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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28화 (28/140)

28화. 남자, 소년, 그리고 친구 (1)

이른 아침 눈을 뜬 희나는 부스스한 얼굴로 거실로 나갔다.

벌써 준비를 마친 진혁은 차를 마시면서 다큐멘터리 채널을 보고 있었다. 화면 오른쪽 상단의 <초대형 국제공항의 모든 것>이라는 제목을 보고 희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어나자마자 그런 거 보면 다시 잠 안 와요?”

그는 화면에 깊이 몰입했었는지 희나가 방에서 나왔다는 걸 그제야 눈치챈 듯했다.

“잘 잤어?”

“……네.”

아침 인사를 던진 뒤 진혁은 다시 흥미로운 눈으로 다큐멘터리를 본다.

“그거 재밌어요?”

“어. 위험해…….”

희나가 화면을 힐끔 보았으나 그냥 후덕한 아저씨가 나와서 인터뷰를 하고 있을 뿐 위험한 장면 같은 건 안 보인다.

“이제 좀 있으면 나가야 되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못 일어나겠어.”

“…….”

국제공항 설계를 할 때 중요한 점을 설명하기 시작한 방송 화면을 보고 할 말을 잃은 희나는 한숨을 푹 내쉬다가 욕실로 들어갔다.

진혁의 집에 온 지 4일이 지났다.

희나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화요일 이후로 그는 집에 들어와서 잤다. 그녀의 아르바이트가 늦게 끝나면 역까지 마중 나오기도 했다.

처음 둘이 함께 귀가했을 때는 좀 어색해서 서로 말도 안 하고 눈도 안 마주쳤다. 그러나 한 시간쯤 지나면서 조금씩이나마 행동이 자연스러워졌다. 집 주인인 진혁도 평상시대로 행동하자 희나도 점점 적응이 되었다.

옆에 앉아서 관찰한 결과 그가 아침마다 새벽에 일어나서 목욕을 하고 녹차를 마신다는 걸 알 게 되었다. 거기까진 희나와 별 상관이 없는 일이었지만, 주 시청 채널이 수면제 같은 다큐멘터리 프로와 바둑 프로라는 것은 여고생에게 좀 괴롭다.

소파에 앉아 있는 진혁의 옆에 앉아 그가 미리 구워놓은 토스트를 입에 물며 희나는 입을 비죽거렸다.

“선생님 나이 속인 거 아니에요?”

“내가?”

“한 50살쯤 속인 거 같은데.”

다음 프로로 <세계의 절 기행>이 예고되자 기대되는 표정으로 예약 녹화를 누르고 있던 진혁이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이건 다시보기 안 해준단 말이야.”

“아무도 다시 보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그렇죠.”

“요즘 아이들은 이 재미를 몰라.”

“그런가 봐요, 할아버지. 보릿고개는 고생스럽던가요?”

희나의 놀리는 말을 듣고 진혁은 한숨을 내쉬더니 일어섰다.

“나 먼저 갈게. 천천히 와.”

“네. 짚신 넉넉히 챙겨 가세요.”

“다큐의 멋짐을 모르는 요즘 애들이 불쌍해.”

중얼거리며 나가는 진혁을 보며 희나는 킥킥 웃었다.

교문 지도를 하거나 아침 교무 회의에 참석해야 하는 진혁은 희나보다 등교가 빨랐다. 둘이 같이 가는 건 현명하지 못한 것 같아 희나는 30분쯤 늦게 출발할 생각이었다.

일찍 일어난 덕에 희나는 나갈 준비를 마치고도 여유로웠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 진혁이 두고 간 리모컨을 들고 TV를 켰다.

‘아아아, 많이도 봤네-.’

무슨 채널을 볼까 하다가 호기심이 일어서 시청한 방송 목록을 눌러 보았다. 죄다 다큐멘터리 아니면 바둑이다.

정말 이것만 봤을까 싶어 IPTV의 다시보기 내역까지 열어 보았다. 그러나 거기까지도 온통 다큐멘터리 천지다. 지구의 탄생과 공룡 멸종과 대게 잡이, 북극, 끔찍한 재해 등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 보였다.

‘이딴 걸 어떻게 봐. 제목만 봐도 잠이 오네.’

하품을 하며 목록을 아주 멀리 거슬러 올라가던 희나의 눈이 반짝거리며 입이 씩 벌어졌다. 두 달 전 를 본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뭐야- 제목도 아저씨 같은 걸 보네-.”

빵 터져서 킥킥킥 웃던 희나는 휴대폰에 인증 샷을 남긴 뒤 리모컨을 내려놓고 학교에 가기 위해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희나야-! 보고 싶었어-!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3일간 결석한 덕에 지훈이 평소보다 더 격렬하게 희나를 반겼다. 달려드는 그의 얼굴을 보며 희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얼굴이 왜 그래?”

