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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37화 (37/140)

37화. Be careful (1)

“으, 음…….”

몸을 뒤척이자 반사적으로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팔과 다리, 등이 강하게 욱신거렸다. 하지만 몸에 닿는 이불은 보드랍고 따뜻하고 푹신해서 기분이 좋았다.

희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창가로 들어오는 옅은 햇빛에 이제 조금 익숙해진 천장이 눈에 들어온다.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을 깨닫자 그녀는 움찔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함께 잠들었던 진혁이 보이지 않았다. 아주 깊이 잠들었는지 그가 떨어져 나가는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희나는 손을 더듬어 침대 옆 협탁에 있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오전 7시 30분이었다. 9시까지 등교해야 하는데 학교까지 한 시간 정도 걸리므로 샤워하고 나가기 빠듯한 시간이었다.

‘뭐야, 왜 안 깨운 거야.’

그렇지 않아도 아픈 몸이 갑작스런 움직임에 더 아려왔다. 일어나 앉아 몸을 웅크린 채로 통증을 잠시 가다듬다가 희나는 휴대폰이 놓여 있던 협탁 한쪽에 놓인 약 상자를 발견했다.

그 옆에는 쪽지가 함께 놓여 있었다.

「약 먹고 푹 쉬어. 일어나면 상처에 다시 약 바르는 거 잊지 말고. 식사도 준비해놨으니까 꼭 챙겨 먹어. 학교에는 아프다고 연락 왔다 해둘게. 혹시 많이 아파서 병원 가야 될 거 같으면 나한테 꼭 전화해.」

주인을 연상시키는 정갈한 글씨체였다.

희나는 쪽지를 몇 번씩 곱씹어 읽으며 옆에 있는 약 상자를 열어 보았다. 진통제와 연고들이 들어 있었다.

잠시 그것을 만지작거리다가 희나는 아픈 다리에 힘을 주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학교를 쉴 생각이 없었다. 몸이 조금 아픈 것쯤을 핑계로 결석할 거라면 이미 오래전에 학교를 그만뒀을 거다. 스스로 울어서 눈이 부은 날이 아니라면 무조건 학교에 가기로 다짐하고 실천해왔다.

거기다 이제 이번 주를 마지막으로 진혁의 교생 실습은 끝난다. 학교에서 그를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가능하면 꼭 가고 싶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불투명한 만큼, 같이 있을 수 있는 동안은 솔직히 같이 있고 싶었다. 떠나가서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돼 버렸던 사람이 너무 많았으니까.

샤워실에 들어가기 전 희나는 진혁에게 메시지를 전송했다.

「학교 갈 거니까 쉰다고 말하지 마세요.」

진혁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거다. 희나는 휴대폰을 내려둔 채 서둘러 간단한 샤워를 마쳤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와 옷을 벗고 약 상자에 담긴 연고를 발랐다.

그러다가 그녀는 문득 한쪽 벽에 걸린 커다란 거울을 의식하고 어색함을 느꼈다.

희나는 집에 물건을 부숴 대는 아버지가 있는 만큼 거울을 살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다. 목욕탕에 가는 일도 없으니 그녀가 맨몸을 이렇게 비춰 보는 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

약간 사선으로 선 채 곁눈질로 힐끔힐끔 바라보다가 그녀는 방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열 번쯤 확인한 후 과감히 돌아섰다. 희고 탄력 있는 소녀의 몸이 거울에 고스란히 비쳤다.

쭉 뻗은 긴 다리와 가느다란 허리 그리고 모양이 아름다운 적당한 볼륨의 가슴, 긴 목선과 둥근 어깨까지 성숙한 여인의 자태를 거의 갖췄으면서도 어딘지 앳된 구석이 남아 있는 몸은 아주 아름다웠다. 물론 명화에 무뢰한이 페인트를 끼얹은 것처럼 곳곳에 얼룩덜룩한 상흔이 남아 있긴 했지만 말이다.

처음 마주한 자신의 나신이 보기 좋다는 생각을 하고 희나는 킥킥 웃었다. 거울을 보며 스스로의 모습에 도취되다니 꼴사납다.

잠시 신기한 듯 몸을 보다가 희나는 어제 진혁이 그녀의 옷을 벗겼던 걸 떠올리고 얼굴을 확 붉혔다.

희나는 안에 속옷만 입고 압박 붕대를 조금 엉성하게 감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진혁은 속옷만 입은 희나의 등을 치료했고, 그 후에 얇은 나시와 짧은 바지만 입은 몸에 연고를 발라 주었다.

생각해보면 평상시라면 절대 남자의 손이 닿게 두지 않았을 곳을 그가 맨손으로 더듬은 거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상처 부위가 따끈따끈하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희나는 정강이나 허리, 목덜미와 등을 어루만지던 커다란 손을 떠올리고는 애먼 이불을 발로 뻥뻥 차고 싶은 기분이 되어버렸다.

