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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33화 (33/140)

33화. 불타는 현장 체험 학습 (3)

“선생님- 오늘 너무 멋있어요! 응원했는데 매운 거 너무 못 드심. 크크크큭.”

돌아보니 바로 근처에 진혁이 와 있었다. 그는 아이들의 놀림에 조금 익숙해진 듯 웃으며 대응했다.

“미안해요. 귀엽네요, 다들.”

“꺄, 고맙습니다. 예쁘죠!”

“희나가 인형도 줬어요!”

인형 머리띠를 보고 진혁이 칭찬하자 소녀들은 기쁜 표정으로 참새처럼 수다를 떨었다. 진혁이 희나를 쳐다보더니 뭔가를 슥- 내밀었다.

“자- 너도 같이 쓰고 다녀.”

뭔가 하고 보니 진혁이 내민 것은 3등상인 커플 고양이 귀 머리띠였다.

이미 모자도 쓰고 있고, 고양이귀 같은 건 낯간지러워 취미도 없었다. 많은 아이들 앞에서 오해받기 싫어서 희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다른 애들이나 주세요.”

“너 말고 다른 여학생들은 이미 다 쓰고 있는데.”

“선생님이 쓰지 그래요?”

“나 같은 아저씨가 무슨…….”

진혁은 웃으며 말했지만 옆에 둘러싼 애들은 은근히 진혁이 고양이 귀 머리띠를 쓰는 걸 기대하는 눈치였다. 분위기를 읽은 희나가 다시 거절하려는데 진혁이 말을 덧붙였다.

“게다가 심 선생님이랑 같이 쓰고 다니기는 좀 그렇잖아.”

진혁의 뒤로 재연이 같은 머리띠를 쓰고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7반 남자애들과 신나게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으면 분명히 같이 쓰자고 권할 것이다. 재연이랑 같이 쓰고 다니는 걸 보고 싶지 않아 희나는 날름 받아 들었다. 그러자 뒤쪽에 서 있던 민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기- 우리 머리띠 산 애들끼리 사진 찍을 건데 너도 같이 찍을래?”

평소 같으면 그냥 됐다고 하고 차갑게 무시했을 것이다.

희나는 기쁜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는 진혁과, 그녀에게 제안하는 민지의 통통하고 순진해 보이는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모자를 벗어 손에 든 뒤 머리띠를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그러자.”

“정말? 그럼 이쪽으로 와-.”

제안하면서도 희나가 수락할 거라고는 생각 안 했는지 민지의 눈이 조금 놀란 듯했다. 그러나 그 놀라움은 난처하다기보다 기쁜 기색이었다.

희나는 민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서 진혁이 입 모양만으로 ‘잘 생각했어’라고 말한 뒤 씩 웃고 있었다.

‘그새 우쭐해서 또 어른인 척하기는. 바보 둔탱이 아저씨 주제에.’

희나는 새침하게 고개를 팽 돌려버렸다.

배경 좋은 꽃 조형물 앞에 여자애들 일곱 명 정도가 고양이 머리띠를 한 채로 옹기종기 모여 서서 사진을 찍었다.

그냥 가볍게 한두 장 찍고 말 줄 알았는데 한 수십 장은 족히 찍는 거 같았다. 계속 같이 찍자고 아이들에게 권해져서 희나는 평생 찍은 것보다 많은 셀카를 하루에 다 찍었다.

“희나야- 너 진짜 사진 예쁘게 나온다. 걸그룹 같애.”

“그러게. 헤헤-. 맞다, 너 도시락 먹을 거야?”

“어? 어.”

희나가 어색하게 대답하자 민지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럼 우리랑 같이 먹을래? 우리 분담해서 과일이랑 이거저거 많이 싸 왔거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희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뭐가 기쁜지 소녀들은 꺄- 하고 외치며 마구 웃었다.

이미 점심때가 되었기에 희나는 그녀들과 같이 피크닉 존으로 걸었다. 반쯤 갔을 때 뒤쪽에서 우렁찬 외침 소리가 들렸다.

“야! 주희나-! 거기서 뭐 하냐!”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것 같은 목소리로 병태가 이쪽을 향해 소리쳤다. 그 소리에 희나를 발견한 지훈이 마구 달려왔다.

“희나야- 밥 안 먹어? 같이 먹자.”

“나 얘네랑 같이 먹기로 했는데.”

지훈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듯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웃사이더인 희나가 여학생들과 도시락 먹으러 간다는 게 안 믿기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달려온 현상과 병태는 반색을 했다.

