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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42화 (42/140)

42화. Stuck (1)

하지만 희나는 그런 기분을 내색하지 않고 억누르며 괜히 시큰둥한 척했다.

“흐응……. 공부보단 그럴 시간에 일을 더 하고 싶긴 하지만.”

“지금도 쓸 만큼은 벌잖아. 돈은 나중에 벌어도 되는데 벌써부터 그렇게 모아서 대체 어디에 쓰려고 그래?”

“지금 모아야 졸업하자마자 독립하죠.”

“지금 모은 돈으로도 보증금은 될 텐데.”

“난 더~ 더 돈 많이 벌어서 가게 낼 거예요.”

“무슨 가게?”

딱히 구체적인 구상을 해둔 게 아니고 막연히 생각하던 거라 할 말이 없었다.

“글쎄요. 아무 기술도 없으니 체인점이나 낼까.”

뜬구름 잡는 듯한 말인데 진혁은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이런 말 하면 대학 먼저 가고 생각하라고 닦달할 줄 알았던 희나로선 의외였다.

“뭔가 참견하는 말이나 설교 안 해요?”

“설교하기엔 난 장사에 대해 전혀 모르는데……?”

“대학 가라거나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슨 장사냐거나 뭐 그런 말 안 해요?”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데. 네 인생이잖아. 네가 결정할 문제지.”

남의 일처럼 생각하는 건가 싶어 희나는 조금 서운해졌다.

묵묵히 밥을 다시 입으로 가져가는데 진혁이 조용한 목소리로 다정하게 말했다.

“넌 나보다 훨씬 똑똑해. 참견 안 해도 네가 알아서 잘할 거라고 생각해.”

진심이 담긴 말투에 희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조용히 다시 식사를 하다가 진혁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아, 그래도…….”

“?”

“베리베리 파르페 체인점은 안 하는 걸 추천할게.”

항상 텅텅 비어 있는 학교 앞 베리베리 파르페를 떠올리며 둘은 마주 보고 킥킥 웃었다.

밥을 다 먹고 찬합을 집어넣은 뒤에도 둘은 바로 지도실을 떠나지 않았다. 진혁은 휴게실로 가는 대신 희나의 옆에 앉아 과일을 꺼내 늘어놓고 먹으며 수업 자료를 꺼내 들었다.

“점심시간인데 뭘 그리 열심히 봐요?”

“내일이 마지막 수업이니까 좀 신경 써서 해야지.”

마지막이라는 말에 희나는 마음이 조금 먹먹해졌다. 겨우 한 달간이었는데 그가 학교에 있는 동안 많은 것이 변한 것 같다.

이렇게 둘이 있는 것도 하루밖에 안 남았구나. 새삼스레 희나는 사회과 지도실을 둘러보았다.

처음 이곳에서 그를 협박할 때만 해도 이런 기분이 될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진혁이 오지 않게 되면 희나도 이제 이곳에는 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가 바라는 대로 교실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점심을 먹을 거다.

아이들에게 마음이 열렸다기보다 이제 누가 뒤에서 그녀를 비웃고, 배신하고, 얕잡아 보더라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마음을 의지할 곳이 있으니 사람들에게 맞서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이제 학교에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역으로 이제 들킬까 봐 조?뗍떳또舊?않아도 된다는 장점도 있었다. 실습이 끝나면 얼마 안 가서 다들 잊을 것이다.

희나는 기분을 바꿔 느긋하게 책장에 몸을 기댔다.

“수업 어떻게 할 건데요?”

“음, 글쎄. 재미있는 개그라든가 그런 걸 넣을까.”

“선생님이 개그요?”

진혁에게 개그에 소질이 있을 것 같지 않아 희나는 미심쩍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 개그 연습 많이 했어. 학교 선배들이 말해주는 거 프린트해서 외우고…….”

“뭔데요? 아무거나 해봐요.”

“음…….”

생각을 가다듬는 듯하더니 진혁은 뭔가 떠오른 듯 개그를 늘어놓았다.

“전주 비빔밥의 반대말이 뭐게?”

“네? 그게 뭔데요?”

“이번 주 비빔밥!”

희나의 표정이 급격이 썩어 들어갔으나 진혁은 자기가 말하고 혼자 쿡쿡 웃었다. 평소에도 웃음점이 낮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 지경일 줄이야.