더 이상 의식하고 싶지 않아서 얼른 속옷을 착용하고 교복을 입었다. 휴대폰을 보니 7시 55분이었다. 학교에 도착했을 시간인데 진혁에게 답장은 와 있지 않았다.

가는 길에 한번 전화를 걸어보기로 하고 드라이를 하며 그녀는 다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진혁은 그녀의 반쯤 벗은 모습을 보고도 별로 반응이 없었다. 이마에 입을 맞추는 것 같은 느낌은 있었지만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잘 구분이 안 간다. 처음 모텔에서 같이 잠들었을 때와는 달리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은데 어른이 보기엔 별로 매력이 없는 걸까.’

그렇게 중얼거리며 희나는 교복 목덜미를 잡아당겨 안쪽을 슬쩍 내려다보다가,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건지 깨닫고 혼자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엉뚱한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덧 시계바늘이 8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서 허둥지둥 집을 뛰쳐나왔다.

***

“희나, 안녕-?”

느지막이 교실에 들어서다가 밝은 인사 소리를 듣고 희나는 조금 움찔했다. 한동안 그녀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없었는데 돌아보니 민지가 서 있었다.

뒤에서 욕할 사람이라면 차라리 무시하겠는데 민지는 원망도 못 하고 침울해할 거 같아 그럴 수가 없었다.

“안녕.”

희나는 아주 어색하게 작은 소리로 마주 인사를 했다. 통통한 민지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떠올랐다.

“나 있잖아-. 너랑 사진 찍은 거 페북에 올렸어. 이거 봐-. 리플 엄청 많아! 우리 오빠가 너 집에 데려오라고 난리쳤어-.”

호들갑스럽게 다가온 민지가 휴대폰을 내밀며 이것저것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녀가 희나와 수다를 떨기 시작하자 그날 민지와 함께 있던 정화와 서연이도 다가왔다.

현장학습을 계기로 희나를 둘러싼 공기가 조금 바뀐 듯했다.

그녀도 어울리는 게 딱히 싫은 건 아니지만 어색하고 안정이 안 돼서 불편했다. 지금은 다정하게 굴어도 그녀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나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희나는 기분 상하지 않을 정도로 대강 맞장구를 쳐주면서 시계를 보았다. 조례가 시작할 시간이 이미 지났는데 종이 치지 않았다.

“왜 조례 안 하지?”

조용히 중얼거리자 민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오늘 체육대회 날이잖아-. 칠판 안 봤어?”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칠판을 보니 「10시까지 운동장 집합」이라고 커다란 글씨로 써 있었다. 희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프린트를 받았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몸이 이렇게 만신창이인데 체육대회라니. 참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제야 그녀는 왜 진혁이 깨워보지도 않고 그냥 나가 버렸는지 알 것 같았다.

‘어쩌지……. 벌써 학교에 와 버렸는데 그냥 돌아갈 수도 없고…….’

아프다고 한마디 해봤자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것이다. 진혁의 말대로 그냥 쉬었어야 했다고 후회하며 희나는 혹시 그에게서 답장이 왔나 확인하려 휴대폰을 꺼냈다.

그때 앞에 서 있던 소녀가 창밖을 내다보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어? 저기 교생 샘들 다 나와 있네?”

“진짜다-. 우리 그냥 먼저 옷 갈아입고 나갈까?”

다들 우르르 창으로 몰려갔다. 교생이란 말에 희나도 슬쩍 창밖을 보았다. 먼 운동장에서도 훤칠히 키가 큰 진혁을 알아볼 수 있었다. 운동복을 입고 분주히 돌아다니는 모습이, 휴대폰 같은 걸 꺼낼 새는 없어 보였다.

뭐라 변명을 해서 체육대회에서 빠지나 고민하고 있는데 민지가 얼굴을 쑥 들이밀며 말을 걸었다.

“희나야- 우리 지금 체육복 갈아입고 바로 나갈까 하는데, 같이 나갈래?”

“어? 아니……. 먼저 가. 난 조금 있다가 나갈게.”

당황해서 희나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몸의 상처 때문에 모두의 앞에서 옷을 갈아입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민지가 재차 권하기 전에 자리에서 휙 일어났다.

“나 잠깐 어디 갔다 올 데가 있어서. 미안.”

“어? 어디? 지훈이한테 가는 거야?”

아니었지만 달리 할 말이 없어서 희나는 그냥 그런 걸로 해 두기로 했다.

“어? 어…….”

“어디로 가는데?”

“글쎄. 아마 옥상이려나.”

“저기, 나도 같이 가도 돼?”

조심스럽게 묻는 민지의 얼굴이 발그레하다. 금요일 모종의 썸싱이 있었던 모양이다. 망설이다가 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상관없어.”

신난 민지와 함께 교실을 나가던 희나는 이쪽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소영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현상을 좋아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희나는 시선을 무시한 채 교실을 휙 나와서 옥상으로 향했다.

“오, 희나- 이쁘다. 웬일이래? 나한테 이뻐 보이려고 신은 거야?”

