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Be careful (2)
그것은 네 명의 여자 교생들이었는데 모두 맞춘 듯한 치어리더 복을 입고 있었다. 아주 짧은 미니스커트에 각기 색깔이 다른 깜찍한 디자인은 걸그룹의 무대 의상을 연상시켰다.
당연히 남학생 반에서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났다. 그중 쭉 뻗은 다리를 드러내고 핑크색 옷을 입은 재연은 희나가 보기에도 단연 돋보였다.
“와, 재연 샘 최고 예뻐요-!”
환호를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보며 희나는 저 치어복 아이디어는 재연이 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곧 3반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진혁에게 다가가 웃으며 말을 걸더니 희나 쪽으로 함께 걸어오기 시작했다.
‘진짜 눈에 띄는 거 좋아하는 여자네.’
괜히 기분이 상해서 희나는 속으로 툴툴댔다. 주변 여자애들 시선도 곱지 않아서 작은 소리로 질투 섞인 불만을 늘어놓고 있었다.
“영어 샘은 맨날 진혁 샘 옆에 붙어 다니는 거 같지 않아? 이런 거 할 때마다 같이 있네.”
“솔직히 너무 대놓고 따라다니지. 지현이도 저 정돈 아닌데.”
“둘이 사귀나?”
뒤에서 소곤거리는 얘기들에 희나 옆에 있던 민지도 끼어들었다.
“아닐걸. 진혁 샘은 별로 안 좋아하는 거 같던데.”
“모르는 거지. 둘이 자주 같이 다니고 커플 콘테스트도 같이 나갔던데. 여우 같긴 해도 이쁘긴 이쁘잖아.”
“맞아. 여친 있다던데 재연 샘일지도 몰라. 재연 샘한테 유달리 잘해주는 거 같아.”
자신의 말이 반박에 부딪치자 민지가 살짝 부루퉁한 표정을 짓더니 조금 큰 소리로 말했다.
“유난히 잘해주긴 무슨? 차라리 희나한테 훨씬 잘해주겠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희나에게 쏠렸다.
“희나? 거기서 희나가 왜 나와?”
“커플 콘테스트에서 받은 상품 선생님이 희나한테 줬잖아. 그리고 진혁 샘은 희나한테만 편하게 말해.”
“어,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리고 재연 샘보다 희나가 훨씬 예쁘잖아.”
“난 둘이 얘기하는 거 한 번도 못 봤는데. 진짜야, 희나야?”
희나가 곧장 대답을 찾지 못하고 어물대는 사이 재연과 진혁이 지척에 도달해서 모두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여전히 할 말이 있는 듯한 시선들이 따끔따끔하게 꽂히고 있었다.
그 시선에 희나가 난감해하고 있는데 진혁이 그녀를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학교에 오겠다고 한 메시지를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희나는 그가 말을 걸면 상황이 더 악화될 것 같아서 일부러 딴청을 부리며 무시했다. 그러자 그가 굳어진 표정으로 희나 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이 바보 둔탱이가……. 사람들이 다 쳐다보잖아-!’
희나가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그가 바로 앞에 오기 직전, 구원처럼 커다란 방송 소리가 들려왔다.
[400m 장애물 경주 예선이 종료되었습니다. 이어서 2학년 3반과 3학년 1반의 줄다리기 결승이 있을 예정이오니 참가 학생들은 운동장 중앙으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안내 방송 드립니다…….]
주변 아이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을 기회로 희나도 잽싸게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진혁을 스치고 나와서 운동장 가운데로 나섰다.
가운데 도착해서 슬쩍 그쪽을 바라보니 진혁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서 재연이 이쪽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줄다리기 결승에서 3반은 3학년 팀에게 패배했다.
바로 이어진 점심시간, 희나는 진혁을 피하기 위해 민지 무리를 따라가 점심을 먹었다.
“희나야, 다음 너네 피구 결승이지? 응원하러 갈게!”
커다란 소리로 외치며 양팔을 흔드는 지훈을 외면하고 희나는 피구 시합에 참가하기 위해 운동장으로 돌아왔다.
피구를 시작할 때가 되니 긴장이 되었다. 줄다리기는 대충 줄에 손을 얹고 시늉만 해도 됐지만 피구는 그럴 수가 없다. 희나는 최대한 안 다친 곳에 빨리 맞고 탈락할 생각으로 게임에 임했다.
하지만 막상 경기가 시작되니 욱신거리는 몸을 공에 갖다 대는 것이 두려워서 움츠러들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피하는 사이 또다시 지현이 어마어마한 플레이를 했다.
