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Stuck (2)
“너 뭐냐? 희나야, 이놈 뭐야. 삥 뜯는 거야?”
처음 보는 덩치 큰 학생한테 돈을 내미는 걸 오해하고 기사 노릇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줄 아나.’
희나는 찌푸린 얼굴로 희원 쪽으로 걸어가는 지훈을 잡아끌었다.
“누가 삥을 뜯는다고…….”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희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희원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90도로 허리를 굽혀 지훈에게 인사를 하는 동생을 본 희나는 깜짝 놀랐다. 학교는 오지도 않는 녀석이 지훈을 어떻게 알고 선배 타령? 거기다 누나한테는 야라고 부르는 주제에 심히 깍듯한 호칭이다.
지훈은 희원의 깍듯한 인사는 받는 둥 마는 둥하고 다짜고짜 캐어물었다.
“어디서 봤다고 선배래. 너 이름 뭐야? 희나랑 무슨 사이야?”
“사이는 무슨 사이. 니가 무슨 상관이야?”
“제가 동생입니다!”
“동생? 친동생?”
희나의 말은 묵살당하고 둘이서 묻고 대답했다. 지훈은 눈을 크게 뜨고 둘을 번갈아 보더니 굳어져 있던 표정을 확 풀었다.
“오- 그러고 보니 둘이 완전 닮았네. 야, 야. 안녕? 반갑다?”
방금 전까지는 한 대 칠 기세더니 동생이란 말에 포옹이라도 할 듯했다. 지훈의 친근한 태도에 희원은 황송한 표정을 지으며 좋아했다.
“저도 반갑습니다, 선배님! 선배님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 하하, 이제 잘 지내자.”
희원도 중학교 때 싸움깨나 하고 다녔는데 하는 태도를 보아하니 지훈이 막 날리긴 하는 모양이네. 그러니까 열 명이 넘는 막 나가는 가출 팸을 협박하는 거겠지만.
둘이 서로를 엄청 반가워하고 있었지만 희나는 지훈과 희원이 가까워지는 것이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넌 여기 왜 왔어?”
“저 위에서 보는데 쟤가 너 삥 뜯는 거 같길래 나왔어.”
희나의 퉁명스러운 물음에 지훈이 교사 위쪽 창문을 가리키며 순순히 대답했다.
“여기 으슥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렇지가 않은 모양인데.”
“내가 운명적으로 발견한 거지.”
“그렇다기엔…….”
전에도 여기서 지훈과 얘기하다가 눈에 뜨인 기억이 있었다.
그걸 떠올리고 별관 쪽 교사를 올려다보던 희나는 교사 휴게실 창문 안쪽의 진혁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미소를 짓더니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맞은편에 재연이 앉아서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희나는 진혁에게 동생과 있는 모습을 들킨 것도, 그가 재연과 함께 앉아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쳐다보고 있는 재연에게서 휙 고개를 돌린 그녀는 옆의 지훈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지훈이 웃음기가 전혀 없는 얼굴을 한 채 똑바로 교사 휴게실을 쏘아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 뭐 해?”
그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여서 소매를 잡아당겼더니 지훈이 깨어나듯 멈칫했다. 그리고 곧 밝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아냐. 그보다 학교 끝나면 동생하고 같이 놀래? 오늘 친구들이랑 같이 놀 건데 내가 쏠게.”
“정말이십니까?”
희원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지만 희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안 돼.”
“왜? 오랜만에 같이 놀자-. 내가 재미있게 해줄게.”
“저번 주에 현장학습 다녀왔는데 뭐가 오랜만이야. 나 아르바이트해야 돼.”
희나가 딱 잘라서 말하자 지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희원이 그의 기색을 살피고는 희나에게 불만스럽게 말했다.
“뭐야- 알바 그냥 한 번 빠지면 되지. 가자-. 선배님, 전 꼭 가고 싶습니다. 다른 선배님들도 오십니까?”
“둘이서 놀아. 난 일해야 돼.”
