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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39화 (39/140)

39화. Never Free (1)

진혁은 전철 문 옆에 기대 흔들거리며 멍한 시선으로 어두운 바깥을 바라보았다.

무척 피로했다. 하루 종일 바깥에 서서 체력을 많이 소모한 탓도 있겠지만 여러 가지 고민을 하느라 정신적으로 더 지쳐 있었다.

그는 아까 본 희나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피로 물든 체육복을 입고 일하러 가겠다고 말하던 모습.

불행을 온통 달고 다니는 어린 소녀가 마음 아리도록 안타까운데도 뭐 하나 제대로 해줄 수가 없다. 품에 파고들어 도움을 청해 오는 가녀린 몸을 꼭 안고 안심시켜 주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두 사람에겐 허락되지 않은 일이니까.

‘최소한 사회인이기라도 하다면 금전적으로나마 힘이 되어줄 수 있을 텐데.’

희나에 대해 알면 알수록 이도저도 아닌 주제에 어른인 척 설교를 늘어놓고 참견했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할 수 있다면 그 짐을 덜어주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하지만…….

진혁은 시선을 떨구어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터무니없이 무력하게만 보였다.

[이번 역은 마천 마천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진혁은 안내 방송을 듣고 정신이 든 듯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는 동생을 만나러 가야 했다.

동생과 약속한 카페로 들어서며 긴장한 시선으로 내부를 살폈지만 진혜는 도착해 있지 않았다. 아직 약속 시간까지 20분 정도 남아 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한구석 소파에 자리를 잡고 긴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제법 더워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홍차를 주문했다.

차분하려고 애쓰며 초조하게 몇 번이고 시계를 보았다. 느릿느릿 시간이 흐르고 약속한 일곱 시가 되어도 진혜처럼 보이는 사람은 들어서지 않았다.

‘오지 않는 걸까.’

불안하고 실망스러운 한편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반드시 찾아야 한다는 책임감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을 미워하는 동생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이중적인 감정에 휩싸인 채 진혁은 가만히 앉아서 동생을 기다렸다.

그리고 약속 시간이 20분쯤 지났을 무렵, 가게에 낯익은 한 여자가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그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1년은 그다지 긴 시간은 아니지만 그 사이 동생은 소녀가 아닌 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

어색해 보이던 화장이 자연스럽고 성숙해 보였다. 앳된 구석이 남아 있긴 했으나 어딘지 세파에 물든 듯한 분위기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 누가 그녀를 보더라도 10대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변해버렸는데도 어제 만난 것처럼 익숙했다. 금방이라도 저 낯설어 보이는 여인의 얼굴이 인상을 찌푸리고 반항적인 시선을 보내 올 것만 같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그에게 완전히 생소한 것이었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오빠?”

멀리서부터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며 진혜는 웃고 있었다.

만나자마자 욕설을 퍼부었어도 이보다 더 놀랍진 않았을 것이다. 진혁은 당황해서 굳어버렸다. 철이 든 이후부터 동생에게서 오빠란 말을 들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진혁이 얼떨떨해 서 있는데 그녀는 옆으로 다가오더니 쿡쿡 웃으며 말했다.

“왜 서 있어? 앉자-.”

“어, 그래…….”

머리 하나 넘게 작은 어린 여동생의 친근한 태도에 뻣뻣하게 서 있던 진혁은 자리에 앉았다. 진혜는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갔다.

“오빤 그동안 변한 게 정말 하나도 없네. 나이도 안 먹어.”

팔을 툭툭 치며 하는 말은 놀리거나 비꼬는 투가 아니었다. 그녀의 반가워하는 모습이, 거짓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자 그는 더 당황스러웠다. 밖에 있는 사이 더 거칠어지고, 각박해지고, 원망하는 마음을 키워 놓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간 모양이다.

그녀는 아주 능숙한 태도로 점원에게 커피를 주문하고 장난스럽게 타박했다.

“뭐야, 찾아다녔다고 들었는데, 왜 막상 찾고 나니까 말이 없어?”

“아니…… 그냥 좀, 놀라서.”

“왜 놀라? 내가 오빠한테 잘해서?”

