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Stuck (3)
희나는 시선을 떨구고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뻗어 지훈의 다른 팔을 잡고 간절히 말했다.
“……부탁이니까 다른 데로 가자.”
지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감정을 절제하는 듯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깊게 숨을 들이쉬며 심호흡을 하더니 나직이 내뱉었다.
“오늘 못 들어간다고 말해. 나랑 갈 데가 있다고.”
“말하고 나올게.”
“내 앞에서 해, 지금 바로.”
희나가 무슨 말인지 의미를 몰라 바라보자 지훈의 시선이 그녀가 손에 쥐고 있는 휴대폰으로 향했다. 전화를 걸라는 말임을 알고 희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금방 말하고 나올게. 나 교복인 데다가 지금 지갑도 없고…….”
“안 돼. 내가 보는 데서 해.”
단호한 말에 움찔한 희나가 한 걸음 물러났다. 무서워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지훈의 눈에 담겼던 노기가 순간 누그러들었다. 그러나 단호한 태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다시 저 안으로 혼자 들여보낼 수 없어. 여기서 말해, 나 눈 뒤집히기 전에.”
“…….”
“저 자식이 지금 내 눈에 띄면 무슨 짓 할지 몰라.”
씩씩거리는 투가 진혁이 있으면 싸움이라도 걸 기세였다.
생전 싸움 같은 건 해보지 않았을 듯한 진혁과 주먹으로 유명한 지훈을 생각하며 희나는 겁을 먹었다. 지훈보다 키가 크고 체격도 탄탄한 진혁이 그냥 쉽게 당할 거 같진 않았지만 어쨌든 둘을 여기서 충돌하게 할 순 없었다.
희나는 지훈이 시키는 대로 전화하는 대신 메시지를 입력했다.
「급한 볼일이 생겨서 못 들어갈 거 같아요. 먼저 드세요.」
“나랑 있을 거라고 써, 확실하게.”
머뭇거리다 희나는 마지못해서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지훈이한테 가봐야 될 거 같아요. 내일 학교 갈 테니 기다리지 마세요.」
그렇게 써서 전송하자 지훈이 만족한 듯 입을 다물었다.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액정에 진혁의 이름이 떴다. 전화가 걸려 온 것이다.
희나는 당황했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문을 열고 바깥을 살펴볼지도 모른다.
“빨리 가자.”
“왜? 전화 받고…….”
“하자는 대로 했잖아. 이제 가자.”
희나는 강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속상해서 목소리가 떨렸다.
지훈은 불만스러운 듯했지만 희나의 축 처진 커다란 눈동자를 보더니 더 말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가는 팔목을 붙잡은 채 그곳을 벗어났다.
큰길로 나와 택시를 잡은 지훈은 희나를 태운 뒤 삼성동으로 출발했다. 천호가 아니라 삼성동으로 가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지훈의 기색이 워낙 살벌해서 희나는 잠잠히 앉아 있었다.
그는 지나간 일들을 하나하나 생각할수록 화가 나는지 혼자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망할 자식…… 나를 바보 취급했어. 주차장에서 너랑 같이 보내면서 내가 얼마나 웃겼을까. 콘테스트도 그렇고……. 생각해주는 척하면서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단 말이지.”
입 안으로 “가만 안 둘 거야.”라고 나직이 되새기는 지훈의 모습에 희나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냥 듣고 있을 수가 없어 희나가 불안하게 물었다.
“가만 안 두다니……. 학교에 말할 거야?”
지훈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눈을 돌려 희나를 쳐다보았다. 희나는 열심히 변명하듯 말했다.
“네가 무슨 생각 하는진 알겠는데…… 오해하는 거야.”
“무슨 오해.”
“나랑 선생님은 그런 사이가 아냐.”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지훈의 입꼬리가 어이없다는 듯 올라갔다.
사실 손을 잡고 한 집으로 들어가는 걸 들킨 마당에 못 믿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짓말도 아니다.
희나는 진정을 담아 설득했다.
“아까 그건 정말 아무 의미도 없어.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럼 대체 왜 그 자식 집에 있는데?”
