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돌아갈 수 있는 곳은 (2)
새벽이 되자 몸의 통증 때문에 잘 수가 없어 잠이 깼다. 등도 멍이 많이 든 모양이다. 온몸이 얼룩덜룩하고 어깨에선 피가 새어 나와 옷을 물들이고 있었다.
희나는 벽장에서 겨울옷을 뒤져 긴 체크 남방을 하나 찾아내서 입었다. 덥겠지만 그럭저럭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벽에는 희나가 싸둔 짐이 기대 세워져 있었지만 몸이 아파서 짐을 더 들고 나가는 건 힘들었다.
그녀는 들고 온 가방만 아픈 어깨에 다시 들쳐 메고 절뚝거리며 집을 나섰다.
생각보다 오래 잤는지 새벽 네 시였다. 20분 정도 걸리는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30분 넘게 걸려 빠져나온 희나는 대로변에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붕대와 타이레놀을 구입했다. 밴드도 구입할까 조금 고민했지만 돈이 아까워서 그만두었다.
편의점 화장실에 들어가 옷을 벗고 거울을 보며 아픈 부분에 붕대를 대충 감았다. 그리고 진통제를 먹었다. 플라시보 효과인지 모르겠지만 먹으니까 확실히 덜 아픈 것 같았다.
화장실에서 나온 뒤 ATM에서 다시 현금을 찾았다. 희나는 돈과 함께 나온 ‘우체국 행복 어린이 카드’라고 쓰인 녹색 카드를 건조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아주 오래돼서, 위의 무늬도 거의 지워진 현금 카드다.
아주 오래전 일인데도 기억이 난다. 네 살 때쯤 희나는 부모님과 함께 우체국에 가서 예금 통장을 만들었다. 그 후에는 부모님 신분증도 없고, 학생이라 자신의 신분증도 없어서 새 계좌를 만들 수가 없었다.
‘그땐 그 인간도 정상이었지.’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가 안아주고 사탕을 사준 것도 기억난다. 그때도 저 지하 집에서 가난하게 살았지만, 그렇게 불행했던 거 같지는 않다.
그러나 희나가 다섯 살 되던 해 태어난 셋째 동생은 1년간 시름시름 앓다가 어마어마한 빚을 안기고 죽어버렸다.
그때부터 엄마는 늘 울기만 했고, 아버지는 술을 마시기 시작한 거 같다.
희나는 죽어버린 동생 이름도 모른다. 집을 나간 엄마 이름도 현옥이었는지 현숙이었는지 가물가물하다.
엄마를 죽도록 원망하고 있는 희원과 다르게 희나는 엄마를 이해했다.
이 집에서 얼마나 도망치고 싶었을까. 나갈 수 있다면 누구라도 나가지 않고는 못 배길 거다.
가족이라고 해도 결국 돌아서면 남남인 거다. 짐만 되는 가족은 없는 편이 훨씬 낫다. 희나와 희원은 엄마에게 무엇보다도 무거운 짐이었을 거다.
희나는 카드와 돈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첫 차를 타러 역으로 향했다.
주유소에 온 희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일을 했다. 타이레놀을 두 알씩 세 시간 간격으로 먹으며 통증을 참아냈다. 덥고 욱신거려서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다행히 다른 사람들은 피곤하냐고만 물을 뿐 그녀가 다친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희나는 이를 악물고 평소보다 더 크게 인사하고 계속 웃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머릿속에는 계속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오늘은 어떻게 할까.’
저번 주에 진혁은 본가에서 바로 학교로 출근했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오늘도 집은 빈집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당했는데도 진혁의 집에 홀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희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어제 돈을 줬으니 오늘 하루 정도는 더 집에 가서 잘 수도 있을지 몰라.
아니, 학교 가서 자면 되니까 그냥 맥도날드에서 밤을 새울까.