진혜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진혁이 부정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자 그녀는 자신의 오빠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나 이제 오빠 안 미워해.”

“…….”

“집 나와서 고생하다 보니 오빠 미워한 게 얼마나 쓸데없고 애 같은 짓이었나 좀 깨달았다고 할까. 하여튼…… 이런저런 사람들한테 부딪치면서 오빠가 얼마나 어이없을 정도로 착해 빠졌는지 알았어.”

진혁은 묵묵하게 앉아 재잘재잘 계속 말을 늘어놓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 나와 있는 동안 솔직히 집에 돌아가고 싶단 생각도, 엄마 아빠 보고 싶단 생각도 한 번도 안 했어.”

“그랬어?”

“어. 그런데 마지막으로 오빠 봤을 때…… 내가 죽어버리라고 하고 가 버리니까 하얗게 굳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계속 서 있었던 게 자꾸 기억에 남았어. 딱히 미안하다고 생각한 거도 아닌데 계속 생각이 나더라고.”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 진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진혜는 시선을 떨구고 금방 나온 커피 잔을 빨대로 휘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항상 그렇게 화내고 악다구니 쓰고 욕했는데 오빠는 한 번도 싫은 소리 한 적도 없고 화낸 적도 없잖아. 그래서 누가 힘들게 할 때마다, 싫은 소리 들을 때마다 엄마 아빠보다 오빠가 더 많이 생각났어.”

진심이 담긴 듯한 말들이 모두 너무나 뜻밖이라 진혁은 혼란스러웠다. 아까까지 만나기 껄끄럽다고 생각했던 동생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내가 오빠에게 화나 있던 것들 전부 오빠 잘못도 아니었어. 미안해. 내가 그러면 안 됐는데. 오빤 내 생명의 은인이잖아.”

고개를 살짝 숙인 진혁에게 진혜는 생긋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생명의 은인이란 단어에 진혁은 오래된 흉터가 조금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사과하지 마. 내가 별로 좋은 오빠는 아니었지.”

“헤헤- 진짜 오빠 하나도 안 변했다. 말하는 것도 완전 여전해-.”

그녀의 미소를 보다 보니 불편함과 긴장감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 그는 한결 침착해진 태도로 물었다.

“건강하지? 어디 아픈 덴 없는 거야?”

“당연히 건강하지. 아플 일이 뭐가 있어.”

확실히 아파 보이지는 않았다. 혈색도 좋고, 함께 살 때보다 조금 살집이 오른 것 같기도 했다.

어색해하던 진혁의 말문이 트인 듯하자 진혜가 확고한 태도로 말했다.

“근데 오빠가 무슨 얘기든 하기 전에 내가 확실히 말해둘 게 있어.”

“뭔데?”

“나 집에 안 돌아갈 거야.”

못 박는 듯한 말에는 일말의 재고 여지도 없어 보였다. 조금 풀린 듯했던 진혁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난 지금처럼 사는 게 좋아. 잘 살고 있으니까 이제 와서 굳이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

진혁은 진혜가 하고 있는 일을 떠올리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노래방 도우미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는 그다지 좋은 이미지는 아니었다. 게다가 분명히 10대 소녀가 그런 일을 하는 건 불법이다.

진혁으로서는 도저히 잘 살고 있다는 말에 수긍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진혁은 어렵게 찾은 동생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 우선 말을 아끼기로 했다. 지금은 강한 반발을 일으키는 설교보다는 급한 문제부터 하나씩 하나씩 차근차근 마음을 돌릴 수 있게 유도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럼 학교는 어떻게 할 거야? 그만둘 생각이니?”

우습다는 듯 ‘하-!’ 소리를 낸 진혜는 한쪽 입을 올리고 말했다.

“무슨 학교야.”

“하지만 미용 학교 가고 싶다고 했잖아. 이제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괜찮아. 어머니도 그렇게 해주시겠다고 하셨어. 그러니까 우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제 와서 웃기지 말라 그래.”

진혜가 말을 끊으며 탁 내뱉었다. 순간적으로 예전의 말투로 돌아왔다.