말하는 사이 쉬는 시간을 마치는 종이 울려서 희나는 교사로 가기 위해 돌아섰다. 그녀가 돌아서는 동안에도 지훈은 그대로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희나는 뒤통수가 따끔따끔한 기분이 들었다.
쉬는 시간의 찝찝한 기분은 방과 후가 되자 씻은 듯이 사라졌다.
천호역까지 따로따로 간 뒤 잠실역에서 조심스럽게 진혁과 합류한 희나는 함께 집으로 향했다.
북적이는 전철에서 나란히 선 채 대화도 오가지 않았지만 서로를 의식하고 있는 느낌이 좋았다.
꽤 많은 정거장을 지난 뒤 낙성대역에 도착했다. 집으로 가는 1번 출구의 계단을 오르는 중 반 걸음 정도 앞서 걷고 있는 키가 큰 진혁의 손이 눈앞에서 흔들거렸다.
희나가 가만히 손을 내밀어서 그 큰 손을 살짝 잡자 진혁이 돌아보았다. 조금 얼굴을 붉힌 뒤 시선은 다시 앞으로 향했지만 큰 손은 묵묵히 따뜻하게 마주 잡아 주었다.
손을 잡고 역사를 빠져나오자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희나는 평소보다 한 톤 높은 목소리로 발랄하게 말했다.
“아- 배고프다. 우리 먹을 거 사서 들어가요-. 나 내일 월급 받으니까 내가 쏘죠.”
“정말이야?”
“그래요. 죠스 떡볶이에서 마음대로 골라요.”
“뭐야, 겨우 떡볶이야?”
진혁이 불평하며 쿡쿡 웃었다.
손을 마주 잡은 채 둘은 역 근처에 있는 분식집에서 떡볶이와 순대 등을 포장하고, 유명한 제과점에서 빵을 하나씩 샀다. 별것도 아닌 음식들에 늘 지나던 길인데도 특별하게 느껴졌다. 희나는 집으로 가는 길이 더 더 더 길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집에 가면 같이 개그콘서트 보면서 먹어요.”
“난 예능 프로 원래 안 보는데-.”
“선생님은 꼭 봐야 돼요, 주변 사람을 위해서라도.”
희나의 단호한 말에 옆에서 뭐라고 투덜거렸지만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그리고 둘은 곧 집 문 앞에 도착했다.
진혁이 문을 열고 있는데 희나의 전화벨이 울렸다. 꺼내 보니 액정에 표시된 이름은 지훈이었다. 그의 앞에서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희나는 화면을 감추고 말했다.
“먼저 들어가세요. 전화 좀 받고 갈게요.”
“그래.”
진혁이 희나의 손에서 가방과 봉투를 받아 들고 문 안으로 사라지자 희나는 통화를 슬라이드했다.
“왜? 뭐라고 말해도 나 안 갈 거라니까.”
[…….]
먼저 전화를 걸어 놓고 수화기 건너에선 말이 없었다. 희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왜 전화 걸어 놓고 말이 없어?”
“나 여기 있어.”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
그것은 수화기 너머가 아닌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희나는 뻣뻣해진 고개를 들어 바깥으로 노출되어 있는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대문 밖 건너편 전봇대 옆에 서 있는 인영이 보였다.
분홍빛 갈색 머리. 작은 얼굴.
또렷한 눈동자가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희나는 그대로 못 박힌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지훈을 마주 내려다보았다.
“니가…… 여기 어떻게…….”
한참을 굳게 닫혀 있던 희나의 입술이 힘겹게 열렸다. 할 말을 찾을 수 없어 그렇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낙성대에 우연히 왔다가 본 걸까.
희나는 자신의 의문을 스스로 부정했다.
아니다. 학교에서부터 따라왔을 것이다.
잠실역에서 몰래 합류한 것과 아까 손을 잡고 걸어가는 걸 모두 봤을 거다.
