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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32화 (32/140)

32화. 불타는 현장 체험 학습 (2)

몇 가지 공지사항을 전달한 뒤 맨 앞에서 2학년 부장인 5반 담임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럼 오늘 하루 재미있게 놀고 오후 네 시에 한 번 더 인원 점검할 거니까 여기로 꼭 모이세요-! 만약에 먼저 귀가할 거면 선생님에게 꼭 말하고 가세요!”

그리고 줄 앞에서부터 명단이 적힌 A4용지를 든 진혁이 차례로 출석 체크를 하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희나의 앞에 오자 빙긋 웃고는 뭔가를 슬쩍 건네주었다. 보니 에버랜드 자유 이용권이었다. 굳이 받을 생각이 없었지만 길게 이야기하면 이목을 끌 거 같아서 희나는 묵묵히 자유 이용권을 받아 들었다.

그렇게 간단한 출석 체크가 끝나자 바로 해산되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지훈이 다가왔다. 희나가 도망치려고 하자 지훈이 항복하듯 손을 들며 말했다.

“잠깐만- 잠깐! 도망가지 마-. 휴전 신청!”

“뭐야? 이쪽으로 오지 마!”

희나가 경계를 풀지 않고 가까이 오지 못하게 슬금슬금 물러나자 지훈은 손에 들고 있던 티셔츠를 옆에 서 있던 아무나에게 건네주고는 빈손을 보이며 말했다.

“자, 티셔츠 없어. 나랑 협상하자, 협상-! 안 입힐 테니까.”

“무슨 협상?”

티셔츠가 없어진 지훈을 겁낼 필요는 없었기에 희나는 그가 다가오도록 내버려두었다. 지훈은 손에 들고 있던 에버랜드 전단지를 내밀며 말했다.

“안 입히는 대신 나랑 커플 콘테스트 나가자-.”

“절대 싫어!”

전단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희나는 딱 잘라 거절했다.

“그러지 말고 나가자-! 내가 우승시켜줄게! 상품도 다 너 가져.”

“필요 없어. 우리 커플도 아닌데 무슨 커플 콘테스트야!”

희나는 거부하며 성큼성큼 걸어서 게이트를 통해 에버랜드 안으로 입장했다. 하지만 지훈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따라오며 졸라댔다.

현상과 병태가 둘의 대화를 훔쳐 듣더니 지훈의 얼굴을 밀어내며 말했다.

“야, 신지훈-! 누구 맘대로 협상이야! 우린 동의한 적 없어! 그건 니놈만 좋은 거잖아!”

“그래, 무슨 헛소리야-. 포기할 생각 없거든? 무조건 입히고 너네는 내 꼬붕 삼아야겠어-.”

그러더니 둘이 희나 쪽으로 이글거리는 시선을 휙 돌렸다. 희나가 흠칫해서 물러나자 지훈이 두 사람의 팔을 잡아 붙들며 다시 제안했다.

“내가 얘네들도 못 입히게 막아줄게. 응? 희나야- 나가자!”

이번 제안에는 살짝 흔들렸다. 그녀가 커플 콘테스트와 ‘희나’ 티셔츠 중 어느 쪽이 더 쪽 팔린지 머리를 굴리며 계산하고 있을 때였다.

“지훈아, 여기서 뭐 해?”

뒤쪽에서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나가 고개를 돌려 보니 교생 여섯 명이 다 같이 걸어오고 있었다.

일행의 맨 앞에 서서 말을 거는 재연에게 지훈이 타깃을 돌려서 헬프를 요청했다.

“선생님, 희나랑 커플 콘테스트 나가고 싶어요! 나가게 도와주세요-.”

그 말을 듣고 진혁이 입가를 가리며 웃기 시작했다. 희나는 지훈의 다리를 가볍게 차며 낮게 쏘아붙였다.

“이상한 말 하지 마!”