진혁은 또다시 화내고 가버릴까 봐 불안했다. 하지만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 감정을 조절하는 듯하더니 잔뜩 구겨진 인상을 풀고 곧 방금 전까지의 태도로 돌아왔다.

“학교는 됐어. 나 이제 맘 잡고 살고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하지만…… 아직 겨우 열아홉 살이니까 늦은 건 아니잖아. 장래를 생각하면 다른 건 마음대로 하더라도 고등학교는 졸업하는 게 좋지 않겠어? 2학년 1학기까지 반 정도는 다녔으니까 바로 다음 학기부터 복학할 수 있을…….”

“학교 안 간다니까.”

그녀는 진혁의 말을 자르고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가고 싶어도 가지도 못해.”

절차를 밟으면 가지 못할 이유가 있을 리 없다. 진혁이 다시 설득하려 하는데 진혜가 빠르게 내뱉듯 말했다.

“나 임신했어.”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입이 살짝 벌어진 채 진혁은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동생의 입에서 나온 말이 이해가 안 된다.

‘뭘 했다고? 임신?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지금 무슨…….”

“4개월째야.”

진혜는 머뭇거리지도 않고 마치 날씨 얘기라도 하는 것처럼 태연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동거하는 사람이 아빠야. 낳아서 같이 기르기로 했어.”

“대체…… 어떤…… 어떻게 아직 어린 네가…….”

“어리긴 개뿔. 스무 살 안 됐으면 그거도 못 하나. 무슨 순진한 소리를 하는 거야.”

거친 말투에 진혁은 말문을 잃었다. 원래 불량하긴 했지만 적어도 진혁 앞에서 이런 저질스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던 아이는 아니었다.

충격을 받은 듯한 그의 얼굴을 보며 진혜가 툴툴거렸다.

“오빠 세상 물정 모르는 거처럼 왜 그래? 나 남자랑 동거한다는 말 들었을 거 아냐. 같이 살면 뻔한 거잖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임신은…….”

“걱정 마. 그래도 그간 만난 남자들 중에서 제일 잘해줘. 이상한 사람도 아니야. LG 다니는 사람이라니까. 애 낳으면 책임져준다고 했어.”

태연자약하게 말하는 그녀를 보니 누가 이상한 건지 혼란스러워질 지경이었다. 임신한 10대 여동생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

진혜는 그의 이해의 영역을 빗겨 가 있었다. 불안함도, 죄책감도, 후회도 없이 확신에 찬 그녀를 보며 진혁은 기가 막혔다.

“그런 얼굴 하지 마. 제대로 키워볼 거야. 엄마처럼은 절대로 안 해. 난 좋은 엄마가 될 거야.”

똑 부러지게 말하는 모습이 다행인 건지, 불행인 건지, 축하해야 하는지, 호통을 쳐야 하는지조차 감이 오지 않는다.

“그럼…… 정말 집에 오지 않겠다는 거야?”

“안 가. 그 사람이랑 살 거야. 임신했는데 애 아빠랑 떨어져서 집에 돌아가는 게 말이 돼?”

“하지만…….”

“그래도 이제 연락은 하고 살게. 우리 애기한테도 친척은 있어야 되니까. 그리고 오빠는 어쨌든…… 나랑 다르게 번듯하긴 하잖아.”

아무래도 진혁에 대한 그녀의 급격한 심경의 변화는 임신의 영향인 것 같았다.

생각이 없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른스러운 소리를 하는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진혁은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대체…… 어쩌려고 그러는 거야……. 부모님께는 뭐라고 말씀드리려고 그래.”

“엄마한텐 오빠가 알아서 말해. 어차피 오빠밖에 모르는 사람이잖아. 내가 뭘 어쩌건 신경이나 쓰겠어?”

“그렇게 말하지 마. 어머니도 정말 후회하고 계셔.”

“엄마 얘긴 듣기 싫어. 그냥 가서 사실대로 전하고, 만약에 내 자식한테도 나한테 한 거처럼 대할 거면 평생 보지 말자고 말해줘.”

잘라 말하고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더니 시간을 체크했다.

“다른 건 나중에 얘기해. 나 이제 일하러 가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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