희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훈이 경고했다지만 그래도 새벽에 효찬 무리와 마주칠 가능성은 피하고 싶었다. 게다가 약발로 억지로 버티고 있지만 얻어맞은 팔다리가 말도 못 하게 욱신거린다. 밖에서 자면 내일은 더 악화될지도 모른다.
‘잘 자리……. 잘 자리…….’
몸이 이러니 찜질복도 입을 수가 없어 찜질방도 못 간다.
계속 중얼거리다 보니 궁전 모텔이 떠올랐다. 이 와중에도 웃음이 조금 나왔다. 좀 저렴하면 갔을 텐데.
하루 종일 정신이 그렇게 딴 데에 간 상태로 일을 했다. 깨닫고 보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갈 데도 없는데 꼭 이럴 때만 일이 빨리 끝나는 거 같다.
희나는 터덜터덜 휴게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역시 그냥 PC방이나 가서 엎드려서 자야겠어.’
생각을 하며 걷기 시작하는데 뒤에서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주유소에서 차도 제대로 못 대나.’
투덜거리며 무시하고 걸었다. 그때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나야!”
돌아본 희나는 마음이 울컥해서 하마터면 울 뻔했다. 진혁이 하얀 차에서 고개를 내밀고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계속 온몸을 휘감고 있던 갈 곳 없는 외로움과 불안함, 두려움이 한순간에 녹아 사라지는 것 같았다.
희나가 아픔도 잊고 날듯이 달려가자 진혁이 미소를 지었다.
“웬일로 그렇게 반가워해? 좋은 일 있었어?”
차에 올라타는 그녀의 표정이 밝았던 모양이다. 희나는 금세 얼굴을 바꾸고 새침하게 말했다.
“좋은 일이 있긴 뭐가 있어요. 그나저나 여긴 웬일이에요?”
“좀 빨리 돌아왔어. 이때쯤 마친다고 들은 거 같아서 태워 가려고 왔지.”
그렇게 말하지만, 희나는 왠지 일부러 시간을 맞춰서 왔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차는 부드럽게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왜 일찍 돌아왔어요?”
“이번 주는 일이 좀 적었어.”
진혁의 얼굴은 본가에 갈 때와 달리 뭔가 조금 후련해 보였다. 희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여동생이랑 연락은 했어요?”
“어……. 했어.”
지훈이 제대로 찾은 모양이었다. 희나는 살짝 눈을 내리 뜨며 진혁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바로 끊을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밝은 목소리로 받았어.”
“그럼 돌아오기로 했어요?”
“우선 내일 저녁에 만나기로 했어. 그 후의 일은 만나서 얘기하자고 하더라.”
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묵묵히 있었다. 차마 ‘그럼 나는 어떻게 해요?’라는 말은 물을 수 없었다.
욱신거리는 다리를 슬쩍 누르며 그녀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마 후 집에 도착한 둘은 나란히 소파에 가서 앉았다. 집에 진혁과 함께 돌아오니 마음이 편하다. 얼마나 단순한 건지, 이렇게 앉아 있으니까 또 집에서 있었던 일은 옛날의 일처럼 느껴진다.
투탁거리며 함께 다큐멘터리 채널을 보고, 밥을 먹었다. 아무 일 없이 이러고 있는 게 희나는 즐거우면서도 마음 한편이 불안했다. 물어봐야 할 말을 묻지 못하고 있으니 계속 초조해진다.
아프지 않은 부분을 대충 씻고 희나가 다시 소파에 앉았을 때였다. 진혁이 그녀를 흘깃 보더니 물었다.
“옷, 안 갈아입어?”
“나중에요.”
태연하게 대답한 거 같은데 진혁이 뭔가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본다. 5월 말인데 긴 옷을 입는 건 역시 수상한 모양이다.
진혁의 시선을 피해 희나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나 먼저 들어가서 잘래요. 잘 자요.”