그러나 지훈은 희나가 거들떠보지도 않던 전단지를 들고 가 재연에게 넘겨주었다.

“뭐야- 불타는 커플 페스티벌? 어머, 재미있겠다. 나 이런 거 좋아하는데.”

제목만 듣고 희나는 움찔했지만 재연은 신나는 말투였다. 지훈이 반색했다.

“그래요? 선생님도 나가요~ 그럼.”

“그럴까? 하지만 누구랑 나가-. 지훈이 거절당했으니 같이 나갈래?”

희나는 속으로 반색했으나 지훈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에이- 안 되죠. 전 희나랑 나갈 거예요. 선생님들은 안 나가세요? 아, 맞다!”

지훈이 진혁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진혁 샘이랑 나가면 되잖아요-. 두 분 사이 엄청 좋아 보이던데.”

어쩐지 조금 가시가 있는 듯한 말투였다. 주차장에서 희나와 친근해 보였던 걸 마음에 두고 있는지도 몰랐다. 도발적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지훈을 보면서 진혁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나랑 나가면 심 선생님이 불편하실 거 같은데요.”

“아니에요-. 재연 샘도 괜찮죠?”

“어, 뭐, 나야 괜찮은데. 하고 싶기도 하고.”

얼굴을 발그레하게 물들이면서 은근히 기대하는 것이 그대로 보여 희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저런 식으로 나오면 바보 둔탱이의 대답은 당연히…….

“네, 그러시면 저도 괜찮습니다만…….”

“어머, 정말요? 그럼 나가요-.”

“와- 심 선생님이랑 유 선생님 사이 너무 좋은 거 아니에요?”

예상대로의 대답이 진혁에게서 나오자 주변이 떠들썩해졌다. 대놓고 좋아하는 재연을 보면서 희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지훈은 다시 희나를 설득했다.

“자- 그럼 우리도 나가는 거다! 알았지? 그러자!”

저들이 나간다고 굳이 자신도 나가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지만 왠지 오기가 생긴 희나는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기뻐서 날뛰는 지훈의 옆에서 오만상을 찌푸리며 병태가 현상에게 말했다.

“아, 눈꼴시다- 민현상! 우리도 나가자!”

“우리가 나가긴 왜 나가! 너랑 나가기 싫어, 멍청아!”

“남남 커플도 된다고 써 있잖아! 커플 따위가 우승해서 상품 받는 꼴을 눈뜨고 볼 거야?”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못 보지! 나가자!”

단순하기 짝이 없는 사고 과정을 거쳐 두 사람도 참가를 결정했다. 그래서 그대로 분위기가 흘러가 이벤트 스테이지로 가서 결국 접수를 해버렸다.

이벤트는 하루 동안 네 번이 있었는데 그중 바로 시작하는 오전 타임에 나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오전 타임이 제일 사람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접수는 선착순이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마감되었다. 30여 커플이 사회자의 진행에 따라 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무대로 올라가기 직전, 어떤 광경을 목격하고 희나는 경악해 버렸다.

“뭐야- 왜 너네가 그걸 입고 있어!”

“우리가 나눠 줬어-. 정신 공격 전법이라고.”

희나가 소리치며 가리킨 곳에는 ‘희나’ 티셔츠를 입은 7반 남자 열다섯 명이 있었다.

현상과 병태가 웃으며 ‘V’를 날렸고 창피와 분노로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는 희나의 뒤에서 진혁이 얼굴을 가리고 웃고 있었다.

시작도 하기 전부터 참가하기로 한 것에 대한 후회가 막심했으나 도망가지도 못한 채 희나는 무대로 이끌려 올라가야 했다.

그대로 바로 이벤트가 시작되어 간단한 인사말 후에 말이 청산유수 같은 사회자가 한 커플 한 커플 간략하게 소개하며 넘어왔다. 대부분 이름과 나이, 한마디 정도씩만 묻고 지나갔지만, 눈에 띄는 참가자에게는 말을 좀 더 시키는 느낌이었다.

