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남자, 소년, 그리고 친구 (3)
그의 민망해하는 반응을 본 희나가 배를 잡고 웃었다.
“난 성인이고- 가끔씩 그 정도는 볼 수도 있지!”
“가끔씩? 아까 청소하라고 해서 하다가 소파 밑에 맥심 있는 것도 봤어요. 꽤 많던데……. 가슴 큰 여자가 모델인 달만 사셨더군요.”
그러면서 희나가 소파 밑의 수납함을 잡아당겨 안에 있는 맥심 잡지를 하나 꺼내자 진혁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건 왜 꺼내-?”
“맥심은 고등학생도 봐도 되죠? 선생님 다큐멘터리 보면 난 옆에서 이거나 볼래요.”
“맘대로 해.”
희나가 놀릴 생각이란 걸 깨달은 진혁이 쿨한 척 고개를 휙 돌렸다. 당당하게 나갈 생각인 거 같지만 얼굴이 빨개서야 영 각이 안 나온다.
다시 애써 〈세계의 비행기 사고〉에 집중하려는 진혁 옆에서 희나는 보란 듯이 잡지를 펼치며 종알거렸다.
“오- 이 페이지가 유난히 잘 펼쳐지네요. 거의 접혔네……. 이 사진이 좋으신가 봐요.”
특정 부위가 풍만한 비키니 화보를 내밀며 말했지만 진혁은 얼굴을 붉히면서도 꿋꿋이 시선을 화면에 둔 채 버텼다.
시각 공격이 안 먹힌다고 물러설 희나가 아니었다. 희나는 페이지를 팔락팔락 넘기다가 청각 공격에 유용한 페이지를 찾아 낭독을 시작했다.
“<육식녀의 먹이가 되는 법, 초식남의 목덜미를 노리는 섹시 적극녀를 역사냥하는 노하우 전수> 이거 선생님한테 좀 도움이 될 만한 특집 기사네요-. 제가 읽어 드릴까요? 서울 K구에 사는 Y모씨는 요즘 관계 가뭄에…….”
결국 버티다 못한 진혁이 백기를 들었다. 그는 리모컨을 희나에게 넘겨주고 힘없이 말했다.
“……TV 봐. 난 게임이나 하러 갈래.”
수치플레이에 당해 터덜터덜 방으로 돌아가는 진혁을 보고 희나는 배를 잡고 웃었다.
소파에 기대서 마음대로 채널을 선택하며 승자의 기쁨을 잠시 누렸으나 10분쯤 지나자 그녀도 따분해졌다.
“선생님 나 심심해요-.”
“……그럼 자. 12시가 넘었어.”
희나가 진혁의 방에 고개를 비죽 디밀고 말하자 진혁이 그쪽은 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게임한다더니 침대에 누워 책을 보고 있었다. 희나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내밀어 눈빛 공격을 날리자 좀 버티던 진혁이 책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바라는 게 뭐야?”
“같이 TV 봐요.”
“마음대로 보라고 리모컨 줬잖아. 난 예능 프로 별로 안 봐.”
희나가 그래도 가지 않고 커다란 눈으로 쳐다보자 진혁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읽고 있던 책을 집어 들고 거실로 나왔다.
소파에 자리 잡고 앉은 진혁은 책을 읽기 시작했다. 희나는 슬금슬금 몸을 내밀어서 진혁의 무릎을 베고 소파에 벌렁 누웠다. 그러곤 진혁이 당황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자 마주 올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미치겠네- 정말.”
곤란하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진혁도 그녀의 얼굴을 밀어내지 않은 채 다시 책으로 어색하게 시선을 떨궜다. 희나는 만족스러운 듯 웃으면서 진혁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TV 프로를 보았다. 프로는 딱히 재미있지도 없지도 않았지만 왠지 기분이 따뜻했다.
희나는 자그마한 거실을 슬쩍 둘러보고 아까보다 조금쯤 시원해진 집 안의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막연하게 이런 게 ‘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
“그럼 갈까?”
진혁의 목소리에 희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른 5월 아침의 공기는 도심인데도 상쾌하게 느껴졌다. 진혁을 따라서 건물 뒤편으로 가자 작은 주차장이 있고, 거기에 하얀색 S 모델의 차가 있었다.
희나는 호기심 섞인 눈초리로 차를 둘러보려 했으나 진혁은 어쩐지 서두르는 듯한 기색으로 탈 것을 권했다.
“얼른 타. 늦겠다.”
“아직 7시예요. 여유로운데요-.”
