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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31화 (31/140)

31화. 불타는 현장 체험 학습 (1)

“선생님, 나 좋아해요?”

낭랑한 목소리로 묻자 진혁이 갑자기 사레 든 듯 격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간신히 핸들을 사수한 진혁은 기침이 사그라들자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꼬맹이가 못 하는 말이 없어!”

기침을 해서인지 그의 흰 얼굴은 목까지 붉어져 있었다. 그러나 단호하게 애 취급을 하면서도 희나 쪽은 쳐다보지도 못한다.

희나는 슬쩍 진혁 쪽으로 얼굴을 기울여 다가가며 물었다.

“맞는 거 같은데?”

“……이상한 말 좀 하지 마.”

“선생님 그거 내가 쓴 줄 알았죠? 우리 주유소에 아르바이트하는 여자애 나밖에 없어요-.”

“…….”

“나 처음 봤을 때도 예쁘다고 했잖아. 말해봐요-.”

“…….”

“왜 대답 못 해요? 다 들킬 거짓말 생각하시나?”

희나는 킥킥 웃으면서 진혁의 얼굴 근처로 제 얼굴을 바짝 가져갔다. 진혁은 더운 듯 잔뜩 빨개진 얼굴을 살짝 부채질하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땐 대학생인 줄 알았어. 알고 나서는 잊어버려서 안 버린 거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하는 고백에 순간 희나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희나는 왠지 자꾸 웃음이 나와 씰룩거리는 볼을 가리려고 괜히 머리카락을 만지는 척했다

“지금은 그런 거 없어. 아직 어린 애한테 그런 생각 안 해.”

잦아들어 가던 아까의 목소리와 달리 지금은 또렷한 목소리였다.

자꾸 올라가던 희나의 입술이 움직임을 멈췄다. 희나는 만지작거리던 머리카락 끝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만약에…… 내가 어른이면요?”

그러자 진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늘 부드러운 표정의 얼굴은 뭔가 굳은 결의 같은 걸로 마음을 다잡기라도 한 듯 딱딱해져 있었다.

“바보야, 이제 이런 얘긴 그만해.”

“누가 바보라는 거예요?”

“그만해, 진짜로. 화낼 거야.”

하나도 안 무서운데 갑자기 어른인 척할 때마다 화가 난다.

희나는 삐져서 창가에 턱을 괴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도착할 때까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차가 막히지 않아서 출발한 지 한 시간쯤 지나니 에버랜드 주차장에 도착했다. 진혁은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쓰는 듯 집합 장소 바로 앞에 있는 주차장 대신에 멀찍이 떨어진 진입로 근처에 차를 세웠다.

계속 토라져 있던 희나는 차가 멈추자마자 내려서 쌩 가버리려고 했지만 진혁이 뒤에서 불렀다.

“희나야, 잠깐만.”

“왜요-?”

“이거 점심으로 먹어.”

진혁이 뒷좌석에서 아까 들고 탄 쇼핑백을 꺼내 내밀며 말했다.

“선생님이 도시락 싼 거예요?”

“그럴 리가. 주문한 거야.”

쇼핑백의 안을 들여다본 희나는 찬합의 크기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가 이렇게 커요?”

“교생들끼리 나눠 먹는다고 해서 좀 넉넉히 주문했어. 꽤 맛있을 테니까 가져가서 먹어.”

“하나밖에 없잖아요.”

“난 사 먹으면 되니까 괜찮아.”

“그럼 크니까…….”

희나는 뒷말을 삼켰다. 언제 어디서 학교 사람들을 마주칠지 모르는데 둘이서 같이 먹는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녀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진혁이 미소 지었다.

“신경 쓰지 마. 굶을 일이야 없겠지.”

“흠, 하긴 어차피 좋은 거 많이 받을 테니까. 먹어주죠 뭐.”

인기도 어마어마하게 많은데 굶을 리가 없다. 선심 쓰는 듯한 희나의 말에 진혁이 킥킥 웃었다.

“그래, 고맙네. 그럼 가자-.”

둘이 출발하려는 때였다. 멀리 뒤쪽에서 바이크의 굉음이 들렸다. 희나가 움찔해서 돌아보니 세 대의 바이크가 주차장 쪽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희나는 순간적으로 지훈이네 팸이라는 직감이 왔다.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속도가 너무 빨라 몸을 숨길 새도 없었다. 바이크들은 빠른 속도로 둘을 지나쳐서 가는 듯했다. 잠시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희나는 가운데 있던 검정 바이크가 급선회해서 이쪽을 향하자 심장이 다시 철컹했다.

불안한 예감대로 바이크를 둘의 앞에 대고 헬멧을 벗은 사람은 지훈이었다.

