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Never Free (3)
지하철역에 도착한 진혁은 화장실로 들어가 손을 박박 문질러 닦았다. 추잡한 남자의 몸에 닿았던 부분들이 더럽다.
녀석은 물론 쓰레기다. 하지만 그 대가를 치르게 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현실적으로 그 남자에게서 동생을 떼어놓을 방법이 없다. 억지로 집에 끌고 와 강제로 아이를 지우게 한다는 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폭력이다. 그럴 수 있을 리 없다.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짓이다.
동생이 더 이상 무너지지 않도록 뭔가를 해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다.
진혁은 말할 수 없이 무력하고 비참한 기분이었다. 그 기분은 도피하듯 책망으로 흘러갔다.
동생이 가엾다. 하지만 불쌍한 그녀가 어리석다고 생각해버리고 만다.
부당한 대우를 받고 뛰쳐나간 심정까지는 백번 이해한다. 하지만 결국 그래서 찾아낸 것이 저런 거란 말인가?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자신이 처한 문제가 뭔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다.
진혁은 갑갑해서 뭐라도 마구 걷어차고 싶은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왜?’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잔뜩 떠다닌다. 상황 파악도 못 하고 어리석게 떠들어대던 동생을 붙잡아서 다그치고 싶다.
왜 모르지? 어떻게 저런 쓰레기 같은 사람에게 미래를 맡길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야?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미래가 어떤 것일지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잖아.
존중받고 싶어 하면서 왜 막상 스스로는 자신을 그렇게 함부로 다루지?
왜 자신을 수렁으로 몰아넣는 거야. 어디가 잘못된 건지 정말 모르겠어?
누구를 향한 건지 모를 분노는 어디로도 갈 곳이 없자 스스로를 향한다. 그 망할 자식과 동생을 탓하는 진혁의 감정 깊은 곳에는, 너무나 깊은 후회와 자기혐오가 깔려 있었다.
그녀가 집을 나갈 때 가장 가까이 있었던 건 그 자신이었다. 진혜가 뛰쳐나간 집은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이 아니라 진혁과 단둘이 살던 집이다.
오빠의 잘못이 아니라던 진혜는 틀렸다. 거기로 그 애를 몰아넣은 것은 나다.
내가 그 애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나는 진혜를 잡을 수 있던 기회가 있었다. 무슨 말을 들었더라도 그 애를 가도록 둬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보내면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던 거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동생이 날 싫어한다는 핑계 뒤에 숨어 수동적으로 방관하며 모른 척했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어린 동생을 탓하고 있다니. 모두 동생이 나쁜 걸로 해두고 책망하면 편하겠지. 비겁한 행동이다.
진혁은 합리화하고 있는 자신이 무엇보다도 경멸스러웠다.
일그러진 얼굴을 푹 숙이고 전철에 올라탄 진혁은 참담한 심정이었다. 그 남자를 혐오하는 감정이 깊을수록 더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아무리 부정해도 어쩔 수 없이 계속 자신과 희나의 일이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난 그 녀석과 달라. 그런 짓은 하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그렇게 되뇌어도 마음속 한편에 양심을 찌르는 질문이 계속 남아 있었다.
‘정말 다르다고 말할 수 있어?’
잊으려고 해도 잠깐 보았던 그녀의 희고 부드러워 보이는 가느다란 몸이 눈앞에 생생하다. 한창 혈기 왕성한 시기에 그녀에게 정말 아무런 욕망도 없었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진혁은 몇 번이나 솟아오르는 충동을 참기 위해 고생해야 했다. 그런 충동이 있다는 사실조차 묻어 두고 생각하지 않으려 외면하면서.
나를 믿고 있는 소녀를 스스로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억제하고 있긴 하지만 날이 갈수록 점점 풀어져가고 있던 게 사실이다.
희나는 진혜처럼, 아니 그 애보다 더욱더 오갈 데 없는 절박한 처지다. 그걸 알면서 이런 마음을 품고 있는 주제에……. 내가 그 녀석과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역시 나랑 있는 건 안 좋아.’
진혁은 자신을 설득하듯 속으로 계속 생각했다.
보내야 한다. 늦기 전에 어딘가 절대적으로 안전한 곳으로.
잘 찾아보면 어딘가에 있을 거야. 그리고 거리를 두고 가능한 만나지 않으면서 잊어버리는 거다.
옆에 둬서는 안 돼. 이래서는 곧 선을 넘어버리고 말 거다. 희나가 이런 내 감정을 눈치채게 되는 건 시간문제니까.
