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남자, 소년, 그리고 친구 (2)
“뭐?”
셋이 동시에 돌아보아서 희나는 움찔했다.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모습이 화난 건가- 하고 불안해졌는데 곧 세 사람 입에서 신나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햐햐햐햐학! 상병신이래!”
“아- 졸라 개웃겨!”
“그거 개쩐다. 좋아, 우린 오늘부터 상병신이다.”
저런 작명에 희열을 느껴 뒤집어지는 그들을 보며 희나는 남고생의 뇌구조에 대해서 거리감을 느꼈다. 아니 남고생이 아니라 쟤네가 그냥 저런 건가.
‘그래, 잘 어울리네…….’
이제 각 잡고 걸터앉아서 상병신 주제가까지 만들고 있는 그들에게 희나는 “갈게-.” 하고 조용히 인사하고 옥상 문을 잡았다. 종 칠 시간이 됐는데 안 내려갈 건지 셋은 벙글벙글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희나야, 이따 봐! 카톡 할게-.”
“잘 가- 주희나. 작명 고맙다! 내일 에버랜드에 네 티셔츠도 만들어 가마.”
“필요 없어!”
“이제 너도 상병신 팸이야. 대신 신지훈이랑 사귀지 마. 커플 생기면 병신력 떨어져.”
“이리 와 봐. 니놈 고자로 만들어서 병신력 좀 올려보자.”
또 엉겨 붙어 싸우기 시작하는 지훈들에게서 몸을 돌려 희나는 옥상에서 내려왔다.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솔직히 피들피들 웃음이 나온다. 마지막에 제게도 ‘팸’이라고 한 것이 은근히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저 셋은 희나의 개인사에 관심이 별로 없는 만큼 함께 있어도 편하기 때문이다.
복도를 지나다 서 있는 누군가와 부딪칠 뻔했다. 희나는 짜증이 나서 인상을 쓰며 지나치려다가 막아서는 동작에 얼굴을 들어 상대를 보았다. 소영이었다.
“무슨 볼일 있어?”
희나는 바람이 쌩쌩 불 정도로 쌀쌀하게 말했다. 그날 자신을 팔아먹고 외면하고 있던 모습이 뇌리에서 잊혀지지가 않는다.
“너 신지훈이랑 사귀는 거야?”
사과라도 할 줄 알았는데 맥이 풀리는 질문에 희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결국 여전히 그녀보다는 주변 애들에게 관심이 더 있는 거다.
소영은 이를 앙다물더니 내뱉듯 말을 이어갔다.
“결국 일진 애들이랑 어울려 다닐 거면서 내가 다정이랑 같이 놀고 싶다고 나오라고 할 때는 왜 무시했어?”
“네가 놀고 싶으면 놀면 되지 나를 끌어들일 필요는 없잖아.”
소영이 전부터 계속 자신을 이용해서 그 애들과 어울리고 싶어 하는 걸 알면서 무시한 건 사실이었다. 일진 아이들이 수수하고 딱히 눈에 띄는 것도 아닌 소영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쯤 희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일진 놀이에 어울려 다닐 시간이 없다는 건 소영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최근에 어쩌다 보니 자주 쉬게 됐지만 학교에 아르바이트까지, 휴일 하나 없이 빡빡하게 살아 온 그녀니까.
희나의 말을 들은 소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넌 옛날부터 그랬어. 항상 그렇게 주변에 관심 없는 척, 혼자 고고하게 구는 거 짜증 나.”
“짜증 나는데 같이 다니느라 고생 많았겠네.”
나름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솔직히 희나로서도 조금 쇼크였다. 소영의 작은 눈에 눈물이 고였다.
“네가 다른 애들한테 까칠하게 구니까 나까지 다 멀어졌잖아. 그럴 필요가 있었냐고. 내가 가지고 싶은 건 다 가져놓고 필요 없다는 식으로 구는 거 정말 짜증 나.”
“내가 네가 가지고 싶은 걸 다 가졌다고?”
“그래! 그렇게 싸가지 없게 굴어도 어차피 예뻐서 넌 주변에서 떠받들어 주잖아!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는 사람이 주변에 널렸는데 집 어렵다 타령하면서 너만 힘든 척 유세 좀 그만 부려.”
순간 화가 나서 욕이라도 해주고 싶었으나 희나는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억눌렀다. 그러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니가 뭘 알아? 라고 말하기도 웃기네. 넌 다 알고도 그딴 소리 하는 거니까.”
