제 여자 친구예요. 오늘 손님방 써도 돼요?”
“오, 묵고 가려고? 물론이지. 근데 우린 이제 외출할 건데. 저녁은 먹었니?”
“아뇨. 적당히 피자라도 시켜 먹을게요.”
“같이 나가서 식사라도 하지그래? 두 사람 얘기도 듣고 싶고. 아주 멋진 레스토랑을 예약해놨는데.”
“두 분이서 드세요. 저흰 괜찮아요.”
희나는 항상 선생님한테까지 분방하게 굴던 지훈이 부모님한테 깍듯한 말투를 쓰는 게 어색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색한 건 매우 격의 없이 환대해 주는 부모님의 모습이었다.
“여보- 눈치 없기는. 둘이 있게 해줘요.”
“아하하-. 그래, 그렇군. 우린 열 시쯤에 돌아올 거야. 그렇게 해.”
“스위티, 얼마든지 재미있게 놀다 가렴. 우리들이 여기 있다는 건 잊지 말고.”
“우린 계속 귀 기울일 거야.”
두 사람은 재미있다는 듯이 귀를 톡톡 두들기며 농담처럼 유쾌하게 말했다. 빠르고 생소한 발음에 의미를 모르겠어서 희나는 그저 “네, 네.”라는 말만 반복하며 그들이 번갈아 내미는 손을 잡았다.
“보호자가 없어도 프로텍션을 잊지 마-! 우리 방 침대 서랍에 있어.”
거실을 나오기 직전 일레인이 소리쳤다. 그러자 계속 포커페이스이던 지훈이 얼굴을 좀 붉히며 “아, 진짜!” 하고 혀를 찼다.
어리둥절해하면서 희나는 질질 끌리다시피 지훈의 방으로 돌아왔다.
부모님을 만나고 돌아오니 지훈은 원래의 소년다운 모습으로 조금 돌아와 있었다. 시간이 흘러, 아까까지 느끼고 있던 격한 감정이 조금씩 희석되기 시작한 때문일 것이다.
희나는 지훈이 문을 닫자마자 물었다.
“너 혼혈이었어?”
전체적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하면서 색소가 옅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지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버지는 엄마가 죽고 재혼하셨어. 일레인은 새엄마야.”
담담한 대답에 계모는커녕 원래 엄마도 거의 기억에 없는 희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잠잠히 있었다.
지훈이 그 뻐끔뻐끔하는 희나의 얼굴을 보고 먼저 말을 꺼냈다.
“표정이 왜 그래? 어색해할 거 없어. 우리 가족 사이 좋아.”
아까까지 줄곧 딱딱했던 지훈의 표정에 조금 웃음이 피어올라 있었다.
“여자애를 데려왔는데…… 괜찮은 거야?”
“집으로 데려오는 게 사고칠 일 없잖아?”
그러면서 지훈은 아까처럼 테이블에 앉는 대신 희나와 함께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희나는 어리벙벙하게 중얼거렸다.
“엄청 깜짝 놀랐어.”
“미안. 우리 부모님이 좀 특이하지. 외국에서 오래 살아서 그래.”
“외국?”
“두 분은 여기 가끔만 오셔. 원래 홍콩에서 사시고. 나도 열 살 때까진 홍콩에서 살았어.”
저 굉장히 격의 없고 어딘가 일반인의 상식 밖에 있는 듯한 사고방식은 외국에서 오래 살아서인가.
희나가 곰곰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지훈이 주의를 환기시키듯 그녀의 팔을 잡았다.
“부모님은 다음 주부터 다시 홍콩으로 돌아가실 거야. 가시면 또 몇 달 있다 오실 거고.”
“그래?”
지훈은 중요한 말을 하는 듯 무게를 잡았으나 희나는 별생각 없었다.
부모님이 홍콩 가시는데 뭐? 원래 홍콩에서 산다고 했으니 당연히 그런 거 아닌가?
지훈은 의도를 모르겠냐는 시선으로 담담히 있는 희나를 주시하다가 끝내 아무런 반응이 없자 먼저 말을 꺼냈다.
“난 한국에 혼자 남을 거야. 대학 졸업할 때까지 계속 여기 있기로 이미 얘기했어.”
지훈의 진지한 목소리에도 희나는 ‘음,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다. 지훈이 홍콩에 갈 거라고 애초에 생각도 안 했으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
희나는 유독 말을 오래 끄는 지훈을 심드렁하게 쳐다보았다. 왠지 껄끄러운 예감이 든다.
“그러니까 나랑 같이 살자, 이 집에서.”
같이 살자라……. 음?
