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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27화 (27/140)

27화. 불청객과 이해 (2)

그녀는 모텔에서 곤란해하던 진혁의 얼굴을 떠올리곤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아직 모텔에서 일어났던 일은 모를 테지. 만약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내가 선생님을 찾아온 걸 알면 더 화를 내겠지.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손끝으로 먹지 않을 과자 조각을 만지작거리며 수진이 다시 딱딱하게 말했다.

“그런 말초적인 문제도 심각하긴 하지만 너랑 같이 살다가 학교에 걸리면 장난 아닐걸. 진혁이는 그런 거 다 알아도 마음 약해서 너한테 나가라거나 그런 말 못 해. 네가 알아서 상대 입장을 배려해야지.”

타당한 걱정이긴 했지만 희나는 수진에게서 공격적인 느낌을 받았다. 자제하려고 해도 말투에서 배어 나오는 적의는 단순히 친구로서 걱정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희나는 소파에 누워 있는 진혁을 힐끔 보았다. 역시- 쓸데없이 인기가 많은 둔탱이 바보다.

“수진아, 이제 그만해. 우리가 설교하러 온 거 아니잖아.”

“뭐 별로 심하게 말한 건 아니잖아. 못 할 말 한 것도 아니고-.”

“희나야,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 이 녀석이 진혁이 좋아해서 그러는 거야.”

“좋아하는 거 아니라고 했잖아!”

경부의 말에 수진이 얼굴을 붉히면서 앙칼지게 반박했다. 그러나 희나가 보기에도 좋아한다고 대놓고 말하는 거보다 그게 더 확실해 보였다.

“서운하게 생각 안 해요. 그런 말 들어도 할 수 없기도 하고.”

의연하게 대답한 희나는 진혁이 정말 자고 있는 건지 흘긋 시선을 던져 살폈다. 그리고 그가 깨어 있으면 죽어도 못 할 것 같은 말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어른이에요.”

누군가를 믿는다고 해본 적 한 번도 없는데 이제 한 달가량 알고 지낸 진혁을 상대로 이런 말을 하다니. 하지만 희나는 진심이었다. 그러나 어색해서 말을 마치자마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빨개져 고개를 숙인 희나를 바라보며 경부가 손가락을 마구 꼼지락거리더니 웃으며 말했다.

“아, 안 돼. 얘가 얘기할 때마다 내 마음이 불타올라서 오덕사 할 거 같다. 희나야- 어쩜 이리 말을 이쁘게 하니!”

와락 희나를 안으려는 경부를 거북이 사정없이 후려쳐서 밀어냈다. 하지만 수진은 웃지 않고 진지하게 말했다.

“아직 진혁이랑 만난 지 얼마 안 됐잖아.”

“그래도 믿어요.”

희나는 진지하게 대답하며 수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녀는 입을 살짝 비죽댔지만 조금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뭐 진혁이 놈 나도 처음 보자마자 착한 놈인 거 딱 알아봤는데 뭐. 그럴 수도 있지-.”

“맞아요. 나도 진혁 오빠같이 착한 사람 처음 봤어요.”

경부와 유정도 맞장구를 쳤다. 거북이는 달래듯 수진의 술잔에 술을 잔뜩 따라주며 말했다.

“이제 그만해. 우리가 뭐라고 해서 희나가 혹시 나가버리기라도 하면 우리 내일 진혁이한테 다 죽어-. 나쁜 애도 아닌 거 같은데 잘해주자고. 어?”

“네가 나쁜 애 아닌지 어떻게 알아? 그냥 예뻐서 봐주는 거 아냐?”

“그래- 예뻐서 그런다. 이쁘면 당연히 봐줘야지, 인마-. 희나야, 오빠도 자취하는데 오빠네로 올래?”

“야- 경찰 불러! 이 아청 변태 새끼 진심이야!”

희나에게 불타고 있는 경부를 거북이가 발로 차자 수진도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희나를 바라보았다. 희나 역시 눈이 마주쳤지만 피하지 않았다. 걱정하는 마음과 다소의 연심 때문이지 앞과 뒤가 다르지 않은 좋은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수진은 술 한 잔을 호쾌하게 원 샷 하고 가득 따르더니 희나에게 턱 내밀며 말했다.

“그래, 뭐 좋아-! 이쁜이, 너도 술이나 먹자. 쓸데없는 참견 해서 미안! 어른스럽지 못했네!”

“괜찮아요. 그런데 저 고등학생인데요.”

“그래. 마셔도 술 잘 깰 나이지. 수학여행 왔다고 생각하렴.”

“오- 술 게임 하자, 술 게임.”

“니네 미성년자 상대로 뭐 하는 짓들이야-.”