“그래, 옆에서 보면서 느낀 거야. 너 옆에 있으면 사람들이 왜 그렇게 널 떠받들어 주는지 이해가 안 가. 넌 어차피 너밖에 생각 안 하잖아-!”
“그래, 난 나만 생각한다. 그래서 뭐?”
희나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소영이 배신하고 하루아침에 돌아서서 모르는 척 남처럼 굴었어도 한마디도 안 했는데 왜 여기 서서 이런 소리를 듣고 있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가한 거야? 쓸데없는 이유로 사람을 미워할 정도로 세상에 미워할 사람 없이 살았다면 복 받은 줄 알아야지.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난 네가 집에서 등 따습고 배부르게 산다고 해서, 부럽다거나 네가 밉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 휴게실 구석에서 추위에 벌벌 떨면서 자도 이건 내 문제니까 니가 따뜻한 방에서 잔다고 비교하거나 원망한 적도 없어.”
“…….”
“니가 한심한 생각 하는 걸 내 탓으로 돌리지 마. 어차피 니가 그냥 그 정도인 거잖아.”
소영이 더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희나는 그 눈빛을 무시하고 거친 걸음걸이로 그녀를 지나쳐 계단을 내려갔다.
불쾌한 감정 소모 때문에 아침의 재밌던 기분을 날려버린 희나는 다소 맥 빠진 하루를 보냈다.
오늘은 진혁이 급식 지도 당번이라 함께 식사도 할 수 없어서 더욱 그랬다.
아르바이트하는 카페도 몇 시간 동안 손님이 별로 없어서 점장이 시키는 각종 궂은일을 해야 했다. 그녀는 최소 1년쯤은 닦은 적 없는 냉동고를 분해해서 닦고 화장실 물탱크 청소에, 흔들거리는 의자 위에 올라가 찬장 위까지 먼지를 털었다.
그러고도 손님이 없어서 일찍 퇴근까지 했다. 한 시간 일찍 가봤자 어차피 한밤중이라 할 것도 없는데 시급이 한 시간 깎일 뿐이니 희나로서는 이게 가장 짜증 났다.
우울한 기분으로 전철에 흔들리며 진혁의 집으로 갔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희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진혁이 얼굴이 빨갛게 된 채 소파에 앉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놀란 희나는 황급히 그에게 달려갔다.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그러자 진혁이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들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더워서 그러지.”
“아직 5월인데요? 그 정도로 덥진…….”
그런데 말하면서 보니 집 안이 유독 사우나 수준으로 더웠다. 어리둥절한 표정이 된 희나에게 진혁이 설명했다.
“네가…… 아침에 샤워하고 보일러를 안 끄고 가서…… 집에 오니 완전 열탕 지옥이었어.”
아침에 진혁이 오래된 주택이라 물을 데?痢?자동으로 난방이 되니 나갈 때 보일러를 꼭 끄라고 신신당부한 것이 떠올랐다. 희나가 아차 한 표정을 짓자 진혁이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주먹을 꼭 쥐었다.
“집에 오자마자 너 오면 뭐라고 화낼까 그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미안해요-.”
희나는 민망해서 바닥에 털썩 앉아 소파 팔걸이에 얼굴을 얹은 채 눈치 보듯 진혁을 올려다보았다.
처음에는 찌푸려져 있던 진혁의 얼굴이 희나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옷소매를 슬쩍슬쩍 흔들자 점차 누그러들었다. 스멀스멀 입꼬리가 올라갈 정도가 되자 진혁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버렸다.
“아직 화났어요?”
“난 샤워나 하고 올 테니 벌로 거실 청소해.”
딱딱한 척하지만 희나는 이미 그의 화가 다 풀렸음을 확신했다. 몇 시간째 굳어 있었던 희나의 입가 역시 휙- 목욕탕으로 들어가 버리는 진혁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로 바뀌었다. 불쾌했던 기분이 말끔히 씻겨 내려가는 것 같다.
진혁에 이어 희나도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그녀가 나오자 진혁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희나에게 물어 왔다.
“그러고 보니 내일 현장학습이지? 어떻게 갈 거야?”
“어떻게 가긴요. 안 갈 건데요.”
“뭐, 왜?”
“돈도 아깝고, 가서 같이 다닐 친구도 없어요.”
“지훈이네 있잖아.”
희나는 상병신 티셔츠를 맞춰 입고 올 세 사람을 떠올리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리고 덧붙이듯 말했다.
