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Never Free (2)
일하러 간다는 말에 진혁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노래방 도우미는 담배 연기가 자욱한 환경에서 술까지 마셔야 하는 일이다.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에게 저런 일을 시키는 남자가 좋은 사람이라고?’
납득 안 가는 일투성이다. 할 말이 태산같이 많은데 진혜는 이미 일어설 기세였다.
그녀가 가기 전에 어쨌든 그중 가장 중요한 매듭은 풀어야 했다. 진혁은 일어서는 진혜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 진혜야.”
“왜? 나 늦겠어.”
“가기 전에 어디 사는지만 가르쳐줘. 어머니가 걱정 많이 하고 계셔.”
“엄마가 날?”
코웃음이라도 칠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그녀는 곧 생각을 바꾼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아. 주소 보낼 테니 먹을 거라도 보내라고 해. 요즘 입덧하는데 집 과일 생각이 나더라고.”
진혁이 주소를 전송하고 카페를 나서는 진혜를 따라 나가자 그녀가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뭐야? 오빠 아직 할 말 남았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가는 데까지 데려다줄게.”
“우와- 뭐야. 하하하. 진짜 오빠답네. 됐어-! 가게 앞까지 남자랑 같이 갔다가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진혜는 큰 소리로 웃고는 휙 돌아서 걸어가 버렸다.
하이힐에 속옷이 보일 듯한 짧은 치마, 화려한 염색 머리.
돌아선 동생의 뒷모습은 너무나도 낯설어 보였다.
진혁은 한동안 멍하니 선 채 진혜를 바라보았다. 동생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천천히 뜨거워졌던 머리가 식자 조금 차분해졌다.
동생을 찾았지만 해결된 문제는 아무것도 없고 더욱 우울한 현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이 사실을 그대로 부모님께 전할 수는 없었다.
고심하다가 진혁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았다. 그는 진혜와 동거 중인 남자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생각하려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결정하자마자 진혁은 진혜가 전송한 집 주소로 찾아가서 무작정 벨을 눌렀다.
처음에는 대답이 없었지만 두세 번 연거푸 누르자 반응이 있었다.
“누구세요?”
다소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인터폰으로 흘러나왔다. 진혁은 카메라에 대고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며 말했다.
“실례합니다. 저 유진혁이라고 합니다. 진혜…… 오빠 되는 사람입니다.”
안쪽에서 침묵이 흘렀다. 진혁은 간곡하게 상대를 설득했다.
“정말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잠시면 됩니다. 시간 좀 내 주세요.”
“…….”
계속 이어진 긴 침묵에도 인터폰이 끊어지는 기색은 없었다. 한참 동안 차분히 기다리자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오신 거죠?”
“진혜에게…… 임신 얘기를 들었습니다.”
“뭔가 따지려고 하는 거라면…….”
“그런 거 아닙니다. 그냥 얘기 좀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스피커에서 한숨 소리가 들리더니 곧 문 쪽으로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이 있었다.
문이 열리고 안쪽에서 나타난 남자를 보고 진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진혁보다 훨씬 키가 작고 나이가 많은 남자였다. 최소 30대 후반에서 마흔 정도는 됐을 것이다. 군데군데 살짝 새치가 보이는 여섯 살이나 어린 여동생의 예비 남편을 보고 진혁은 말문이 막혔다.
딱딱하게 굳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진혁을 보며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경찰에 갈 겁니까?”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자의 가족에게, 문을 열자마자 던진 첫 질문이 이런 거라니.
진혁은 참담한 기분으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남자가 이웃들의 시선을 신경 쓰는 듯 주변을 살피고는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집 안은 17~8평 정도로 보이는 조금 낡고 아주 평범한 빌라였다. 두 사람이 살기에 적당히 넓고 딱히 지저분하거나 하진 않았다.
두리번거리는 진혁에게 소파를 권한 뒤 남자는 딱딱한 태도로 용건을 물었다.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건데요?”
“그냥…… 어떤 분인지 궁금해서 왔습니다. 어, 뭐랄까…… 인사도 드려야 할 거 같고…….”
어리고 철없는 양아치가 나오면 뭐라고 말할지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으나 너무 뜻밖의 인물과 맞닥뜨린 관계로 말이 정리되지 않고 횡설수설했다.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남자에게 진혁은 정중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갑작스럽게 와서 말이 정리가 잘 안 되네요.”
사과하자 해코지할 의사가 아니란 걸 알았는지 경계하던 남자의 태도가 다소 누그러졌다.
진혁은 남자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외모도 말투도 행색도 아저씨스러운 것이 어딜 봐도 진혜 또래의 아이들이 좋아할 스타일은 아니었다.
둘은 어디서 만났을까. 그럴 듯한 계기는 일하는 노래방의 손님일 거라는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갈 곳 없는 유흥업소 종업원이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는 단골손님과 동거한다는 건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진혜가 미성년자인 걸 몰랐을지도 모른다.
잠시 텀을 두고 생각하던 진혁이 남자의 어딘지 쥐를 연상시키는 얼굴을 보며 진중히 물었다.
“진혜와 결혼하실 겁니까?”
남자는 소리를 내서 웃더니 뭘 모른다는 듯 말했다.
“이런 상황에 뭐 번듯한 결혼식 같은 걸 기대하는 건 아니죠?”
“물론 뭐 대단한 걸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어쨌든 일이 이렇게 됐으니까…….”
차분히 말하는 진혁에게 남자는 계속 비웃는 듯한 태도였다. 그 모습을 보고 진혁도 멍청이처럼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다.
“결혼식 안 하실 겁니까?”