희나가 내 마음을 받아들이도록 하면 안 된다. 희나는 성숙한 몸에 담긴 미성숙함, 그리고 세상의 무서움을 아직 모르는 데서 오는 무방비함이 얼마나 신경을 파고들어 오는 매력인지 모른다.
너무 사랑스럽고, 그녀가 눈앞에 없으면 불안하다.
이제 더는 부정할 기력도 없었다. 그는 하루가 다르게 점점 희나에게 사로잡히고 있었다.
그는 희나를 보내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러는 사이 무거운 발걸음에도 어느덧 집에 도착해 있었다.
열쇠를 넣고 문을 돌리자 경쾌한 소리가 나더니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왔어요?”
그를 반기며 웃고 있는 예쁜 얼굴. 처음 만났을 때의 까칠하던 모습은 흔적도 없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굳은 결심이 허무하게 녹아내린다.
진혁의 마음은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가득했다.
‘내가 이 아이를 지켜야 해.’
곁에 두고 싶어. 안 돼. 보낼 수 없어.
가질 수 없어도. 그저 바라만 보더라도.
기다리고 있는 미래가 어떤 것일지라도.
진혁은 이제 견딜 수 없이 그녀가 소중했다. 잘못될 것을 알아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보낼 수가 없다.
어리석은 건 동생만이 아니라 그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진혁은 말없이 팔을 뻗어 눈앞의 소녀를 꼭 끌어안았다.
***
“희나야? 뭘 그렇게 생각해?”
민지의 목소리에 희나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바로 앞에서 통통한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민지는 그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기분 좋아 보인다. 좋은 일 있나 봐?”
“좋은 일은 무슨. 그런 거 없어.”
부정하면서도 희나는 얼굴에서 희색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
사흘 전 밤. 동생을 만나고 돌아온 진혁은 희나를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끌어안고 있더니 훌쩍 나가서 전화를 또 한참 하고 들어왔다.
아주 어두운 표정이었고 아무리 캐어물어도 시원히 대답해주지 않고 뭔가를 감추는 듯 보였다.
처음에는 그가 숨긴 사실이 뭔지 캐내려고 노력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희나는 그것에 대해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진혁이 진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거면 충분했다. 그것이 희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고 그게 확인된 이상 진혁의 가정사를 필요 이상으로 캐물을 필요는 없었다.
기본적으로 희나는 자신의 가정사든 남의 가정사든 공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진혁이 그녀 앞에서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는 것이 보였으니 더더욱.
진혁이 심란해 보이는 게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기껏 찾은 동생이 안 돌아오겠다니 상심했을 거란 정도로 받아들였다.
희나가 더 기분 좋은 이유는 지난 이틀간 진혁이 최대한 옆에 있으려는 기색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집에 도착하면 대부분 진혁은 방에 들어가 책을 읽고 게임을 하거나 다큐멘터리를 보곤 했다.
투정을 부려야 간간이 옆에 있곤 하던 그가, 먼저 몇 번씩 희나가 사용하고 있는 진혜의 방에 와서 말을 걸어주는가 하면, TV를 보는 희나 옆에 앉아서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계속 그녀를 바라보았다.
별달리 특별한 행동이 없어도 그렇게 같이 앉아 있는 게 좋았다. 머리를 토닥여주고 가까이에서 낮게 웃을 때마다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마구잡이로 뛰는 게 곤란하긴 했지만.
희나는 책상에 턱을 괸 채로 진혁과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며 오전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되자 빠르게 교실을 빠져나갔다.
혹시 누가 따라오지 않는지 주의 깊게 살피며 희나는 사회과 지도실로 들어갔다. 아직 진혁은 도착해 있지 않았다. 희나는 늘 앉던 책 더미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진혁을 기다렸다.
5분쯤 흐르고 지도실 문이 열렸다. 잔뜩 기다리고 있었지만 희나는 시침을 떼고 휴대폰에 몰입한 척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봐?”
예상대로 모르는 척하자 진혁이 아주 가까이 다가와서 희나가 보고 있는 걸 쳐다본다.
그가 가까이 올 때마다 나는 부드러운 체향이 좋다. 희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대답했다.
“아르바이트 사이트요. 너무 오래 쉬어서 새로 구해야 될 거 같아요.”
진혁의 만류로 일을 쉰 뒤 4일간 나가지 않았다. 그를 만나고 나서 아르바이트를 상당히 많이 쉬었다. 사장이 그만두란 말을 한 건 아니지만 희나는 학교 근처에서 하고 있는 평일 아르바이트는 그만둘 생각이었다.