상황을 넘겨보려고 한 행동이었으나 도리어 더 의심을 산 모양이다. 진혁이 따라서 일어나더니 희나의 팔목을 잡았다.
“왜 이래요? 이거 놔요!”
희나는 뿌리치려 했으나 그 전에 진혁이 빠르게 단추를 풀고 그녀의 소매를 휙 걷었다. 드러난 뽀얀 손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뭐하는 거예요, 진짜!”
“미안…….”
화난 척하고 팔을 뿌리친 뒤 희나는 방으로 빠르게 걸었다. 손목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문을 닫기 전 희나는 슬쩍 돌아보았다. 진혁은 가만히 선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혀를 살짝 내밀어 보이고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진혁이 쿵쿵 소리가 나도록 빠르게 걸어서 희나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를 잡아 침대에 앉혔다.
“또 왜 그러는…… ?”
희나는 깜짝 놀라 진혁을 밀어냈다. 하지만 진혁은 밀어내는 팔을 제압하고 희나가 입고 있는 상의의 단추를 풀었다.
“뭐하는 거예요! 이 변태가!”
경악한 희나가 반항했지만, 순식간에 입고 있던 남방이 벗겨져버렸다. 그리고 진혁의 눈앞에 희나의 몸이 드러났다.
안경 너머 진혁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고, 말문을 잃은 입이 충격으로 벌어졌다.
얼기설기 칭칭 감긴 붕대 위로 배어나온 피, 그리고 몸 군데군데를 물들이고 있는 끔찍하게 새파란 피멍들.
희나는 진혁이 떨어뜨린 남방을 집어 들어 몸을 가렸다. 그리고 그때서야 남방 등쪽 부분에 피가 배어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진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요.”
“이게 어떻게 별게 아니야? 누가 이랬어!”
그는 다그치듯 언성을 높였다. 언제나 부드러운 까만 눈동자에 분노가 가득했다. 그가 이렇게 화내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누가 이랬냐니까? 어떻게 된 거냐고!”
그는 묵묵히 있는 희나에게 다시 물었다. 그러나 희나는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타까운 눈으로 희나를 쳐다보던 진혁의 눈가가 괴로움으로 물들었다.
“어디서 매번 이렇게 다쳐서 오는 거야.”
“…….”
“말 안 해줄 거야?”
고개를 푹 숙여버린 희나를 진혁은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한숨을 내쉬고 방을 나갔다.
혼자 남겨진 희나는 우두커니 앉아 커다란 눈으로 닫힌 문을 쳐다보았다. 몸도 아프지만 방금 전 진혁의 걱정하던 얼굴에 마음이 더 아프다.
말하지 않아서 화난 걸까. 조금 걱정도 되기 시작했다.
어쩔 줄을 몰라 초조해하고 있는데 다시 문이 벌컥 열렸다.
진혁의 손에는 구급상자가 들려 있었다. 그는 천천히 다가와서 희나를 침대에 엎드리게 하고 피로 물든 붕대를 천천히 벗겨냈다.
소독을 하는지 상처 부위가 따끔해서 몸이 움찔거렸지만 희나는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참았다.
어깨 상처를 닦아내고 깨끗한 거즈를 붙인 뒤 진혁은 커다란 비치 타월로 희나의 몸을 감싸서 바로 눕게 했다.
그녀가 불안한 눈으로 올려다보니 진혁의 얼굴은 무척 괴로운 듯 보였다.
“역시 난 도움이 안 되나 보네. 이렇게…… 계속 다치는데.”
진혁이 중얼거리며 커다란 손을 뻗어 희나의 뺨을 만졌다. 손의 온기가 느껴지는 순간, 희나는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어…….”
마주친 눈은 상처 받은 것처럼 보였다. 아무 잘못도 없는 진혁이 자책하고 있었다. 마음이 너무 아파 결국 희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기어들어 가듯 나직이 말했다.
“집에…… 갔었어요.”