“오- 주희나, 눈치 있는 녀석. 여자애들을 알아서 모아놨구나! 같이 밥 먹자!”

“이야- 여자애들 많네! 할렘, 할렘! 같이 가자!”

언제 봤다고 모두에게 친한 척을 하고 있다. 같이 따라올 기세인 그들을 보고 여자애들이 곤란해할 거 같아서 거절하려던 희나는 입을 다물었다. 소녀들의 얼굴이 “어머, 어머, 뭐래- 쟤네.”라고 하면서도 기뻐 보였기 때문이다. 워낙 인기 많은 녀석들이니 당연한지도 몰랐다.

“드디어 꽃밭에서 밥을 먹는구나-. 신지훈도 쓸모가 있어.”

광대를 승천시키며 병태가 여자애들을 이끌고 걸으려는데 다시 뒤에서 무슨 소떼가 달려오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야- 배신남들아!”

“반장 출마하면서 커플 박멸한다고 공약 걸 땐 언제고! 이 더러운 트롤 새끼들아!”

분노한 7반 남자애들이 텍사스 소떼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잠시 아수라장이 펼쳐진 끝에, 다 같이 식사를 하기로 했다. 순식간에 여자 일곱 명에 남자만 스무 명이 붙은 남초 집단이 되었다.

거기다 걸어가면서 점점 몰려드는 바람에 결국 몇몇 아이들을 제외한 3반과 7반의 합동 런치 뷔페가 피크닉 존에 펼쳐져버렸다.

모두 함께 신나게 떠들면서 왁자지껄 도시락을 나눠 먹었다. 진혁에게서 받은 도시락은, 양도 많고 맛도 좋아서 모두의 공략 대상이 되었다. 졸지에 모두의 중심에 놓인 희나는 아주 오랜만에 많은 사람들 속에서 식사를 마쳤다.

식사 도중, 피크닉 존 앞을 지나가는 교생들 사이에 진혁이 있었다. 희나는 슬그머니 휴대폰을 꺼내 저를 보고 미소 지으며 지나가는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따 채널 결정권 주는 거 잊지 마요!」

멀리서 진혁이 휴대폰을 꺼내더니 픽하고 웃는 게 보인다.

「그래. 줄 테니까 재미있게 놀아.」

「선생님, 이따 몇 시에 집에 갈 거예요?」

「출석 체크하고 바로 올라가려고. 넌?」

「나도요.」

「더 놀다가 가지 그래?」

「아르바이트해야 돼요.」

「그럼 같이 갈까?」

별 의미도 없는 말인데 「같이 갈까?」라는 말에 왠지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러죠, 뭐.」

“희나야- 뭐 해? 다 먹었으면 놀이 기구 타러 가자-.”

“그래, 좋아.”

옆에서 민지가 부르는 소리에 희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슥- 넣었다. 그리고 일어서려는데 별안간 하얀 것이 머리 위로 덮어씌워졌다.

“? 뭐야!”

“푸하하하하하하! 내가 입혔다, 내가 입혔다!”

강제로 팔이 구멍 사이로 잡아 빼진 뒤 얼굴까지 통과되었다. 희나가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니 저쪽에서 병태가 지훈에게 그라운드 기술을 먹이고 있었고 현상이 웃으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크하하하하- 솔로 부대의 승리다! 내가 부리더인 거 잊지 마라!”

“희나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지훈이 소리쳤다. 희나는 결국 ‘희나’ 티셔츠가 강제로 입혀진 채 아이들 사이로 떠밀려 들어갔다.

“이거 놔! 바보들아! 그리고 너네 그 티셔츠 빨리 벗어!”

“이왕 입은 거 기념사진이나 찍자-.”

“공대 아름이 콘셉트로! 웃기겠다-.”

“아아- 하지 마, 하지 마!”

희나는 그대로 ‘희나’ 셔츠를 입은 7반 남학생들과 강제 단체 인증 샷까지 촬영 당해야 했다. 이름이 적힌 셔츠를 입은 남학생들에 둘러싸인 예쁜 여학생을 보고 무슨 이벤트나 아이돌인 줄 알았는지 지나가며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5~60명 되는 아이들이 떼로 몰려다니면서 에버랜드를 휩쓸었다. 졸지에 그룹에 끼어 다니면서 한참 놀고 떠들던 희나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들과 함께 바보 같은 말에 웃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서 금방 네 시가 되었다.

다 같이 아슬아슬하게 뛰어 집합 장소로 가는 도중에 병태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야- 출첵 끝나면 여자 반 남자 반 다 같이 서울 가서 노래방 가자!”