좀 더 주위를 살폈어야 했는데. 서로가 서로에 집중한 나머지 주변은 안중에도 없었다. 희나는 낭패한 심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는 동안 지훈은 계단 위의 그녀를 묵묵히 쳐다보고 있었다. 항상 생글생글하던 얼굴이 굳어 있으니 다른 사람 같다.
희나가 떨리는 걸음을 옮겨 계단을 내려가 그의 앞에 서자 지훈의 입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뭔가 이상해서 따라와 봤는데 이럴 줄이야.”
“어디가 이상하단 건지 모르겠지만 왜 따라온 거야?”
당황한 것을 감추려 희나는 날카롭게 쏘아붙였으나 지훈은 동요하는 기색 없이 나직하게 물었다.
“왜 나한테 거짓말했어?”
“무슨…….”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던 희나는 아까 아르바이트 간다고 거짓말한 것이 떠올랐다.
“오늘 가게에서 안 나와도 된다고 해서…….”
“또 거짓말.”
지훈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희나의 말을 탁 끊었다.
“월요일 날 너 그렇게 가고 나서…… 걱정돼서 얼굴이라도 보려고 화요일도 수요일도 수업 끝나고 반에 가 봤어. 그때마다 벌써 없더군. 아르바이트하러 갔다고.”
“…….”
“몸도 안 좋은데 일하는 게 신경 쓰여서 어제 너 아르바이트하는 데 갔었어. 가니까 몸 아프다고 이번 주 계속 쉬겠다고 했다던데.”
말문이 막혀 희나는 고개를 떨궜다. 지훈이 침을 꿀꺽 삼키더니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둘이 같이 사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거…….”
자신 없는 어조로 희나는 조그맣게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는 그녀를 차가운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지훈이 스산하게 말했다.
“유진혜.”
희나는 지훈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에 움찔해 버렸다.
“저 사람 동생이라며.”
“…….”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인상이더라니……. 어제 생각나자마자 찾아가서 본인한테 직접 들었어. 유진혜……. 유진혁……. 내가 왜 더 빨리 눈치를 못 챘지.”
지훈의 목소리의 떨림이 더 깊어졌다. 면목이 없어서 희나는 도저히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호의를 이용해놓고 배신한 거다.
“계속 둘이 이상하게 친하다고 느꼈어. 하지만 그냥 같은 반이니까, 나도 재연 샘이랑 친하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려고 했어. 어제 알고 나서도 친한 선생님 동생이라서 찾아주려 한 거라고, 동생 가출했다는 소문 돌까 봐 대신 나서준 걸 거라고, 그렇게 혼자 납득하고 넘어가려 했어.”
희나는 그게 사실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깊은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듯한 지훈의 모습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점점 격해지는 어조로, 그간 느껴 온 감정을 폭발시키듯 지훈은 말을 이어 갔다.
“아까 네 동생한테 네가 집에 안 들어간다는 얘기 들었어. 그리고 아버지가 그렇다는 것도 들었고. 난 그냥…… 네가 아르바이트 안 하고 어디 가는지, 몸도 아픈데 어디 불편한 데서 고생하는 건 아닌지 확인하고 싶어서 따라온 거야.”
거기까지 말하고 그는 감정이 북받쳐 오른 듯 잠시 말을 멈췄다. 고개를 숙인 희나의 시야에 지훈의 주먹이 꼭 쥐어진 채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아까 네가 손 내밀어서 저 자식 손 잡을 때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아?”
지훈은 그 손을 내밀어 희나의 얼굴을 잡고 자신을 보게 했다.
옅은 갈색 눈동자가 배신감으로 가득 차 파랗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눈은 잠시 희나를 보다가, 곧 뒤편의 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배신감에 분노를 더한 빛으로 바뀌어서.
위험한 느낌이 들어 희나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가자.”
“뭐?”
“여기서 이러지 말고 다른 데 가서 얘기해.”
그 말이 지훈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단정한 미간이 순간 꿈틀했다.
“나랑 같이 있는 거 저 자식이 볼까 봐 그러는 거야? 오해라도 받을까 봐?”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계속 여기 있었던 거야? 집에 안 들어가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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