“차 막힐지도 모르니까.”
서두르는 모습이 뭔가 마음에 걸렸지만 희나는 더 말하지 않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안전벨트를 매자 차는 부드럽게 출발했다. 운전을 오래했는지 매끄러운 솜씨였다.
희나는 실시간 교통 정보를 확인하려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타이밍을 맞추기라도 한 듯 지훈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희나야- 정말 안 가? 데리러 갈 테니까 가자-.」
잠깐 뭐라고 답변할까 고민하는데 전화가 왔다.
“전화 안 받아?”
진혁이 물었다. 왠지 그의 앞에서 지훈과 통화하는 것이 꺼려져서 희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통화 거절을 슬라이드했다. 그리고 다시 전화가 오기 전에 빠른 속도로 메시지를 전송했다.
「가고 있어. 차 안이니까 전화하지 말고 이따가 만나.」
「정말? 다행이네-. 그럼 조금 있다 봐-.」
지훈이 말끝에 웃기는 이모티콘을 보내 와 희나가 픽 웃었다. 진혁이 옆에서 보고 물었다.
“지훈이야?”
희나는 멋쩍어서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는 미소를 지었다.
“사이좋네.”
“……별로 안 좋아요.”
“하하. 까칠하게 굴지 말고 친하게 지내. 너랑 잘 지내고 싶어 하는 애들 많을 거야.”
“없을걸요. 나도 별로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고.”
“그러지 마. 친구 많으면 좋지.”
달래듯 하는 진혁의 말에 희나는 퉁명스럽게 반문했다.
“좋긴 뭐가 좋아요? 귀찮기나 하지.”
“글쎄…… 애들이랑 같이 놀아 보면 알 거야. 재밌을 거야.”
“그게 뭐예요. 좋은 거 없어요.”
“음…… 그럼 이건 어때. 오늘 친구들이랑 어울려 놀면 채널 선택권을 주지.”
초등학생한테나 먹힐 법한 당근 전법이지만 사랑하는 다큐멘터리를 포기하겠다는 말이 나름 비장해서 희나는 킥킥 웃었다.
TV 채널엔 관심 없지만 다큐멘터리를 보면 진혁이 너무 몰입해서 심심하니까 못 보게 하는 게 더 재미있긴 할 것 같았다.
“한번 생각은 해보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남부순환로를 달려 사당 근처까지 왔다.
고속도로를 타기 위해 고가교 근처로 달리자 희나가 아르바이트하는 주유소가 창밖으로 휙 지나갔다. 차를 타고 이 방향으로 지나가는 건 처음이라 희나는 색다른 기분으로 주유소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아니, 기시감이라기보다 타고 있는 이 차가 어쩐지 낯이 익다.
물론 꽤 흔한 차니까 낯익은 것이 당연하지만 그 이상의 뭔가가 있는 듯하다.
신경 쓰여서 슬쩍 실내를 돌아보던 희나의 시선이 룸미러 앞에 매달려 있는 방울 인형에 꽂혔다. 한화 야구단의 마스코트 인형. 저렇게 매달려 있는 걸 본 적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앞 유리창에 붙어 있는 전화번호판도 기억에 있었다.
‘선생님 차에 타는 건 처음인데 어디서 봤지? 학교에서 봤나?’
희나가 기억을 찬찬히 더듬고 있는데 차가 멈추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서초 부근에 있는 주유소였다.
고속도로를 타기 전에 주유를 하러 들른 것이다. 진혁이 창문을 열고 다가온 아르바이트생에게 말했다.
“가득 부탁합니다.”
그 조용한 목소리에 기억이 되살아났다.
하얀 차, 한화 이글스 인형, 젊은 남자 목소리, 하얗고 긴 손.
그 키워드들을 모두 연결시키니 몇 달 전까지 토요일 새벽마다 주유를 하러 오던 차 한 대가 떠올랐다.
‘그게 선생님?’
운전석 바깥쪽을 보고 있는 진혁의 뒷모습을 보면서 희나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선생님은 날 못 알아본 걸까? 아니다. 이제 보니 아까 빨리 타라고 서두르며 초조해하던 건 내가 차를 알아볼까 봐 불안해서 그랬던 거 같다.
당장 물어보고 싶었지만 창밖에 주유소 직원이 있으니 차가 출발하면 물어보기로 했다.
희나가 초조하게 주유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진혁이 말을 걸었다.
“글러브박스 안에 하얀 봉투 좀 꺼내 줄래?”