뺨을 쓰다듬던 손길이 잠시 멎었다. 그리고 그가 뭐라 말할 수 없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터져 나오려는 분노를 억누르는 듯 호흡이 깊고 거칠었다. 말없이 한참 동안 감정을 절제하던 진혁은 갈라진 목소리로 짧게 물었다.
“……더 다친 데 없어?”
“잠깐…… 옷 좀 갈아입고…….”
희나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작게 말하자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갔다. 희나는 서둘러 나시와 짧은 반바지로 갈아입은 뒤 누워서 진혁을 불렀다.
문을 열고 들어온 진혁은 끔찍한 것을 본 듯 눈을 지그시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허벅지에 긁힌 자국이 잔뜩 있고, 정강이는 부서진 것처럼 처참한 내출혈이 온통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가느다란 허리 부근 티 없이 흰 피부 위에는 직경 10cm가 넘는 끔찍한 피멍이 들어 있었다.
탄식하듯 말을 내뱉은 진혁은 나가더니 잠시 후 얼음주머니와 수건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묵묵히 멍 자국 위에 연고를 바른 뒤 수건을 올리고 비닐 속의 얼음을 올려주었다.
그 손길이 너무 따뜻해서, 희나는 맞을 때보다 더 마음이 아팠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도 꾹 참았다.
나른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희나의 머리카락을 따뜻하게 쓸어주며 진혁이 조용히 말했다.
“이제 좀 자. 아침이 돼도 많이 아프면 같이 병원 가보자.”
말투는 더없이 다정하고, 미안한 마음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가 미안해하니까 마음이 미어지는 거 같다. 희나는 얼굴을 만지는 손을 잡고 애절하게 말했다.
“선생님, 가지 마요.”
“그래. 잘 때까지 여기 있을게.”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다정한 얼굴을 보니 어리광을 부리고 싶다.
희나는 팔을 쑥 뻗어, 진혁의 안경을 벗겨 협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쪽으로 물러나 공간을 만들며 팔을 끌어당겼다.
조르는 듯한 희나의 얼굴을 보고 진혁은 무척 곤란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픈 희나를 밀어내지 못하고 옆에 누웠다. 그가 눕자 희나는 팔베개를 하고 품 안에 폭 들어갔다.
따뜻하고 넓은 품에 얼굴을 묻자 슬픈 생각도, 몸의 통증도 모두 날아가 버리는 것 같다.
굳어버린 것 같던 심장이 다시 기분 좋게 뛰는 것을 느끼며 희나는 향긋한 목덜미에 얼굴을 기댔다. 그리고 깊이 숨을 들이쉬자 진혁의 몸이 조금 경직된다.
“바보야…….”
그가 말을 하자 머리 위에서 목이 움직이는 것이 기분 좋다. 희나는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비볐다.
“자꾸…… 이러면 안 되는데…….”
자신에게 하는 건지, 희나에게 하는 건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진혁은 팔을 뻗어 그때처럼 희나를 살짝 감싸 안았다. 심장은 이제 조금 더 생동감 있게 쿵쿵 뛰기 시작한다.
든든한 팔에 감싸이니 굳게 닫힌 마음이 새어 나온다. 희나는 고개를 들어 진혁을 보았다. 그리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나 여기 계속 있고 싶어요…….”
그러자 그는 희나를 내려다보며 아주 슬픈 표정을 지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진혁의 팔이 희나를 꼭 끌어당겼다. 긴 손가락이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 그녀의 머리를 쓸었다. 말하지 않아도 맞닿은 피부에서 그도 같은 생각을 한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그래서 조금 슬퍼졌다.
희나는 눈을 감고 다시 너른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솔솔 잠이 오기 시작했다.
완전히 잠이 들기 전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희나는 뜨거운 것이 이마에 닿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주 소중한 것을 다루듯 부드럽게 입 맞춘 후 곧 떨어졌다. 숨을 죽인 채 입꼬리를 올리고, 그녀는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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