그녀의 냉랭한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진혁은 더욱 참담한 개그를 몇 개 더 늘어놓았다.

“부탁이니 다큐멘터리 그만 보고 개그콘서트라도 좀 봐요.”

희나가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진혁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재미없어?”

“진심으로 묻는 거예요?”

“이상하다……. 선배들이 했을 때 난 빵 터졌는데.”

“선생님 말고 다른 사람이 웃는 거 본 적 있어요?”

그제야 깨달음을 얻은 듯 진혁은 충격을 받은 얼굴이 되었다.

희나가 하마터면 마지막 수업에 개그계의 대참사가 벌어질 뻔한 것을 막았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진혁이 개그에 대한 가치 없는 열정을 아직 포기 못 한 듯 중얼거렸다.

“내가 하는 개그 중에 여자애들이 잘 웃어주는 거도 있는데…….”

“……뭔데요?”

“음……. 이런 거.”

진혁은 손을 뻗어서 바나나를 집어 들어 까더니 희나에게 쑥 내밀었다.

“바나나를 먹으면 나한테 반하나?”

“…….”

긴 정적이 흘렀다.

순식간에 손발이 오그라들었지만, 정말 어처구니없는 흉악한 개그임에도 불구하고 살짝 휜 눈웃음과 장난스럽게 벌린 입술이 눈앞에 있으니 얼굴이 확 붉어지는 것 같았다.

희나는 몸을 휙 뒤로 빼면서 빨개진 얼굴을 감추려고 고래고래 화를 냈다.

“아- 누가 아저씨 아니랄까 봐, 아저씨 개그 진짜!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어요!”

“그렇게 재미가 없었나. 여자애들이 좋아하던데…….”

‘개그가 아니라 당신이 좋았던 거겠지.’

혀를 차며 씩씩대는 희나의 매몰찬 반응에 기대에 찼던 진혁은 기가 죽고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개그는 끔찍하게 재미없었으나 풀 죽은 표정이 귀여워서 조금 웃음이 나올 것도 같다.

좌절해서 머리를 감싼 진혁의 널따란 등을 팡팡 두들기며 희나는 위로의 말을 건넸다.

“무리수 두지 말고 하던 대로 해요. 어차피 대충 수업해도 다들 엄청 좋아할 거예요. 아니, 다 우느라 듣지도 않을지도.”

“여태 제대로 수업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마지막은 제대로 하고 싶은데.”

“아마 힘들걸요. 아까도 애들 모여서 이벤트해서 선생님 깜짝 놀래킬 궁리하던걸요.”

그러자 진혁이 조금 감동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보고 희나는 감동의 이벤트가 아니라, 코끼리 팬티를 선물한다거나 가슴 모양 케이크를 만든다거나 하는 성희롱스러운 아이디어들만 가득했다는 사실은 함구하기로 했다.

“좋았겠어요? 인기 많았어서.”

“뭐, 나한테만 그러는 것도 아니고. 원래 남자 교생이 여학교에 가면 다 인기가 많다던데.”

“누가 그래요?”

“교직 이수하는 선배들한테 들었어. 작년에 이 학교로 온 선배도 있는데 인기 많았다고 선물 받은 얘기 많이 했어.”

“엥? 정말요? 작년에 온 교생 선생님들 다 인기 하나도 없었는데.”

작년은 역대급으로 교생 외모 흉년이어서 애들이 모두 무관심했었다. 올해 애들이 유난을 떠는 것도 작년이 안습이었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이 떡볶이 쏜다고 해도 안 따라갔는데. 허세 부린 거 아니에요?”

“너무 많은 걸 알아버리면 선배들이 가엾어지니까 그 얘긴 그만두자.”

그런 잡담을 나누는 사이에 예비 종이 울렸다. 둘은 곧장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문을 나가기 전 진혁이 희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럼 오늘 아르바이트 안 가는 거지?”

“네. 내일 저녁에 가서 그만둔다고 말할 거예요.”

“그럼 잠실역에서 만나서 집에 같이 가자.”

희나는 살짝 볼을 붉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후다닥 사회과 지도실을 먼저 나왔다.

아슬아슬하게 교실에 도착해서 자리에 앉은 희나에게 앞자리의 서연이 말을 걸었다.