“놀이 기구 같은 거 관심 없는데 비싼 입장권 사기 아까워요. 버스 타고 거기까지 가기도 힘들고.”
“입장권은 내가 사줄게. 그리고 나랑 같이 가면 되잖아.”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희나를 진혁이 설득하기 시작했다.
“내년이면 고3이니까 가서 놀아야지. 지나면 다시는 가고 싶어도 못 가. 이 김에 애들이랑 좀 친하게 지내고.”
“친구 같은 건 별로 필요 없어요. 친해져 봤자 앞에선 친한 척하고 뒤에선 딴소리하는 걸 뭐.”
낮에 소영이 떠올라서 희나는 어둡게 말했다. 그러자 진혁이 차분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그런 사람도 있지만 안 그런 사람도 있어. 친구가 있다는 건 상당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 혼자는 외롭잖아.”
“…….”
희나는 가만히 소영과 진혁의 친구들, 그리고 지훈의 무리를 떠올렸다. 확실히 다른 사람들이 소영처럼 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친한 그룹에 끼어드는 게 나쁠 것 같지만은 않기도 했다.
‘지훈이는 나랑 친구로 지내기 싫다고 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희나의 마음은 조금 가볼까- 하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가서 저녁에 바로 돌아오면 아르바이트도 늦지 않을 거다. 희나가 흔들리는 것을 눈치챈 진혁이 한 번 더 밀었다.
“아침에 깨워줄 테니까 차에서 자면 돼. 일단은 가서 출석 체크라도 해.”
망설이다가 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를 마친 희나가 방으로 들어가 드라이로 머리를 말리고 나오니 진혁이 TV를 보고 있었다. 어김없이 디스커버리 채널의 다큐멘터리이다.
원래 TV 같은 건 별로 보지 않지만 저렇게 열심히 보고 있으니 괜히 찔러 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희나는 그의 옆으로 가 앉아서 심드렁한 말투로 물었다.
“그게 그렇게 재미있어요? <세계의 비행기 사고>?”
희나는 제목을 보자마자 잠이 올 것 같은데 진혁은 거의 화면에 들어갈 기세로 대답했다.
“응. 지금 중요한 장면이야. 이제 어떻게 될지…….”
“그거야 추락하겠죠! 와장창 부서질 거고…….”
“스포일러 하지 마.”
제목이 〈세계의 비행기 사고〉인데 웬 스포일러- 하고 희나가 입을 비죽이고 있는데 말하자마자 비행기가 어마어마한 기세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생각 외로 박진감이 넘쳐서 입까지 헤- 벌린 채 집중을 하고 보다가 진혁과 눈이 마주쳤다. 민망해진 희나는 안 본 척 입을 비죽이며 쏘아붙였다.
“우리도 예능 프로 봐요. 추락하고 폭발이 그렇게 좋으면 차라리 영화를 보든가-!”
“방금 너도 재미있게 봤잖아. 계속 보면 재미있다니까? 유익하고.”
“비행기 추락하는 게 뭐가 유익해요? 정상적인 것 좀 봐요.”
재미있는데- 하고 시무룩해하는 진혁을 보다가 문득 희나는 아침에 찾아보았던 그의 시청 목록이 떠올랐다. 그녀는 잠시 혼자 웃은 뒤 표정 관리를 하고 태연하게 말했다.
“다큐멘터리가 좋으면 차라리 역사 다큐멘터리는 어때요?”
“역사도 좋지. 역사 다큐멘터리에 관심 있어?”
“네-. 공부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고.”
“좋은 생각이네. 국사 공부하려고?”
“그냥 옛날 사람들의 생활상이 궁금해서요.”
희나가 다큐멘터리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 기쁜지 진혁은 리모컨을 들어 IPTV 목록에서 역사스페셜 같은 것을 찾기 시작했다. 희나는 속으로 웃으며 물었다.
“선생님, 옛날 사람들은 방앗간에서 뭘 했을까요?”
“방앗간? 방아를 찧었겠지.”
“모두 방아만 찧었을까요? 사람에 따라 다르지 않을지?”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방앗간에서 달리 뭘 했겠어-.”
진지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고 있는 진혁에게 희나는 웃음을 참으며 결정타를 날렸다.
“그냥 궁금해서요. 예를 들면 향단이와 방자라면 뭘 했을지 선생님은 아실 거 같아서.”
잠깐 그녀가 하는 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의아한 표정을 짓던 진혁의 얼굴이 점점 빨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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