“워어어어어어- 콜!”

야외에 나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사이 청춘의 씨앗도 싹을 틔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벌써 뒤쪽에는 은근히 전화번호를 교환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남녀공학임에도 남자 반과 여자 반이 갈려 메리트를 누리지 못했던 아이들은 일사분란하게 대동단결했다.

“희나야- 너도 갈 거지?”

바로 옆으로 다가온 지훈의 물음에 희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난 못 가. 아르바이트해야 돼.”

“에엑? 네가 안 가면 어떻게 해-.”

“못 가. 그보다 너희들 이제 서울 갈 거니까 옷 좀 갈아입어-!”

“싫어. 우리 다 입고 갈 거야.”

이름 위에 매직으로 ‘천호고등학교’라고 쓴 애들도 있고, 거기다 한술 더 뜨는 녀석들도 있었다.

“등 번호로 주희나 전번 하나씩 적을까?”

“하지 마-!”

희나가 소리를 빽 지르고 셔츠들을 잡아끌었지만 다들 웃으면서 도망가 버렸다. 씩씩거리고 있는 희나에게 지훈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지금 같이 갈래? 내가 데려다줄게.”

“너 노래방 가야지. 난 알아서 가면 돼.”

“아르바이트하는 데까지 데려다주고 나서 가지 뭐.”

“아냐. 버스에서 좀 잘래.”

진혁과 간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 희나는 그렇게 변명했다. 장거리라 바이크가 불편하다는 걸 생각한 지훈은 더 권하지 않았다. 이것저것 생각해주는데 자꾸 거절만 하는 것 같아 조금 미안해진 희나가 작게 덧붙였다.

“미안. 나 신경 쓰지 말고 재미있게 놀아…….”

“헤헤. 그래. 연락할게. 나 바람 절대 안 피울 테니까 걱정 마.”

“제발 피우길 바래.”

입술을 앙다문 희나의 볼을 또 꼬집으며 지훈이 씩 웃었다.

“오늘 재미있었어. 너랑 이렇게 웃고 떠드니까 좋다.”

희나는 잠깐 눈을 도록도록 굴리다가 얼굴을 붉히며 나직이 동의했다.

“나도.”

“진짜? 그러면 이거 두 번째 데이트였던 거로 칠까?”

“절대 안 돼-!”

두 번째 데이트 이후에 키스하겠다고 했던 말을 상기하며 희나는 강력 거부했다.

그래도 지훈은 기분이 좋은지 밝게 웃으면서 희나의 모자 위를 살짝 쓰다듬었다. 그러고 나서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의 재촉을 받고 손을 흔들며 다 같이 에버랜드를 나갔다.

희나는 잠시 멈춰 선 채 신나게 나가고 있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고 어딘가로 걷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다 노래방 간다고 우르르 나갔기 때문에 주차장보다 에버랜드 안이 더 안전할 것 같아서 안에서 진혁과 합류하기로 했다. 아직 학생들이 남아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사람이 적을 것 같은 동물원 이벤트 홀 앞에서 희나는 진혁을 만났다.

씁쓸하던 기분은 인파 속에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걸어오는 그를 보니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오늘 잘 놀았어?”

“고생만 잔뜩 했어요.”

“하하하. 애들에게 둘러싸여서 인기 좋던데-. 그렇게 오기 싫어하더니 팬클럽까지 생기고.”

“팬클럽은 무슨 팬클럽이에요. 이지메지, 그게!”

희나가 볼을 부풀리자 그는 소리 내서 웃었다. 희나는 진혁이 들고 있는 에버랜드 가이드 맵을 슬쩍 뺏어 들고는 물었다.

“선생님은요? 놀이 기구는 좀 탔어요?”

“어, 몇 개 정도는.”

“심 선생님이랑요?”

“교생들 다 같이 다녔지. 너는 좀 탔어?”

둘이서만 있지 않았다는 걸 은근히 내색하며 진혁이 되물었다. 희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애들한테 붙잡혀서 별로 못 탔어요.”

“뭐 타고 싶은 거 있어?”

“별로요. 유치하고.”

“글쎄, 유치한가?”

진혁이 희나의 손에 들려 있는 에버랜드 가이드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조금 있으면 여기서 퍼레이드 하네. 퍼레이드 좋아해?”

“글쎄요. 본 적은 없지만. 뭐 그냥 인형들 지나가는 거 아니에요?”

“무슨 30년 전 퍼레이드 얘기하는 거야.”

희나가 고개를 갸웃하자 진혁이 물었다.

“보고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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