얼마가 지나자 3반에는 희나를 포함해서 네 명이나 남은 반면 상대 팀에는 이제 두 명밖에 남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니까 어쩌면 공에 맞지 않고 끝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희나는 잘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로 열심히 뛰었다.
결국 상대 팀에는 최후의 1인만이 남게 되었다. 이제 3반의 총공세로 돌아서 공은 이쪽 필드로는 거의 넘어오질 않았다. 희나도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한쪽에서 지훈과 7반 남자애들이 열광적인 응원을 보내고 있었고 그 앞에 핑크색 치어리더 복을 입은 재연이 보였다. 그 바로 옆에서 진혁이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는 공이 날아다니고 있는 상대 진영 대신 희나를 계속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그 탓에 눈이 마주쳤다. 순간 진혁이 당황한 표정으로 앞을 가리켰다. 그리고 동시에 지훈의 커다란 고함이 들렸다.
“희나야, 앞에 봐!”
퍽!
고개를 돌리자 엄청난 타격 음과 함께 배구공이 희나의 얼굴을 강타했다. 충격에 뒷걸음질 치다가 뒤에 서 있던 지현의 팔꿈치에 등이 세게 부딪쳤다.
엄청난 통증에 희나는 헉 소리가 나게 숨을 들이쉬었다. 공에 맞은 얼굴보다 등이 훨씬 아팠다. 그러나 아픔보다 더 문제는 어마어마한 창피함이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공에 얼굴을 맞다니.’
부끄럽고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쥔 채 희나는 털썩 주저앉았다. 얼굴을 감싼 손에서 끈적끈적한 액체가 느껴졌다. 희나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이건 보나마나 명백히 코피였다.
너무너무 창피해서 이곳에서 사라질 수만 있다면 하루 종일 공에 얻어맞아도 좋을 것 같았다.
“희나야, 괜찮아?”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희나는 달려온 지훈의 걱정스러운 말투가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정말 달갑지 않은 건 따로 있었다.
“어머, 이를 어째. 희나야, 여기 좀 봐봐. 괜찮니?”
어느새 왔는지 커다란 재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앞에 그녀의 먼지 하나 묻지 않은 긴 다리가 보이고 좋은 향기가 풍겨 온다. 온몸이 욱신거리는 데다 흙투성이에 코피를 흘리는 자신의 처지와 너무 대조되어 보일 것 같았다.
희나가 절대 그녀를 보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고집스레 고개를 수그리는데 등을 감싸는 커다란 손이 느껴졌다. 등의 상처가 쓰라려서 움찔하며 그쪽을 돌아본 희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괜찮아?”
지훈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보인 건 진혁의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너무 가까워서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그녀의 안색을 살피다가 얼굴을 감싸 쥔 손 사이의 핏방울을 발견하고는 살짝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보건실에 가자.”
“제가 희나 데려다주고 올게요-.”
앞에 서 있던 지훈이 잽싸게 말했으나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갈 테니 지훈 학생은 계속 경기하세요.”
“저 아직 시합 나가려면 멀었어요. 제가 갔다 올게요.”
진혁이 딱 잘랐지만 지훈은 물러서지 않았다. 묘한 기류가 흘러서 희나는 고개를 숙인 상태로 긴장했다.
이 상황에서 굳이 우기는 건 전혀 진혁답지 않았다. 항상 지훈이 나타나면 순순히 물러났던 그가 아닌가. 아까 아이들이 하던 얘기도 있고, 이렇게 이목이 쏠린 상황에서 진혁이 나서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데 왜 그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희나가 지훈과 가겠다고 말하려고 하는데 옆에서 다시 재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 선생님, 마침 잘됐잖아요. 지훈이하고 같이 가라고 하죠 뭐-.”
“아뇨, 제가 가겠습니다.”
진혁이 딱 잘라 말하자 재연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멍해져 있는 희나를 갑자기 그가 안아 들었다.
“뭐예요-! 걸, 걸을 수 있어요!”
“얌전히 있어.”
진혁이 희나에게만 들릴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날카롭게 말했다.
반항하려던 희나는 드물게 단호한 태도에 왠지 이유가 있을 거 같아 입을 딱 다물었다.
진혁이 몸을 돌리자 지훈과 희나의 눈이 마주쳤다. 항상 웃고 있는 표정이 굳어진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희나는 애써 그의 눈을 외면했다.