“집 나와서 갈 데가 없어 그랬을 뿐이야. 희원이한테 들었으면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 거 아냐.”
지훈은 창가에 기댄 팔에 턱을 괸 채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꿰뚫어보는 듯한 눈빛이었지만, 희나는 진혁과의 관계가 떳떳하다고 생각했으므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아주 조금 누그러진 말투로 지훈이 물었다.
“그래도…… 왜 나한테 안 오고 저런 놈한테 가?”
“왜 내가 굳이 너한테 가야 하는데? 도움 받아놓고 거짓말한 건 미안하지만, 너랑 잘 알지도 못하고 너도 나랑 아무 사이 아니잖아.”
“하지만 나한테 오면 내가 더 잘해줄 게 뻔하잖아.”
“호랑이 입에 내 발로 들어갈 일 있나.”
희나가 입술을 비죽거리자 지훈이 비스듬히 앉아 있던 자세를 똑바로 하고 손을 잡더니 그녀를 쳐다보며 진중하게 말했다.
“나 물론 너 안고 싶고 만지고 싶긴 하지만…… 그런 거만 노리고 너 따라다니는 거 아냐.”
엄청나게 낯 뜨거운 말을 마친 지훈에게 희나가 뭐라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운전하고 있던 택시 기사 쪽에서 “풉!”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이 쳐다보자 택시 기사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으며 사과를 했다.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고등학생의 풋풋한 사랑 투닥거림이라고 생각하고 웃음이 터진 모양이었다.
희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지훈이 잡고 있는 손을 뿌리치고 고개를 돌렸다. 지훈도 좀 민망한지 볼을 긁적이며 어색하게 앞쪽을 보았다.
그렇게 잠시 말이 없다가 멀리 무역센터가 보이기 시작할 무렵 희나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어디로 가려는 거야?”
“우리 집.”
집에 간다는 말에 놀라서 내리려는 희나를 지훈이 억지로 뜯어말렸다.
가지 않겠다고 계속 버티던 희나는 집에 부모님이 계시니 괜찮다는 지훈의 말에 한 번 더 놀랐다.
부모님까지 계시는 집에 대체 왜 데려가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지훈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결국 유명한 주상 복합 단지 앞까지 끌려왔다. 떳떳하건 말건 일단 그가 학교에 말하지 않게 하려면 비위를 맞춰야 했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지훈은 희나의 팔목을 잡은 채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지나가며 몇 번 본 적이 있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목을 뒤로 젖혀도 한눈에 보기 힘든 높은 건물들이었다.
그에게 끌려서 불편한 기분으로 최상층에 도착한 희나는 아파트의 내부를 보고 입을 조금 벌리고 말았다.
여태까지 살면서 남의 집에 거의 가본 적이 없긴 하지만 내부가 복층으로 된 아파트가 있다는 건 난생처음 알았다.
복도 안쪽으로 카펫이 깔린 거실이 보이고 위층으로 향하는 듯한 층계가 있었다. 희나의 집이 두 개는 들어갈 법한 거실의 탁 트인 창밖으로는 석양이 지고 있는 뷰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들어와.”
잠시 멍청히 서 있던 희나는 지훈의 재촉에 안으로 들어섰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푹신한 슬리퍼를 신고 계단을 올라가는 지훈을 따라가자 그가 복도를 지나 문 하나를 열더니 말했다.
“여기가 내 방이야. 일단 들어가.”
“부모님은…….”
“식당 쪽 거실에 계실 거야. 일단 잠깐 얘기 먼저 해.”
식당 쪽 거실이라니. 아까 본 거실도 어마어마한데, 그거 하나가 아니란 말이다.
희나도 그가 부잣집 아들일 거란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사는 세계가 달라도 너무 달라서 지훈이 더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서 있지 말고 편하게 앉아.”
넓은 방 한쪽 구석에 서 있는 희나에게 지훈이 방 왼쪽에 있는 테이블 앞의 의자를 권했다.
전용 발코니가 딸려 있는 방은 책상이 있긴 했지만 테이블과 소파까지 따로 있어서 분위기가 도무지 고등학생 방 같지가 않았다. 침대가 없는 걸로 볼 때, 분명히 침실이 따로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며 희나는 의자에 앉았다.
