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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34화 (34/140)

34화. 온기

“네?”

진혁의 제안에 희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아르바이트하러 가야 되나.”

“아니, 꼭 가야 되는 건 아니지만.”

“그럼 보고 갈까?”

되묻는 진혁의 흰 얼굴을 보며 희나는 입을 쑥 내밀었다. 그리고 먼저 걷기 시작했다.

“그냥 가게? 출구는 그쪽이 아닌데.”

“그 정도 말했으면 ‘보고 갈까?’ 말고 ‘보고 가자’라고 하세요.”

희나의 말을 듣고 진혁이 가볍게 웃었다.

“미안. 그럼 이쪽으로 가자.”

가볍게 퍼레이드만 보고 가려고 했지만 둘은 그 후에 불꽃놀이를 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어차피 늦었으니 불꽃놀이까지 보고 가기로 했다.

돌아다니는 학생이 있을지도 몰라서, 분수대 바로 앞 대신 조금 후미진 곳에서 보기로 했다.

매점에서 맥주와 간식을 간단히 산 뒤, 두 사람은 분수대 구석의 나무 아래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대충 바닥에 주저앉아 불꽃놀이를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본 희나가 조용히 말했다.

“다 커플밖에 없네요.”

“그러게.”

희나는 아까 아이들에게서 진혁이 여자 친구가 있다고 했단 말을 들었다. 진혁의 친구들은 헤어진 지 오래됐다고 했으므로 친구들의 말이 맞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왠지 마음에 계속 걸렸다.

희나는 지나가는 말처럼 들리기를 바라면서 물었다.

“선생님 여자 친구 있다면서요? 왜 안 만나요?”

“누가 그래?”

“그냥 애들이요.”

“없어. 그냥 거짓말한 거야.”

그 말을 듣자 왜인지 안심이 된다. 희나는 표정을 풀고 킥킥 웃었다.

“그거 참 슬픈 거짓말이네요.”

“너도 없잖아. 그보다 없다는 거 안 물어봐도 알 텐데 확인 사살을 하다니…….”

“그냥 그렇다기에 물어본 거예요. 학교 사람들은 다 있는 줄 아나 보던데요.”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덧붙였다.

“심 선생님에게는 들켰지만.”

“들켰다고요?”

“전에 심 선생님이 나보고 여자 친구 있는 거 거짓말이죠? 하고 물으시더라고. 어떻게 아셨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진혁에게 ‘바보’ 하고 작게 말하며 희나는 퉁퉁거렸다.

“그건 그냥 떠본 거잖아요.”

“음? 그런가?”

“그렇죠. 선생님한테 관심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

진혁이 어색하게 맥주를 들이켰다. 얼굴이 좀 빨개진 듯하다.

“솔직히 선생님도 몰랐다고는 못 할 텐데?”

만약에 몰랐다면 정말 죄 많은 남자다. 진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 이 경우의 침묵은 긍정이란 뜻이다.

괜히 심술이 나서 희나는 틱틱댔다.

“사귀지 그래요? 심 선생님 좋아하지 않아요?”

“좋아하지 않아.”

무미건조한 어조로 진혁은 잘라 말했다.

‘떠보는 거마다 술술 말하네, 바보 아저씨가.’

희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웃었다.

문득 아침에 ‘나 좋아하죠?’라고 물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그는 ‘어린애에게 그런 생각 안 해’라든가 ‘그런 얘기 그만해’라고만 했을 뿐 좋아하지 않는다고는 말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희나가 멍한 시선으로 초점 없이 앞을 보고 있는데 휭- 하고 바람이 불어왔다. 5월인데 돌풍이 제법 강해 바로 뒤에 있는 나무에서 나뭇잎과 꽃이 우수수 떨어졌다. 머리카락에 붙은 것 같아 희나가 고개를 도리도리 휘젓자 진혁이 웃으며 손을 뻗어 꽃잎을 떼어주었다.

“고양이 귀에 자꾸 붙네.”

그 말을 듣고서야 희나는 자신이 아직도 고양이 귀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쑥스러워서 빼려고 하자 진혁이 만류했다.

“집에 갈 때까지 하고 있지그래. 잘 어울리는데.”