“이번에는 천호 말고 사당 쪽으로 구하려구요.”
사실 사당이 아니라 낙성대나 서울대 근처로 구할 거다. 이제 이틀 남은 실습이 끝나면 진혁은 학교로 돌아가게 될 테니 그의 생활 반경 주변에 머물고 싶었다.
희나가 굳이 그걸 진혁에게 말하는 데에는 슬쩍 떠보는 의도도 감춰져 있었다.
그는 진혜가 집에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했을 뿐 그녀에게 계속 머물러도 좋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만약 집에서 내보낼 생각이라면 학교에서 먼 곳에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는 데에 난색을 표할 것이다.
“그래?”
하지만 진혁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희나는 슬금 그의 기색을 살폈으나 니 마음대로 하라는 건지 아니면 계속 집에 있어도 괜찮아서 그러는 건지는 좀 미묘했다. 희나가 입술을 비죽 내미는데 진혁이 찬합을 열다 말고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맞다.”
“……?”
“희나 너, 아르바이트로 사진 모델 안 해볼래?”
“모델?”
희나가 웬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냐는 듯 쳐다보자 진혁이 생기 있는 말투로 말했다.
“내 친구 거북이 생각나? 걔가 사진 동호회도 하거든. 며칠 전에 전화해서 정기 출사에서 인물 사진 찍고 싶다고 너한테 모델 해줄 수 있냐고 물어봐 달라고 하더라고. 까맣게 잊고 있었네.”
“모델은 무슨 모델. 나 그런 거 할 줄 몰라요.”
사진은 찍어본 적도 찍혀본 적도 손에 꼽힐 만큼 적었다. 모델이라는 단어가 왠지 안 맞는 옷처럼 민망해서 희나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가볍게 하면 돼. 어차피 아마추어 모델인 거 감안하고 부탁하는 거라서.”
“……뭘 어떻게 해야 되는 건데요?”
“스튜디오나 어디 적당한 곳으로 출사 나가서 포즈를 취해주면 돼. 생각하는 거보다 그렇게 어렵진 않을 거야.”
왠지 잘 아는 듯한 말투에 희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어떻게 알아요? 선생님도 그 동호회예요?”
“어? 아니. 그냥…… 뭐, 들어서 아는 거지.”
진혁은 왠지 어색하게 얼버무렸다. 수상해하는 눈으로 쳐다보던 희나는 이어진 진혁의 말에 귀가 확 트였다.
“사진은 개인 소장만 할 거고 페이는 하루 세 시간 촬영에 15만 원 정도…….”
“날짜 맞으면 할게요.”
세 시간에 15만 원이란 말에 자동반사적으로 칼답이 나왔다. 진혁이 쿡쿡 웃었다.
“좋아, 잘됐네. 그럼 거북이한테 그렇게 말해둘게.”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보낸 진혁은 책 더미에 앉아 있는 그녀를 쳐다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내 생각에는 이참에 한번 해보고 그쪽으로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것도 괜찮을 거 같아.”
“그쪽이라니요?”
“출사 모델이랑 겸해서 인터넷 쇼핑몰 피팅 모델 같은 거 하는 게 지금 일보다 고생도 덜하고 페이도 좋을 테니까. 찍은 사진 받아서 한번 생각해봐.”
뜻밖의 이야기에 희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일은 아예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내가 무슨 모델을 해요. 키도 170도 안 되는데…….”
“얼굴이 예쁘잖아. 너 정도면 충분히 하지.”
사심 없는 표정으로 진지하게 예쁘다고 하는 바람에 희나는 먹던 밥이 사레 들려서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자기 때문에 그러는 줄도 모르고 진혁은 둔탱이같이 “괜찮아?”라고 묻는다. 희나는 진혁을 빨개진 얼굴로 쏘아보고는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모델 하면 주말에만 일해도 지금 버는 거랑 비슷하게 벌 거야. 매일 하는 아르바이트는 시간 너무 많이 빼앗기잖아. 대학 가려면 이제 곧 수험 공부도 해야 하는데.”
처음에 희나가 공부하고 싶다고 말한 걸 아직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 성적에 대학은 무슨 대학이에요.”
“내가 공부 봐줄게.”
공부 같은 거 관심 없다고 하려던 희나의 입술이 멈췄다. 공짜로 서울대생 과외를 받는 기회는 둘째 치고 교생을 관두고 나서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얘기한다는 게 너무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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