“이렇게 말없이 와도 괜찮은 거야?”
“걱정 마. 친구 데려오는 거 좋아하셔.”
사실 마음만 먹으면 한 일주일쯤 살아도 부모님한테 안 들킬 거 같은 넓이다.
너무 으리으리한 집에 주눅이 든 희나의 앞에서 긴 다리를 쭉 뻗고 앉은 지훈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불쑥 말했다.
“너…… 그 관계 학교에 알려지기 싫은 거지?”
“……아무 관계도 아니라니까.”
“같이 사는 건 사실이잖아. 아무도 안 믿을 걸.”
희나는 입을 다물고 지훈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얼굴에 별다른 표정이 없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기가 어려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려고……?”
“뭐라고 하든 학교에 알릴 거야.”
지훈은 자신의 기색을 살피는 희나에게 냉랭하게 말했다. 희나의 안색이 달라졌지만 그는 담담했다.
“비겁하게 굴 생각은 없어. 하지만 학생하고 동거하는 파렴치한 놈이 선생이 되는 거도 웃기잖아. 아마 너한테는 큰 불이익은 안 갈 거야.”
“학교에 말하지 마! 선생님은 딱히 아무 잘못도 한 적 없어!”
“그럼 나한테 확인시켜줘.”
“뭘 어떻게 더 확인시켜? 내가 아니라고 몇 번이나…….”
“그 사람 입으로 말하게 해. 너랑 사귀는 거 아니고 앞으로 너한테서 손 떼고 더 이상 학생들한테 추잡한 접근 안 한다고. 그럼 아무 말도 안 할게.”
희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자신과 얽혔다는 이유로 그런 인격 모독적인 말을 하게 할 순 없었다. 집으로 찾아간 것도, 그의 품으로 파고든 것도, 진혁을 자신의 삶에 말려들게 한 것도 모두 그녀 스스로 한 일이었으니까.
“선생님은 그냥 내버려 둬.”
희나는 뻣뻣해져서 잘 움직이지 않는 입을 억지로 움직여 힘주어 말했다.
“절대 나쁜 사람이 아냐. 그 사람은 선생님이 될 자격 충분해.”
“그걸 본인 입으로 확인시켜 달라는 말이야.”
“……그럴 수 없어.”
“네가 싫다고 해도…….”
“선생님에 대해서 학교에 말하거나, 혹은 직접 가서 아무 말이라도 한마디 하면 정말 평생 저주할 거야. 니가 때리고 욕하고 협박해도, 거들떠도 안 볼 거야. 절대로!”
희나는 ‘쾅!’ 소리가 날 정도로 테이블을 내려쳐 지훈의 말을 자르고 마구 쏘아붙였다. 그 강한 기세에는 여태까지 냉정하던 지훈도 조금 움찔했다.
폭풍처럼 말을 쏟아내고 일어선 희나는 숨을 몰아쉬며 지훈을 진지하게 쳐다보았다.
“정말로…… 그런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가늘게 흘러나온 목소리.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진심을 파악하려는 듯 눈을 마주친 채 한동안 잠잠했다.
그리고 얼마 후, 지훈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좋아. 그럼…… 네 말대로 정말 아무 사이가 아니라면…….”
일어서 있는 희나를 진정시키듯 부드럽게 잡아당겨 앉히며 그가 말했다.
“나랑 사귀자.”
희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뭐?”
“그럼 그 말 믿을게.”
경악은 곧 어처구니없음으로 바뀌었다. 즉시 희나의 미간이 좁혀지고 황당하단 듯 눈이 크게 뜨였다.
“그딴 건 사귀는 게 아니잖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내 생각엔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아닌데.”
“대체 왜 그러려고 해? 아직도 나랑 사귀고 싶어? 난 너한테 거짓말했어.”
“누구나 거짓말해. 그 정도는 딱히 별것도 아냐.”
답답해하는 희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지훈은 흔들림 없이 말했다.
“정말 아무 일 없다면, 내가 보는 앞에서 나랑 사귄다고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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