옥상에 들어서자마자 지훈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시선은 희나의 다리로 향해 있었다. 희나는 다친 다리를 감추려고 니삭스를 신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주희나, 왔냐-?”

“하이- 엥? 요- 민지도 안녕?”

능글맞게 구는 지훈의 가슴을 희나가 가볍게 주먹으로 툭 쳐서 밀어내자 현상과 병태가 아는 척을 했다.

현상이 민지를 발견하고 인사하자 민지의 표정이 눈에 띄게 기뻐 보였다. 아무래도 민지도 현상을 노리고 있나 보다.

희나가 그들 근처에 가서 털썩 주저앉자 지훈도 옆에 와서 앉더니 물었다.

“그 사람은 만났어?”

“어? 아니, 아직…….”

“그렇게 찾아다니더니 찾고 나니까 안 만나네.”

지훈이 흰 치아를 내보이며 킥킥 웃었다. 시종일관 싱글벙글한 것이 희나를 위해 뭔가 했다는 게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희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너도 만났어?”

“구라인지 아닌지 확인하려고 불러내 봤어. 사진이랑 실제는 이미지가 좀 다르더라. 화장을 별로 안 해서 그런가.”

“그래?”

실물이 어떤지 잘 몰랐으므로 희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거기서 얘기가 끝날 줄 알았는데 이어진 지훈의 말에 희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근데 사진이랑 다른데도 어째 낯이 익더라. 어디서 본 거 같은 얼굴이었어.”

화장한 얼굴은 완전히 이미지가 달랐지만 남매니까 조금 닮았을지도 모른다. 희나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이 동네 가출 팸이었다니까 어디서 봤나 보지. 그것보다 금요일에 노래방은 재미있었어?”

“어? 어, 재밌었어.”

대충 아무 말이나 꺼냈는데 지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나 자신답지 않은 질문이었음을 깨달은 희나는 아차- 싶었다.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희나는 그가 더 이상하게 생각하기 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로 했다.

“이제 그만 내려가 봐야겠어.”

“어? 벌써 가게?”

현상의 옆에 앉아 있던 민지가 고개를 돌리며 아쉬운 목소리로 물었다. 희나가 대답하기 전에 현상이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어- 40분이네. 우리도 가서 슬슬 준비해야겠다.”

“그러게-. 이따 운동장에서 보자.”

그대로 해산한 뒤 내려온 희나는 선생님에게 핑계 대볼 기회도 얻지 못한 채 흐름에 떠밀려 나가게 되었다.

운동장은 체육복을 입은 아이들로 가득했다. 자신의 반 대열에 합류해 늘어서자 곧 개회식이 시작되었다.

간단한 식순이 끝나고 정해진 반의 지정 구역으로 돌아가자 곧 첫 경기인 200m 달리기 예선이 진행되었다.

각 반의 응원전이 열기를 띠는 와중에도 민지는 희나의 옆에 꼭 붙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사이에 끼워진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을 희나에게 보여주었다.

“너무 마음에 들어서 어제 홈플러스 가서 뽑았어-. 예쁘지.”

“어제 찍은 사진이네. 엄청 잘 나왔다.”

“그럼 희나 너 줄까?”

“어? 아니, 괜찮아. 너 가지려고 뽑아 온 거잖아.”

“내 거 줄게, 가져. 난 또 뽑으면 되니까.”

내미는 사진을 엉겁결에 받아 든 희나는 좀 얼떨떨했다. 집에 앨범 같은 건 당연히 없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민지가 했던 대로 지갑 카드 수납 칸에 사진을 꽂아 넣었다. 사진이 들어가자 칙칙한 검정 지갑이 조금 화사해 보이는 듯했다.

민지의 지갑을 보니 온통 사진투성이였다. 희나의 시선을 느낀 민지는 혀를 내밀며 해명하듯 말했다.

“난 어디 놀러 가면 꼭 사진 이렇게 출력해서 모아-. 이런 게 추억이잖아.”

조금 오그라드는 발언이었지만 그 말의 내용에 희나도 공감했다. 그녀도 간직하고 싶은 순간이 생겼다. 휴대폰에 담겨 있는 진혁과 찍은 사진을 떠올리며 희나는 관심 있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거 어떻게 뽑아? 아무 데서나 뽑을 수 있어?”

“나는 홈플러스에서만 뽑아. 엄마가 낮에 거기서 일하시거든-. 가는 김에 내가 해다 줄까?”

“아니, 괜찮아. 딱히 뭐 뽑으려는 게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민지는 순진하게 자세히 설명을 해준다. 희나가 굉장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기분 좋게 웃는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굳어 있던 마음이 조금 열리려는 기미가 보였지만 희나는 방어 기제를 작동시켰다.

이건 표면적인 관계일 뿐 끝까지 믿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처음 만났을 때의 소영도 그녀와 다르지 않았다는 걸 떠올리면서.

가끔씩 민지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앞을 쳐다보다가 희나는 멀리서 눈에 띄는 복장을 한 무리들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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