“두 분이 교생이시라구요-? 어떻게 사귀게 되셨나요?”

그 인터뷰에 진혁과 재연이 걸려들었다. 어느새 모여들었는지 무대 앞에 같은 학교 학생들이 잔뜩 있었다. 진혁의 팬으로 보이는 여자애들이 야유를 보냈다.

“아뇨, 사귀는 사이가 아닙니다.”

“오- 그런가요? 제가 보기엔 심상치 않은 것 같아 보이는데요.”

사회자는 웃으며 몰아가려고 했으나 예능감이라고는 없는 진혁은 성실하게 아니라고 변명을 할 뿐이었다. 본인은 나름대로 재연이 오해받지 않도록 배려하는 모양이었는데, 그가 부정할수록 재연의 표정은 더 썩어 가고 있었다.

희나는 관심 없는 척 딴 데를 보면서 속으로 빙그레 웃었다.

바로 다음, 사회자의 눈이 희나 커플을 발견했다.

“이야- 여기는 고등학생 얼짱 커플이군요-.”

“네. 저희는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희나가 지훈을 꼬집자 사회자가 마구 웃었다. 60명이나 되는 인원이 다 같이 올라왔으니 묻어 갈 수도 있었을 텐데, 쓸데없이 이목을 끄는 것이 싫었다.

그러나 지훈이 아니더라도, 이름을 말한 순간 저 ‘희나’ 티셔츠 군단들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방해하려고 입은 주제에 다 같이 목청을 높여서 “주희나! 주희나!” 하고 외치는 덕에 무슨 친위대처럼 보였다. 사회자는 웃고 희나는 멘탈에 지극한 내상을 입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 커플 병태와 현상이 방점을 찍었다.

“우리는 저 커플을 타도하러 나왔습니다. 우리가 우승하겠습니다!”

“특히 저 녀석은 무조건 이길 거예요! 배신자 자식!”

“아-, ‘상’과 ‘병’을 ‘신’이 배신했군요! 그 맘 이해합니다! 파이팅하세요!”

두 사람의 강력한 출사표를 들은 사회자는 둘의 티셔츠를 보고 배를 잡고 웃더니 두 사람을 응원해주었다.

“볼거리가 풍부하네요! 스승 대 제자의 대결, 그리고 무적의 솔로 부대의 선전을 기원하겠습니다. 그럼 종목을 발표하겠습니다!”

종목을 듣자마자 희나의 얼굴에는 다소 안도의 미소가, 그리고 지훈의 얼굴엔 실망의 기운이 떠올랐다.

“불타는 사랑의 식신! 둘이서 번갈아가면서 앞에 놓인 엄청나게 매운 떡볶이를 가장 빨리 드시는 팀이 우승합니다. 많이 드실수록 사랑하는 애인이 적게 먹게 되니 얼마나 고통을 참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냥 떡볶이만 먹으면 되는 거라면 부끄러울 것도 없다. 그때 희나의 옆에서 지훈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뭐야-. 이런 걸 바란 게 아닌데! 뭐 안고 오래 버티기나, 막대 과자 먹기, 몸에 바른 우유 핥아먹기 이런 걸 해야 하는 거 아냐?”

“그따위 종목이면 기권할 거야!”

“하아, 어쨌든 내가 먼저 할게. 내가 다 먹으면 되겠지.”

지훈은 김이 빠졌는지 터덜터덜 떡볶이 앞으로 다가갔다. 다 먹을 때까지 물을 먹지 못하는 조건이었으므로 번갈아 먹는다면 먼저 먹는 사람이 오래 참아야 한다. 희나는 뒤쪽에 선 채 지훈이 이기기를 기대하기로 했다.

곧 게임이 시작되고 지훈은 넘치는 패기로 떡볶이를 다섯 개씩 한꺼번에 입에 넣었다. 그리고 3초도 되지 않아 입에서 불을 뿜으며 좌절하기 시작했다.