지훈의 얼굴에 여기저기 상처 자국이 있었다. 그는 밴드를 붙인 볼을 살짝 긁으며 말했다.

“좀 긁혔어-. 그래도 이제 너한테 얼씬도 안 할 거야.”

자세히 보니 목과 손등에도 밴드와 붕대를 감고 있었다. 희나는 뒤쪽에 걸터앉아서 폰 게임을 하고 있는 병태와 현상에게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도 밴드를 붙이고 있는 것이 모두 조금씩 다친 모양이었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그냥 좀 까진 거야. 신경 쓰지 마.”

미안한 마음에 뭐라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 희나에게 지훈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물어보니까 그 진혜란 사람은 지금은 팸에 없는 모양이더라. 연락처도 모른다고 찾아보고 연락해주기로 했어.”

“찾을 수 있대?”

“이번 달 안으로 못 찾아놓으면 다 뒈질 줄 알라고 했으니 알아서들 할 거야.”

미안한 기분에 희나가 입술을 깨물고 있자 지훈이 픽 웃더니 볼을 주욱- 잡아당겼다. 시무룩해 있던 희나가 순간적으로 발끈했다.

“왜 자꾸 볼 꼬집어!”

“너 피부 진짜 좋아-. 만지면 매끌매끌한 게 묻는 거 같아.”

“개기름인가 부지.”

일부러 깨는 어조로 말했으나 지훈은 치아를 내보이며 서글서글하게 웃는다.

“이런 개기름이라면 핥아먹을 수도 있겠다.”

“아, 진짜-. 너네 좀 다른 데로 꺼질 수 없냐? 오그라들어서 죽어버리겠네, 진짜!”

누워 있던 병태가 닭살이 덕지덕지 돋은 팔을 벅벅 긁으며 질색을 했다.

그러나 그들이 짜증을 내든 말든 지훈은 끄떡도 하지 않고 희나를 데려가서 그늘에 박스를 깔아 주고 앉혔다. 수업 시작하려면 이제 20분 정도 남았는데, 셋은 여기서 시간을 때우다 들어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지훈은 희나의 무릎을 베더니 벌렁 드러누워서 씩 웃었다. 희나는 또 발끈했지만 그의 얼굴에 난 상처 자국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세 사람은 빨랫줄의 빨랫감처럼 아주 프리한 자태로 뭐라고 간간이 수다를 떨며 게임을 하거나 동영상, 책을 보거나 했다. 지훈에게 휘말려서 매일 그들과 함께 있다 보니 희나도 이제 이렇게 어울려 앉아 있는 게 좀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전교 1등과 일진과 반장이 왜 친한 걸까, 고민했지만 보다 보니 셋이 하는 짓이 비슷비슷하다. 특히 쓸데없는 짓을 할 때 의기투합을 하는 것만큼은 완벽했다.

그간 남자의 거시기 모양 눈사람을 2m 크기로 만들어 학교 운동장에 세운다든가, 학교 앞 피카츄 돈가스 값이 100원 올랐을 때 반 아이들을 전부 데리고 몰려가 피카츄 돈가스 자세를 취하고 시위를 해서 가격을 원상 복귀시킨다든가, 강당에서 트램플린 점프왕 대회를 개최하다가 참가자 하나가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친다든가, 대충 뭐 그런 것들 말이다.

희나가 보기엔 전혀 쓸데없는 짓이었으나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도 쩔었다. 거기에 현상이 장착한 네고시에이션 기능 덕에 그렇게 사고를 치고 다니는데도 선생님들에게도 예쁨을 받는다.

“아, 그러고 보니 내일 너네 어떻게 할 거야?”

“내일? 아- 에버랜드?”

희나가 멍하니 앉아 파랗고 높은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병태가 문득 생각난 듯 말을 꺼냈다. 현상이 대답했다.

“깜빡 잊고 있었네. 희나 넌 어떻게 할 거야?”

“뭘 어떻게 해?”

“금요일에 현장학습이잖아-. 에버랜드 간다던데.”

지훈의 설명에 희나는 멍해졌다. 프린트 같은 거 받은 기억이 있는데 생각도 안 하고 있었던 것이다.

“희나야- 같이 가자. 머니까 내가 태우러 갈게. 집이 어디야?”

“됐어. 필요 없어.”

희나가 칼같이 대답하자 잠시 찬물을 끼얹은 듯 분위기가 싸해졌다. 병태와 현상은 킬킬킬 웃으며 지훈을 놀렸다.

“오와- 이건 좀 상처다-. 신지훈, 어쩌냐-. 낄낄낄.”

“킬킬. 신지훈 또 차여, 또 차여-.”

“시끄러, 나쁜 놈들아-! 아아아- 희나, 너 너무하다. 마음에 기스 났어.”