“저기…….”

“……?”

“너 점심시간에 누가 찾아왔었어.”

찾아올 사람이라면 지훈 정도뿐인데, 지훈이라면 ‘누가’라고 지칭할 이유가 없다. 희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누구?”

“모르겠어. 너 없냐고 물어보더니 그냥 가던데.”

“여자?”

“아니, 남자였어. 키 크고 훈남이던데.”

그 말을 듣고 짚이는 사람이 있어 희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5교시 수업이 끝나자마자 희나는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연이 가리켜서 돌아본 뒷문 앞에 희원이 비스듬하게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주희원. 희나의 남동생이었다.

짝다리를 짚고 섰는데 못 본 새 또 키가 컸는지 교실 문에 머리가 닿을 듯했다.

둘 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랐는데 어렸을 때부터 또래들보다 키가 큰 편이었다. 희나는 가끔씩 동생을 보며 빨리 자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그렇게 만든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곤 했다.

이미 반 아이들의 시선이 이쪽에 쏠려 있었으므로 별 의미는 없었지만 희나는 이목을 피하기 위해 동생을 끌고 교사 뒤편의 쓰레기장 근처로 갔다.

내내 아무 말 없던 희원이 희나의 발걸음이 멈추자마자 불쑥 말을 꺼냈다.

“돈 좀 빌려줘.”

희나는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동생을 올려다보았다. 뭐 찾아올 용건이라면 이거뿐일 거라 예상했다.

말이 빌리는 거지 돈을 갚을 리가 없다. 하지만 안 빌려줄 수도 없었다. 정말 굶어 죽을 지경이 아니고서야 말도 안 꺼낸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지갑을 꺼내 드는 희나를 내려다보며 희원이 내뱉듯이 툭 물었다.

“너도 요즘 집에 안 들어가냐?”

언제나처럼 반말이다. 집에 먼저 갔다가 희나가 안 들어오니 돈 빌리러 학교까지 온 모양이다. 희나는 냉랭하게 대꾸했다.

“뭔 상관. 얼마.”

“얼마까지 빌려줄 수 있는데.”

“돈 없어. 수작 부리지 말고 금액이나 말해.”

“30만 원.”

돈을 꺼내려던 희나의 손이 멈칫했다. 평소엔 잘해야 10만 원 정도였는데 액수가 유독 높다.

“내가 니 봉인 줄 알아?”

“진짜 필요해서 그래.”

“뭐 하는 데 필요한데. 니 알바한 건 어디다 쓰고.”

따져 묻자 설명하기 귀찮다는 듯이 희원이 교복 셔츠를 휙 걷더니 어깨를 드러냈다. 붕대를 칭칭 감은 상처가 보였다.

“그제 너한테 5만 원만 얻으러 집에 갔다가 처맞았다. 15바늘 꿰맸어. 바지도 벗어서 딴 거도 보여 줘?”

“…….”

“니가 돈 줬다며? 돈 없다는데 계속 술병 들고 행패부려서 뒈지는 줄 알았잖아. 병원비 때문에 빵꾸 났어. 30만 원 없으면 나 있는 데서 쫓겨나.”

“됐으니까 옷 내려.”

희나는 꺼냈던 지갑을 다시 접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돈 없어. 이따 계좌로 보내줄게.”

“현금 있으면 5천 원만 더 꿔줘. 밥 좀 먹게.”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이 꽤 굶은 것처럼 보였다. 희나가 인상을 쓰면서 지갑을 열어 보니 5만 원짜리 2장과 만 원짜리 한 장만이 들어 있었다.

‘하필 5천 원짜리는 없는 거야. 5천 원 빌리는 놈이 거스름돈 있을 리도 없는데.’

돈 벌기 힘들고 얻어맞고 다니는 건 피차 마찬가지라 서로가 서로에게 특별히 연민을 품지 않은 지 오래다. 서로를 가엾게 여기기 시작하면 너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달라는 이상으로 돈을 주긴 싫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뜯어 가는 인간들뿐이라고 희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만 원을 꺼내 내밀었다. 그때였다.

“얜 누구야?”

위협적인 목소리가 들려와서 고개를 돌려 돌아보니 지훈이 서 있었다. 그는 희원을 똑바로 쏘아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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