둘은 놀란 표정으로 자신들을 쳐다보는 따가운 시선 사이를 뚫고 걷기 시작했다. 그 가시밭길을 지나가는 동안 희나는 팔에 감싸인 등이 축축하다는 걸 깨달았다.
별로 뛰지 않았으므로 등이 젖을 정도로 땀이 나진 않았다. 팔꿈치에 부딪치면서 피가 배어 나온 것이다. 양호실까지 터덜터덜 걸어갔으면 뒤에 있던 아이들 모두에게 보였을 거다. 희나는 그제야 진혁이 그런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너무 이목을 끌어버린 것이 걱정스러웠지만 안겨서 가는 사이 그런 건 점차 희미해져갔다.
사람들이 점점 멀어질수록 희나는 진혁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이 더 강하게 의식되기 시작했다. 넓은 가슴과 단단한 팔과 바로 눈앞의 흰 목선을 보니 왠지 기분이 이상해진다.
“많이 아파? 피가 많이 나니까 고개를 젖히는 게 좋을 텐데.”
“…….”
걱정하는 말에 희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코피를 흘리는 얼굴 같은 걸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쉬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체육대회인 줄 몰랐단 말이에요.”
희나의 대답에 진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마터면 다친 거 다 들킬 뻔했잖아. 보이기 싫은 거 아니었어?”
“맞아요.”
“거기에 또 다치기나 하고……. 너 다치는 거 이제 그만 보고 싶어. 보고 있기 힘들어.”
다정함에 얼굴에 피가 몰려 코피가 더 많이 나는 것 같았다. 희나는 코를 더 세게 쥐며 후회에 휩싸였다.
선생님 말대로 오지 말았어야 했어. 다친 것보다 선생님을 속상하게 만든 게 더 아프다.
거기다 아까 이상하게 쳐다보던 그 수많은 눈빛들…….
희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이 안고 온 거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특히 지훈이가…….”
“어쩔 수 없지. 괜찮을 거야. 어차피 며칠 안 남았으니까.”
진혁의 말에 그러길 바라며 희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텅 빈 교사로 접어들자마자 희나는 진혁에게 내려 달라고 말했다.
“그냥 교실로 올라가서 옷 갈아입고 조퇴할게요. 선생님이 대신 말 좀 전해줘요.”
“알았어. 집으로 갈 거지?”
“아뇨. 아르바이트 가야죠.”
진혁의 표정이 마구 찌푸려졌다.
“그 몸으로 무슨 아르바이트를 해. 집에 들어가서 쉬어.”
“이러니까 더 일해야 되는 거예요.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으니까요.”
혼자 집에 돌아갔을 때 느꼈던 막막한 감정들이 떠올라서 희나는 빠르게 반박했다.
진혁이 바로 엄하게 어른 같은 말투로 타이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묵묵했다. 반응이 없는 것이 의아해진 희나가 돌아보니 진혁은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책임감 강한 그 성격을 볼 때 자신이 이 부분에서 도움을 줄 수 없기 때문에 강하게 말하지 못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그렇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싶진 않았으므로 희나는 주장을 굽혔다.
“알았어요. 가서 쉴게요.”
그제야 진혁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희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며 말했다.
“그래. 그럼 잘 쉬고 있다가 집에서 보자. 조심해서 들어가.”
“선생님 오늘 일찍 들어올 거예요?”
살짝 기대가 섞인 목소리로 묻자 곧 그의 얼굴이 미안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어제 나눈 대화를 떠올리고 희나는 빠르게 덧붙였다.
“아, 맞다. 저녁에 만나러 갈 거라고 했죠?”
“그래. 미안해.”
“뭐가 미안해요. 걱정 말고 동생 또 도망 안 치게 잘 얘기할 궁리나 해요.”
까칠하게 말하자 진혁은 낮게 웃다가 조금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다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은 후 조용히 말했다.
“그럼 난 나가 볼게. 이따가 보자.”
그는 등을 돌려서 교사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의 뒤에서 희나는 상념에 잠겼다.
드디어 진혁이 진혜를 만나고 오는 거다. 만나고 온 뒤 나눌 이야기들에 벌써부터 긴장이 된다.
이기적이지만 그녀가 집에 돌아오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다시 갈 곳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희나로 하여금 집에 가서 편히 쉬고 싶은 마음을 빼앗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미안해하던 진혁의 얼굴을 떠올리고 희나는 터덜터덜 집을 향해서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왠지 아주 괴롭고 긴 밤이 될 것 같다는 싫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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