“이봐요, 나도 사회적 입장이 있는데 열아홉 살짜리 애랑 어떻게 결혼식을 합니까? 생각을 좀 해봐요. 어쨌든 애는 키운다니까?”
진혜가 어리다는 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뻔뻔스러운 말에 진혁의 말투가 좀 더 딱딱해졌다.
“진혜도 그러기로 동의한 건가요?”
“하-. 대체 무슨 소릴 듣고 싶은 건지.”
“…….”
“동의는 무슨 동의요. 내가 안 한다는데 당연히 안 하는 거지.”
볼품없는 남자의 당당한 말에 진혁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진혜는 나이도 어리고 희나 정도의 미소녀는 아닐지라도 외모가 나쁜 것은 절대 아니다. 저런 사람에게 이런 취급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눌러 참으려고 진혁은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꼭 쥐었다.
“진혜 어디서 만난 겁니까?”
“걔가 왔어요, 재워달라고.”
그 말을 듣자 순간 떠오르는 것이 있어 진혁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인터넷으로 가출한 소녀들을 재워 주겠다고 유혹하고 그 대가로 몸을 취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한창 진혜를 찾아다닐 때 그런 것을 중계하는 카페에 접속해 본 일도 있었다.
그러나 도덕적이고 정도를 걸어온 그의 주변에서는 실제로 이 정도로 야비한 인생을 사는 남자는 없었다.
이 집에 얼마나 많은 갈 곳 없는 소녀들이 머물렀고, 또 그 처지를 이용해서 얼마만큼 더러운 행위가 벌어졌을지 생각하니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남자의 입에서 이어진 말을 듣고 진혁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여태까지 아무도 임신한 적이 없는데. 일이 이렇게 돼서 성질나는 건 나도 만만치 않아요. 나도 시끄러워지는 건 싫으니 애는 책임질 테니까 이렇게 찾아오거나 하지 마요. 동네 창피하게시리.”
“뭐라구요?”
혹시라도 진혜와 태어날 아이에게 애정이 있을 거란 한 가닥 실낱같던 기대가 부서졌다.
친밀한 남매 관계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만 여동생이 받는 참혹한 취급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솟았다. 계속 인내하던 진혁의 입에서 욕지기가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그런 더러운 짓을 하다니……. 나쁜 자식!”
“뭐가 어째? 애를 간수를 잘했어야지. 집 나가 아무 남자네 집에 덥석덥석 들어가서 다리 벌리게 키워 놓은 집안에서 어디다 대고 잘난 척이야?”
더 이상 모욕을 참을 수 없어 진혁은 폭언을 내뱉는 남자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큰 진혁의 단단한 체격을 보더니 태도를 바꿨다.
“이봐요, 이거…… 놓고 얘기하죠. 놓고. 험악하게 하지 맙시다, 서로.”
벌벌 떠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진혁은 이를 악물며 팽개치듯 그를 놓았다. 폭력을 내세워서 해결될 일도 아니고, 그런 행동은 너무나도 체질에 안 맞았다.
오만하던 기색은 자취를 감췄지만 그는 잽싸게 휴대폰을 움켜쥐더니 으르렁거렸다.
“할 말 끝났으면 돌아가요. 안 그러면 경찰을 부를 테니까.”
“당신이 경찰을 부른다고?”
“왜? 못 부를 것 같아요?”
“경찰에 가야 되는 쪽이 누구인데?”
“만약에 당신이 경찰한테 가면 아비 없는 애만 생기는 거지. 걔는 애 절대 안 지워요. 나 끌려가면 당신 동생이 어떻게 될지 한번 생각해봐.”
“동생은 집으로 데리고 가겠어. 당신 같은 인간하고 살게 놔둘 것 같아?”
“하-. 진짜 뭘 모르는 형씨구만. 그렇게 순순히 붙잡혀 갈 년이면 애초에 지 발로 나오지도 않지. 강제로 끌고 가도 이제 반년만 있으면 성인이라는 거나 알아 두시죠? 걔는 어차피 다시 날 찾아올 거요.”
너무 화가 나서 진혁은 머리가 새하얘졌다. 하지만 속이 뒤집힐 것 같은 분노에도 그의 말이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걸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아까 본 진혜의 맹목적인 태도를 볼 때, 그녀는 무슨 말로도 설득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창백해진 채 부들부들 떠는 진혁을 보며 다시 기가 산 남자가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할 말 끝났으면 돌아가시죠. 난 교대 근무 나가야 되니까.”
“…….”
“왜, 치게? 치려면 쳐보시죠. 당신이 나한테 하는 만큼 그대로 여동생한테 되갚아줄 줄 알아요.”
살아가면서 진혁은 누군가에게 이렇게 혐오감을 품은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를 노려보고 있어도 해결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진혁은 돌아가서 부모님과 해결책을 강구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진혜를 이 인간에게서 구해내야만 했다.
저 추잡한 남자의 근처에 한시라도 더 머물고 싶지 않아 진혁은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나오기 전 남자를 돌아보고 위압적으로 말했다.
“당신, 내 동생한테 함부로 하면 가만 안 둘 거야. 털끝 하나라도 다치거나 내 연락 안 받으면 당장 찾아올 테니 그렇게 알아.”
움츠러든 모습으로 남자는 말이 없었다.
그의 어깨를 강하게 밀어내고 진혁은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진혁이 밖으로 나가자 문을 닫기 직전 알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웃기는 소리. 쓸데없는 참견 말고 그렇게 걱정되면 양육비라도 보내 주든가.”
말을 마치자마자 잽싸게 문이 쾅 닫혔다. 진혁은 이를 악문 채 돌아서서 빠른 걸음으로 그 기분 나쁜 장소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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