말을 듣고 그가 말한 봉투를 찾아 진혁에게 건넸다. 봉투 속에서 주유 상품권을 꺼내 결제한 진혁은 차를 출발시키면서 한 손으로 희나에게 받은 거스름돈을 내밀었다.
“미안한데, 봉투 제자리에 돌려놓고 돈 좀 지갑에 넣어줘.”
물어볼 것이 있어 마음이 급했지만 희나는 시키는 대로 진혁의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서둘러 돈을 넣다가 그녀는 문득 카드 사이에 접힌 채 꽂혀 있는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하얀 바탕에 주유소 마크가 그려진 포스트잇. 희나의 주유소에서 쓰는 포스트잇이다.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희나는 살짝 포스트잇을 꺼낸 뒤 지갑을 돌려놓았다. 진혁은 전방을 보느라 희나가 뭘 하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슬그머니 포스트잇을 펼쳐 본 희나의 입이 헤- 벌어졌다.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쓰인 ‘방문 감사합니다’, 그리고 토끼 그림.
낯이 익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말하고 말았다.
“어? 이거?”
뭔가 하고 돌아보던 진혁이 당황하는 바람에 차가 옆 차선으로 들어갈 뻔했다.
“꺄아아악-.”
뒤차가 빵빵 소리를 내고 희나가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차는 황급하게 본래 차선으로 돌아갔다. 다시 정상 주행하기 시작했지만 진혁은 당황한 표정 그대로였다.
“선생님 우리 주유소 온 적 있죠?”
희나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진혁은 얼굴이 빨개져서 말을 더듬었다.
“아, 그게, 그렇긴 한데…….”
“뭐야, 어디서 본 것 같은 차라고 생각했더니-! 선생님 나 본 적 있을 텐데 몰랐어요? 그리고 이건 왜 가지고 있어요? 왜 간직하고 있어요?”
진혁은 뭐라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잠잠했다. 희나는 붉어진 진혁의 얼굴을 보며 커다란 눈을 찌푸렸다.
“이거 우리 주유소 사장님 사모님이 쓴 건데.”
희나의 말을 들은 진혁의 입이 놀란 듯 살짝 벌어졌다. 희나의 툴툴거림이 계속 이어졌다.
“가슴이 크고 미인이긴 하지만 선생님보다 열 살은 많을 텐데……. 성격만 아저씨 같은 줄 알았더니 취향도 유부녀 취향이었어요?”
“고등학생이 무슨 불건전한 말을 하는 거야.”
“아니면 이런 쪽지를 왜 지갑에 보관해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넣고 잊어버린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진혁은 희나의 손에서 쪽지를 빼앗아서 가방 쪽으로 휙 던졌다.
“정말 아무 의미 없어요?”
“그럼 무슨 의미가 있겠어?”
“흐응…… 사모님 애도 두 명이나 있어요.”
“그래.”
희나는 추궁을 당하면서도 안도한 듯 원래의 색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진혁의 얼굴을 수상하다는 듯이 힐끔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나 처음 봤을 때 못 알아봤어요?”
“…….”
“선생님 매주 왔잖아요.”
희나의 질문에 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희나가 뚫어지게 쳐다봤지만 일부러 대답을 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진혁의 단정한 옆얼굴을 보면서 희나는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매주 아르바이트 시작하고 얼마 안 된 시간마다 이 차와 인형을 본 거 같다. 저 포스트잇 행사할 때 와서 건네준 기억도 떠올랐다.
“맨날 차 타고 어딜 간 거예요?”
“매일 아냐. 주말에만 본가에 좀 일이 있어서.”
그러고 보니 지난 주 월요일에도 본가에 다녀왔다며 먹을 것들을 가져왔었구나.
수긍하다가 희나는 문득 어떤 사실을 떠올렸다.
사모님은 따로 직장이 있어서 평일에는 주유소에 거의 들르지 않고 주말 낮에만 주로 와서 주유소 내의 사무실에 있을 뿐인데. 매주 본가에 내려가서 월요일에 온다면 선생님은 사모님을 본 적도 없을 거야.
‘뭐야, 혹시 내가 쓴 건 줄 안 거야?’
희나의 하얀 볼이 살짝 발그레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괜히 올라가는 입꼬리를 앙다물며 진혁의 얼굴을 쳐다봤다. 아까까지 빨갛던 얼굴은 이제 원래 낯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가 헛다리를 짚고 있는 줄 알고 안심한 것이리라.
“선생님, 나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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