“잘 어울려요?”

“그래. 너 좀 고양이 같잖아. 귀여워.”

말하면서 그는 미소 지었다. 사심 같은 건 전혀 없는 듯한 낮은 목소리인데도 희나는 왠지 얼굴이 빨개진 거 같았다.

괜스레 신경 쓰여서 휴대폰을 꺼내 카메라 모드로 하고 얼굴을 살폈다.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고양이 귀라서인지 머리에서 돋아난 것처럼 자연스럽다.

희나가 얼굴을 체크하는 것을 본 진혁이 또 쿡쿡 웃었다.

“웃지 마요!”

“하하. 기념인데 사진 찍어줄까?”

“찍을 거면 같이 찍어요.”

희나의 말에 진혁은 잠시 가만히 쳐다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잘 나왔네. 나도 보내줘.”

화면 속의 두 사람은 아주 다정하고 기분 좋아 보였다.

희나는 왜인지 진혁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서 휴대폰만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슬슬 불꽃놀이가 시작할 시간이 되었다. 이제 분수대 앞 광장은 사람으로 가득했다. 인파가 몰려 진혁과 희나가 앉아 있는 곳까지 사람들이 들어찼다.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어 일어서는데 뒤에서 누가 미는 바람에 희나가 순간 비틀거렸다.

“조심해.”

진혁이 손을 잡아 부축해주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사람들이 몰려와 만원 전철 같은 상태가 되자 그는 희나의 몸을 끌어당겨 자신의 옆에 세웠다.

그쪽으로 밀고 들어오는 사람이 없어서 희나는 이제 안정적으로 서 있게 됐지만 진혁은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떨어지면…… 위험하니까.”

누구한테 설명하는 건지, 진혁은 그렇게 말했다. 희나는 서로를 놓칠 정도로 사람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마주 잡은 채 묵묵히 있었다.

곧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화려하게 하늘을 수놓는 불꽃은 정말 너무 예뻤지만 희나는 잡은 손이 신경 쓰여 어떤 불꽃들이 터지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냥 멍한 눈으로 못 박힌 듯 하늘을 바라보며, 그곳을 수놓고 있는 불꽃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랐다.

이대로 계속 끝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희나는 불꽃이 너무 예뻐서라고 스스로 납득시켰다.

그러나 한참을 이어지던 불꽃은 마지막으로 커다란 폭죽들이 연달아 터지며 화려한 피날레를 맞이했다. 마지막 불꽃까지 하얀 연기만 남기고 사그라든 뒤에도 둘은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끝났네.”

얼마가 지난 뒤 진혁이 아쉬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희나는 불꽃놀이를 보는 동안 한 번도 쳐다보지 못했던 진혁을 그제야 올려다보았다.

“갈까?”

진혁이 희나를 내려다보며 생긋 웃었다. 주변이 어둡고 안경 때문에 확실하지 않지만 그의 얼굴엔 은은한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아마 자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희나는 고개를 숙여버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대로 걷기 시작했다. 불꽃놀이가 끝났고, 인파는 조금씩 흩어져 더 이상 휩쓸려 떨어질 위험은 없었지만 꽉 잡은 두 손은 놓지 않았다.

분명히 불꽃놀이까지 보고 돌아가는 학생이 있을 거다. 어둡긴 하지만 진혁은 키가 커서 꽤나 눈에 띄니까 손을 잡은 채 걸어가는 건 상당히 위험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희나는 커다란 손이 주는 설렘을 놓고 싶지 않았다. 둘은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묵묵히 손을 잡고 걸었다.

그렇게 꽤 오래 걸은 뒤 두 사람은 차 앞에 도착했다.

그제야 희나의 손을 꼭 잡고 있던 진혁의 손이 느슨해졌지만 희나는 놓지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잡고 있었는데도 놓기 아쉬웠다.

희나가 계속 손을 놓지 않자 진혁이 희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먼저 적극적으로 손을 놓진 않았다. 둘 다 딱히 뭘 어쩌고 싶은 것도 아니어서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손을 잡고 서 있었다.

그러나 그 묘한 텐션은 희나의 휴대폰이 울리면서 가볍게 깨졌다.