“희나야- 안녕~! 어?”

신나게 웃으며 인사를 하던 지훈의 얼굴이 딱 멈췄다. 슈트 대신 캐주얼한 옷을 입고 있어서 옆에 서 있는 사람이 진혁인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

“샘이랑 둘이 같이 온 거야?”

인사성 밝은 지훈이 진혁에게 인사도 없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거짓말 못 하는 진혁을 대신해 희나가 잽싸게 말했다.

“같이 오기는……. 저 앞에서 만났어-.”

희나의 대답에도 지훈은 경계하는 표정으로 조금 더 큰 진혁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일찍 올 거였으면 같이 오지.”

“일단 왔으니까 이제 같이 다니면 되잖아.”

지훈의 경계심을 풀려고 희나는 평소보다 좀 더 붙임성 있게 말했다. 희나의 그런 태도에 지훈도 조금 누그러진 듯했다.

“가자, 얼른.”

“어, 그래.”

지훈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이 되었다. 매표소까진 좀 머니 바이크를 타고 가야 하는데 진혁이 있어서 곤란한 모양이었다. 희나가 지훈을 먼저 보낸 뒤 매표소 앞에서 합류하자 하려는데 진혁이 선뜻 먼저 말을 꺼냈다.

“둘이 같이 타고 가도 돼. 3반 출석 체크 하는 데서 보자.”

“아직 한참인데 혼자 걸어가게요?”

“신경 쓰지 마. 그럼 재미있게 놀아요-.”

진혁은 태연하게 지훈에게로 희나를 밀어주고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사라져 갔다.

그 뒷모습이 왠지 얄미워 희나는 바보 둔탱이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혀를 베- 내밀어 보이고는 지훈에게로 돌아섰다.

그런데 지훈이 언제나처럼 희나를 보고 실실 웃는 대신 뭔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진혁을 보고 있었다.

“왜 그래?”

“저 선생님, 너한테만 반말하네?”

“……우리 반 담당이니까 그렇지. 빨리 가자.”

예리한 지훈의 지적에 찔끔했지만 희나는 대충 얼버무리고 뒷좌석에 올라탔다. 지훈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바이크를 출발시켰다.

매표소 근처 후미진 그늘 아래 세 대의 바이크가 세워졌다. 내리자마자 지훈은 뒤에 묶어둔 가방에서 모자를 꺼내 희나에게 푹 눌러 씌웠다. 본 적이 있는 디자인이었기에 희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이거?”

지훈과 코엑스에 갔을 때 샀던 그 모자였다. 그런데 지훈이 산 건 노란 챙이었는데 이건 핑크색이다. 그때 지훈이 사 준 모자는 집에 두고 왔기 때문에 어리둥절해진 희나에게 지훈이 씩 웃으며 말했다.

“마음에 들어서 다음에 가서 색깔 별로 샀어. 네가 안 쓰고 올 거 같아서 챙겨 왔지-.”

이런 비싼 모자를 색깔 별로 사다니. 부르주아적 발상에 왠지 거리감이 느껴져 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듯 지훈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헬멧을 벗었다. 헬멧 안에 같은 디자인의 파란 챙 모자를 쓰고 있었다.

“둘이 처음 유원지 오는데 커플 모자 정도는 써야지.”

“누가 커플이야?”

틱틱대면서도 희나는 모자를 벗지는 않았다. 아침인데도 벌써부터 날이 아주 맑은 게 낮이 되면 매우 더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훈은 희나의 앞에서 장난스럽게 이런저런 포즈를 취하며 말했다.

“어때? 나 오늘 사복 간지 보여주려고 신경 썼어-.”

그러고 보니 평소에도 화려하지만 유독 더 화려하다. 지훈의 갈기갈기 찢어져 반바지나 다름없는 바지와 고양이가 시공간을 넘어 날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림이 박힌 현란한 후드를 보고 희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보통 사람이 입으면 완전 꼴불견일 거 같은데 지훈은 패셔너블해 보인다.

학교에는 작은 피어싱만 하고 다녀서 몰랐는데 귀에 한 커다란 피어싱 하나가 굉장히 눈에 띈다. 교복 칼라에 가려져 있던 목덜미의 문신도.

“그리고 그중에서도 제일 포인트는 이거지.”

쳐다보고 있는 희나의 앞에서 지훈이 천천히 후드의 지퍼를 지익 내렸다. 그 속에는 궁서체로 ‘신’ 이라고 프린트가 된 티셔츠가 있었다.

보자마자 희나는 그것이 어제 셋이서 공모하던 ‘상병신’ 티셔츠라는 것을 깨달았다. 겨우 하루 만에 저런 옷을 맞춰 입고 오다니 대단한 실행력이다.