소리를 버럭 지르며 지훈이 웃는 얼굴로 머리를 마구 휘저으며 징징거리는 소리를 냈다. 희나는 무릎 위에서 난동을 부리는 지훈의 작은 머리를 붙잡아 세우고 말했다.

“그런 거 아냐. 난 현장학습 안 갈 거야.”

“왜 안 가는데?”

“그냥 안 가.”

에버랜드까지 가는 차비나 입장료도 아깝고, 친구도 없는데 혼자 돌아다니기도 애매했다. 희나의 칼 같은 말에 지훈이 치맛자락을 붙들고 매달리기 시작했다.

“왜 안 가? 가자- 희나야.”

“난 안 가. 나 없어도 너희 셋이서 재미있게 놀 수 있잖아.”

“야아아아아- 왜 안 가, 왜 안 가, 희나야-. 같이 가자. 데이트하자-.”

“신지훈. 죽빵 처맞기 싫으면 더러운 애교 치워라.”

지훈의 콧소리에 희나보다 병태가 더 질색하며 박스를 집어 들어 지훈을 마구 때렸다. 먼지가 풀썩풀썩 일어나자 지훈이 병태의 목을 조르고 그라운드 기술을 먹였다.

그때부터 웃고 욕설을 퍼부으며 각종 주짓수 기술을 서로에게 시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떠들고 있는 모습을 보니 희나는 그저께 밤에 본 진혁의 친구들이 연상되었다. 다들 이렇게 서로 친한 그룹이 있는 건가- 하고 생각하니 왠지 혼자 외톨이인 기분이 든다.

희나는 옆에서 남의 일 보듯이 킬킬 웃으며 앉아 있는 현상에게 물었다.

“너네 셋이서 원래 친해? 언제부터?”

드물게 질문을 던져 오는 희나를 현상이 힐끔 쳐다보았다. 갸름한 얼굴이 왠지 진혁을 닮은 분위기다.

“중학교 때부터. 원랜 다섯 명이었는데 둘이 다른 학교로 가서 셋만 남았네.”

“신지훈 이 똘추 자식 때문에 쌈박질 지겹다고 둘이 다른 학교 갔어-! 졸라 아쉬워.”

별로 크게 얘기하지 않았는데 들렸는지 병태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왜 내 탓이야!”

“니가 중2병 걸려서 아무 데나 시비 걸고 다니니까 애먼 애들이 맨날 맞고 다녔잖아!”

지훈은 좀 찔리는지 조르고 있던 병태의 목을 놓아주고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병태도 지훈의 옆에 벌렁 드러누우면서 말했다.

“아- 그때가 그립다. 우리 다섯 명일 때 개 쩔었잖아.”

“그러게. 우리 중학교 땐 다섯 명이서 맨날 PC방에 모여서 롤 했는데.”

“맨날 서든하고- 롤하고. 밤에 좀 돌아다니다가 신지훈 놈 때문에 간간이 싸우러 나갔다가 뒈지게 맞고-.”

쩔었대서 무슨 멋진 과거라도 있나 했는데 맨날 PC방만 갔다니, 희나에겐 그냥 폐인처럼 들렸다.

“너네 중학교 땐 일진 아니었어?”

“뭔 쪽 팔리게 일진이야. 우리 중학교 때 별명 겜방신기였잖아. 겜방에서 겜 잘하고 간지 쩔어서.”

일진보다 겜방신기라는 별명이 훨씬 쪽 팔릴 것 같은데 다들 그때를 회상하며 만족해하는 듯 보였다.

‘겜방에서 간지 쩔어 봤자 아닌가.’

희나는 말없이 파란 하늘을 쳐다보며 멍하니 생각했으나 태클은 걸지 않았다. 그들의 부질없는 자부심을 꺾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셋만 남았어. 이제 우린 JYJ야.”

“그러게 말이야. 겜방신기이던 시절은 이제 지났어. JYJ는 이름이 재미각이 안 살잖아. 멋진 걸로 다시 지어.”

“……새로 지어서 뭐하게.”

“현장학습 갈 때 티셔츠 맞춰 입고 가자.”

“오, 좋다, 좋다. 한 글자씩?”

현상의 말에 멍청하게 뒹굴고 있던 세 남고생은 다들 눈을 빛내며 일어나서 열심히 이름을 짓기 시작했다. 비생산적인 일에 대해서는 참 열심이다.

바보 기운이 옮을까 봐 세 사람에게서 슬쩍 떨어지며 희나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5분 후면 수업이 시작할 시간이다.

일어나서 치마를 툭툭 터는데도 셋은 떠드느라 희나가 가는 걸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

희나는 선 채로 그들이 바닥에 적어 놓은 민현상, 박병태, 신지훈이란 이름을 보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상병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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