말의 의미를 파악한 희나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말도 안 돼!”
“……이제야 뭔가 반응이 있네.”
“어떻게 같이 살아? 너희 부모님께서 뭐라고 생각하시겠어!”
“부모님은 외국에 계시는데 너랑 같이 사는지 어떻게 알아. 그리고 좀 있으면 고등학교도 졸업하는데 동거하는 게 뭐가 어때서.”
희나의 상식적인 이의 제기에도 지훈은 완전 태연했다.
“그놈 집에서 사는 거보다 여기서 사는 게 좋잖아. 남는 방도 많아.”
“……말도 안 돼.”
“왜 말이 안 되는데?”
지훈은 희나의 어처구니없어하는 반응에 살짝 기분이 나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 사람이랑은 아무 사이 아니라면서 이미 같이 살았잖아. 난 왜 안 되는데?”
“……그거랑 이건 경우가 달라.”
“같이 살 거라면 내가 더 낫잖아. 난 널 좋아하는데. 나 너한테 장난으로 이러는 거 아냐.”
지훈의 진지한 표정에 희나의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방 안에 단둘이 있는데 이런 흐름은 별로 달갑지 않았다.
희나는 시선을 피하면서 새침하게 말했다.
“그게 더 문제지.”
“왜? 내가 뭐 덮치기라도 할까 봐 그래?”
돌직구로 물어 오자 발그레하던 희나의 얼굴이 좀 더 빨개졌다. 지훈은 살짝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
“아까 말했듯이 너 싫어하는 건 안 할 거야. 오히려 그 사람이 그럴까 봐 더 걱정이지.”
“선생님은 나한테 아무 짓도 안 해. 그럴 생각도 없어.”
발끈한 희나의 입에서 즉각적인 반박이 나왔다. 그러자 지훈이 뭘 모른다는 듯 킥킥 웃었다.
“니가 남자를 몰라서 그러는 거지.”
“모르긴 뭘 몰라. 선생님에 대해선 내가 더 잘 알아.”
“말도 안 돼. 이렇게 예쁜데. 고자가 아니고서야 그런 생각 안 할 리가 없어.”
그렇게 말하며 지훈은 희나의 팔을 잡더니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희나는 붙잡힌 손목이 뜨거워 뿌리치려고 했지만 떨어지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나쁜 맘 먹으면 순식간에 당하게 된단 말이야. 넌 저항도 못 할걸.”
“너 왜 그래. 이거 놔!”
희나가 주춤 뒤로 물러나면서 앙칼지게 말했지만 지훈은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이거 봐. 움직이지도 못하잖아. 마음먹고 덤비면 그냥 끝이야.”
“선생님은 그런 짓 안 해, 절대로.”
발끈해서 반박하면서 희나는 똑바로 시선을 마주쳤다. 진혁은, 희나가 싫다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거다.
지훈은 더 다가오진 않았지만 물러서지도 않았다. 그래서 둘은 기 싸움이라도 하듯 말없이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시곗바늘이 아홉 시를 지나자 잠잠히 앉아 있던 지훈이 긴장을 흩뜨리고 나직하게 말하며 일어섰다.
“한번 잘 생각해봐. 요기할 거라도 가져올 테니까.”
딱히 배가 고프다기보다, 그 분위기를 참을 수 없어서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희나는 지훈이 나가자마자 긴장이 풀어져 자세를 조금 흐트러뜨렸다.
쏟아 내리듯 테이블에 힘없이 팔을 뻗고 고개를 묻고 있다가, 희나는 진혁을 떠올리고 느슨하던 사색의 끈을 조였다.
식사 이야기가 나오니 아까 같이 먹으려고 산 분식들이 떠올랐다.
혼자서 그 많은 음식들을 두고 덩그러니 기다렸을 진혁이 생각나서 속상했다.
지금 그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궁금해서 휴대 전화를 꺼내 들었다. 10통이나 되는 부재중 전화가 걸려와 있었다.
희나는 탈력한 듯 앉아 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슬쩍 문을 열고 방 밖을 내다보았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다.
그걸 확인한 희나의 손이 빠르게 전화를 걸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신호음이 울리자마자 진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희나의 빠른 목소리가 쏟아졌다.
“선생님 나 괜찮아요. 걱정하지 말고 먼저 자요.”
[희나야, 어떻게 된 거야?]
“……급한 일이 좀 생겼어요. 내일 학교에서 봐요. 지금은 얘기할 시간 없어요.”
[무슨 일이야? 잠깐만…….]
“미안해요. 그치만 걱정 마세요.”
그렇게 말하고 희나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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