희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부끄러우니까 가까이 오지 마.”

“네 것도 있어-.”

희나의 인상이 구겨졌다. 지훈은 활짝 웃으며 궁서체로 ‘희나’라고 적힌 셔츠를 시트 박스에서 꺼내 들었다. 한 글자도 아니고 풀 네임이 적힌 티셔츠를 본 희나의 얼굴은 더욱 사색이 되었다.

“네 이름 글자는 라임이 안 맞아서 이름으로 만들어 왔어.”

라임이 맞든 안 맞든 희나는 절대 입을 생각이 없었다. 저 셔츠를 입고 다 같이 다니면 ‘상병신 희나’ 혹은 ‘희나 상병신’이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처참하게 꼴사납다. 그동안 학교에서 그렇게 싸가지 없게 굴었는데 얼마나 비웃을지 상상만 해도 이불 킥을 하고 싶어진다.

“안 입어, 그런 거! 가까이 오지 마!”

“흐흐흐-. 넌 어차피 도망 못 가.”

희나가 웃으며 걸어오는 지훈에게서 도망치려고 뒤를 돌자 반대쪽 방향에 현상과 병태가 보였다.

그런데 그 둘도 어쩐지 음흉하게 웃으며 손을 뒤로 감춘 채 걸어오고 있었다. 셋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희나를 보고 낄낄 웃으며 감추고 있던 것을 꺼내 들었다.

뭔가 하고 쳐다보던 희나의 큰 눈이 찌푸려졌다. 두 사람의 손에도 ‘희나’라고 적힌 흉악한 궁서체 티셔츠가 들려 있었다.

“뭐야! 그딴 걸 왜 다 가지고 있어!”

“어제 맞춤 셔츠 최소 수량이 20벌이래서 왕창 찍는 김에 내기했다. 너한테 이거 먼저 입히는 사람이 상병신 리더 하기로 말야.”

“왜 나를 두고 그런 내기를 해?”

“왜냐면 졸라 개 재미있을 거 같으니까!”

셋은 사악하게 웃으면서 삼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런 이상한 리더 누가 되든 내가 알 게 뭐야-! 절대 안 입어!”

희나가 격하게 반발했지만 세 사람은 점점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다.

“너에겐 중요하지 않지만 우리에겐 아니란다. 자, 괜찮아. 처음이 힘들지- 일단 끝나면 체념하게 될 거야.”

“오빠가 잘해줄게-. 이리 와, 이쁜아.”

“난 여자애들은 헐벗은 게 좋지만 오늘은 입히겠어. 주희나, 이리 와-.”

“저리 가, 바보 변태들아!”

소리를 지르며 희나는 마구 줄행랑을 놓았다. 뒤질세라 나머지 셋도 마귀같이 웃으며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희나는 숨이 차도록 열심히 달렸지만 놀리려는 건지 세 녀석들은 전력으로 따라오지 않았다. 느물느물 웃으면서 멀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달리는 폼이 아무래도 느긋하게 그녀의 반항을 즐길 셈인 것 같았다. 그들을 보며 희나는 이를 악물었다.

‘애들이랑 노는 게 좋긴 뭐가 좋다는 거야-! 현장학습 같은 거 괜히 따라왔어!’

후회를 거듭하며 희나는 멀리 보이는 매표소를 향해 전력 질주를 했다.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면서.

지훈들과 투탁거리며 달리는 바람에 희나는 조금 늦게 집합 장소에 도착했다. 이미 도착한 아이들이 반별로 나뉘어 있었는데 딱히 반 순서대로 서 있는 게 아닌지 남자 반과 여자 반이 섞여 있었다.

하필 3반과 7반은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바로 옆줄에 서서 웃으며 쳐다보는 지훈들을 억지로 무시하고 희나는 맨 뒤로 가서 섰다.

3반의 맨 앞에는 진혁이 서 있었다. 슈트 대신 운동화에 진, 그리고 후드 집업을 입으니 선생이라기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대학생처럼 보인다.

키가 크고 체형이 좋아서인지 지훈처럼 패셔니스타 분위기는 아니어도 묘하게 스타일이 좋다. 애들이 발그레한 얼굴로 쳐다보면서 소곤거리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진혁의 옆 7반 줄 앞엔 재연이 나란히 서 있었다.

평소 늘 입고 다니는 아나운서 스타일의 정장 대신 원피스를 입으니 노숙해 보이던 평소보다 풋풋해 보였다. 꽤 오래 걸어야 할 텐데 운동화 대신 부츠를 신고 아주 세련되게 화장을 한 채 서 있었다.

둘이 계속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웃는 것이 사이좋은 대학생 커플처럼 보인다. 희나는 그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심드렁하게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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