“전화 받아.”

외부의 개입이 계기가 된 듯, 진혁이 그렇게 말하고 희나의 손을 먼저 놓았다. 그리고 운전석 쪽으로 돌아가 차에 올라탔다.

희나는 온기를 놓친 손이 허전하게 느껴졌다. 뭐라 설명할 수 없이 아쉬운 기분이었다.

‘하필 이런 타이밍에.’

희나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휴대폰에는 부재중 전화가 4통 있었다. 타이밍 좋게 맞춰서 걸려 온 게 아니라 계속 걸었는데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 4통은 모두 지훈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희나는 통화 버튼을 눌러 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야?”

다소 딱딱한 어조로 전화를 받았던 희나의 표정은 통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굳어졌다.

지훈과의 통화를 마치고 희나는 어두운 얼굴로 묵묵히 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건 채 기다리고 있던 진혁은 희나의 안색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

잠깐 머뭇거리던 희나가 짧게 말했다.

“선생님 동생…… 찾았대요.”

놀란 듯 진혁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말을 잃은 두 사람 사이로, 적막이 흘렀다.

***

“방문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큰 소리로 인사를 한 뒤 희나는 그늘로 돌아왔다.

이제 토요일 오후 3시가 조금 지난 시간. 5월도 후반에 접어들어 낮에는 날씨가 조금 무덥다.

벽 쪽의 간이 의자에 앉아 손님이 오기 전 마시고 있던 녹차 라떼의 스트로를 다시 입에 물었다. 이제야 좀 바쁜 시간이 지나고, 손님도 드문드문 온다. 희나는 멍하니 도로를 쳐다보았다.

오늘 아침 진혁은 주유소까지 그녀를 태워주고 오랜만에 이곳에서 주유를 했다. 직접 주유를 해주니 정말 매주 오던 차라는 실감이 왔다.

그가 자주 오던 때는 겨울이었기 때문에 어둑어둑해서 안쪽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럭저럭 안에 있는 사람 얼굴도 분간이 되었다. 아니, 관심만 가지고 봤다면 그때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창밖에서 바라본 진혁의 표정은 어두웠다. 이유는 묻지 않아도 여동생 생각을 하고 있는 탓일 거였다.

희나는 다 마셔서 쪼록- 소리가 나는 녹차 라떼 컵을 휴지통에 툭 던져 넣었다. 그리고 다시 달리는 차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젯밤, 그녀는 지훈에게서 받은 진혜의 연락처를 진혁에게 주었다.

당장이라도 진혜에게 전화할 줄 알았는데 진혁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먼저 놀란 얼굴로 어떻게 진혜를 찾게 되었는지, 혹시 또 위험한 일을 한 건 아닌지 다그쳐 물었다.

희나는 그냥 아는 애에게 부탁했다고만 얘기했다. 그렇게만 얘기해도 지훈에게 부탁했다는 걸 눈치챘는지 진혁은 거기에 대해서는 더 묻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을 말없이 묵묵히 달리다가 조용히 물었다.

“진혜는 잘 있대?”

희나는 머뭇거리며 지훈에게 들은 대로 솔직히 털어놓았다. 딱히 감금되어 있거나 하지는 않지만 마천동 부근에서 어떤 남자와 동거하며 노래방 도우미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진혁은 한숨을 깊이 내쉬긴 했지만 어느 정도 그런 상황일 것임을 예상했는지 심하게 충격을 받은 표정은 아니었다.

“어떻게 할 거예요? 연락 안 해요?”

“시간도 많이 늦었고, 어쨌든 안전한 거 같으니 우선 내일 본가에 가서 부모님이랑 얘기를 먼저 해봐야겠어.”

집에 도착해서도 진혁은 꼭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았다. 얼굴이 어두워 보여서 희나는 꼭 묻고 싶었던 말을 묻지 못했다.

희나의 시선이 주유소 높게 설치되어 있는 커다란 시계로 향했다. 새벽에 내려갔으니 본가에 도착했을 시간이다. 별일 없으면 진혜하고도 아마 연락했을 것이다. 분명히 잘된 일인데 희나는 솔직히 기뻐할 수가 없었다.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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