“아- 매워 죽어버릴 거 같아. 뭐 이런 걸 시켜!”

“그러게! 이런 거 커플 아니어도 상관없잖아?”

사방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들이 새어 나오는 걸 보니 진짜 맵긴 매운 모양이었다.

희나가 힐끔 돌아보니 저쪽에서 진혁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진혁의 집에서 해 준 음식들 중에 매운 건 하나도 없었다. 잘 먹을 리가 없었다.

“바보야, 내가 먹고 말지! 이리 줘!”

끔찍할 정도로 못 먹는 지훈을 보고 희나는 떡볶이를 빼앗아 들었다. 어차피 나온 거 상품이라도 받자는 생각이었다.

옆에서도 진혁 대신 재연이 나와서 떡볶이를 먹고 있었다. 그녀에게 지기 싫어서 매운 맛이라기보다는 거의 고문에 가까운 맛의 떡볶이를 이를 악물고 먹었다.

간단한 게임이었기 때문에 결과는 금방 나왔다. 1등은 아주 압도적으로 유일한 남남 커플이었던 현상과 병태가 차지했다. 5등까지 시상했지만 희나와 지훈은 순위에 들지 못했는데, 아주 의외로 진혁 커플이 3위로 입상했다.

진혁은 거의 먹지도 못했으니 온전히 재연의 공인 것이다.

다음 이벤트들도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상품 전달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나가기 싫었던 콘테스트에 나가서 입상도 못 하니 희나는 우울해져서 터덜터덜 무대를 걸어 내려왔다. 그러자 같은 학교 학생들이 신기해서인지 그들에게 우르르 몰려들었다.

“너 매운 거 잘 먹더라-.”

“아까웠어, 아까웠어-. 우리가 응원도 열라 했는데-.”

“선생님, 진짜 쩔어요! 매운 거 엄청 잘 드시네요!”

평소 거의 말도 안 하고 아웃사이더나 다름없는 희나는 아이들이 몰려들어 주변을 둘러싸고 한마디씩 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위로해주는데도 뭐라 말도 못 하고 난감해하고 있는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야- 주희나. 이거나 가져가라-!”

돌아보니 병태가 1등상으로 받은 완전 큰 롤리팝과 에버랜드 마스코트 인형을 내밀고 있었다.

“그걸 왜 나를 줘.”

“우린 연간 회원권만 챙기면 돼. 너 가져.”

“난 이런 거 필요 없어……. 둘 데도 없단 말이야.”

희나가 말했지만 병태는 막무가내로 안겨 주었다. 뒤에 있는 지훈의 표정을 보고 희나는 그가 그러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아무래도 우겨서 나갔는데 아무 상품도 받지 못한 것이 미안해서 병태에게 상품을 주라고 부탁한 모양이었다.

“와- 완전 귀여워.”

“인형 완전 예쁘다.”

주변에 둘러서 있던 여자애들이 ‘꺄-’ 하며 말했다. 대여섯 명의 얌전한 아이들인데, 희나와 같은 반이었지만 여태까지 한 번도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다들 언제 벌써 샀는지 머리에 고양이 귀 같은 헤어밴드들을 쓰고 있었다.

귀여운 걸 좋아하는 애들이라면 인형을 좋아하는 게 당연하다. 희나는 부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는 여자애 하나에게 인형을 슥 내밀었다.

“가지고 싶으면 가져.”

그 말을 듣자 그 아이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 차올랐다.

“정말? 가져도 돼?”

“그래. 난 필요 없어.”

“꺄- 민지야, 부럽다!”

호들갑을 떠는 다른 여자애에게 희나는 롤리팝도 넘겨주었다. 단걸 좋아하지만 이런 귀엽고 크기만 한 사탕이 맛있을 거 같지는 않아서였다.

희나가 상품을 건네주고 아이들 무리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던 때였다.

“아, 진혁 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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