한바탕 난리가 일어나고 졸지에 희나는 술판에 끼게 되었다. 그들은 희나에게 맥주를 딱 한 캔 따준 후 자기들끼리는 거의 댐 방류하듯 어마어마한 기세로 술을 들이부었다.

“아, 나도 이왕 이렇게 된 거 이 집에 쳐들어와서 죽치고 있을까?”

수진이 취기가 올라 빨개진 얼굴로 누워 있는 진혁의 얼굴을 요리조리 만지며 말하자 경부가 손사래를 쳤다.

“야, 너 이미 진혁이 처음 이사 왔을 때 술 마시고 쳐들어왔었잖아-.”

“그건 상황이 다르죠-! 그땐 안 친했을 땐데!”

“다르지, 다르지. 네가 덥다면서 옷 벗으니까 에어컨 켜주고 이불 덮어 주고 나갔다며. 크크크크크?.”

“가엾은 여자.”

저런 이야기까지 공유하다니-.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은 듯한 느낌에 희나는 조금 움찔했으나 굉장히 털털한 성격인지 수진은 킥킥 웃었다.

“에잇- 시끄러워요! 나의 섹시함을 모르는 진혁이 놈이 고자인 거지!”

“내 방으로 오지 그랬니, 수진아-.”

“절대 안 가요-!”

점점 술이 들어갈수록 그들은 강도 높은 연애담과 남자, 여자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직 소녀인 희나는 남녀가 어울려서 저런 이야기를 한다는 게 어색해서 볼이 빨개진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나 중간중간 진혁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움찔하면서도 귀 기울여 들었다.

그냥 착하고 다정하고 호구스럽고 성실한 이미지만 가지고 있었는데, 진혁의 친구들을 보니 잘 모르는 면모도 많을 것 같았다. 그들 사이에서는 학생 걱정에 어쩔 줄 모르는 어리바리 교생이 아니라 음담패설도 나누고 술자리를 즐기고 여자들의 유혹도 받는 남자인 거다.

그러자 어쩐지 진혁이 한 발 더 먼 어른처럼 느껴져서, 희나는 괜히 씁쓸해졌다. 그녀는 점점 취해가는 그들의 중심에서 슬쩍 밀려 나와 진혁이 잠들어 있는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어느 결에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희나는 몸이 움직이는 감각에 잠에서 깨어났다. 누군가 그녀의 몸을 안아 들고 있었다.

뿌연 머리로도 이틀 전 밤의 싫은 기억이 떠올라 반사적으로 흠칫해서 눈을 떴다.

그러자 바로 보인 건 진혁의 단정한 얼굴이었다. 그가 단단한 팔로 안아 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희나는 조금 얼굴을 붉혔다. 그는 조용히하라는 듯 쉿- 하는 입 모양을 만들더니 희나를 작은 방으로 데려가 침대에 눕혀주었다.

“미안. 깨웠나 보네. 왜 거실에서 자고 있었어. 방에 들어가서 자야지.”

“선생님 친구들이…….”

“하-. 왜 이 녀석들이 다 여기에 있는 거야.”

진혁은 침대 머리맡에 앉더니 골치가 아픈 듯 이마를 짚고 희나에게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어제 선생님이 취해서 친구들이 선생님 들쳐 업고 집으로 데려왔어요.”

“……그러고 나서 여기서 또 술판 벌인 거야?”

“네.”

“하여튼 저 녀석들은……. 쟤들이 뭐 쓸데없는 얘기는 안 했어?”

희나의 머릿속에 밤새 들은 진혁의 당하기만 하던 각종 과거사와 나름 늠름한 연애사와 웃음거리가 된 수많은 고자 일화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존엄을 지켜주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별로요. 그보다 쓸데없는 얘기는 선생님이 이미 다 한 거 아니에요?”

“내가?”

“내가 막무가내로 들어와서 고민이라고 했다면서요?”

진혁이 얼굴을 조금 붉혔다. 그는 얼굴을 문지르더니 솔직하게 사과했다.

“미안. 계속 고민하고 있었거든.”

“바보, 들킬까 봐 그렇게 걱정하더니 선생님이 벌써 들켰어요?”

“……쟤들은 날 너무 잘 알아서 속일 수가 없었어.”

뭐 거짓말 못 하는 그로서는 불가항력일 거란 생각이 들어 희나는 수긍했다. 그저, 여기에 오면서도 그에게 저 정도로 가깝고 허물없이 지내는 친구가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던 자신이 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가 외톨이라서 진혁도 그럴 거라고 착각해버린 거다.

“그래도 아마 쟤들 때문에 문제가 될 일은 없을 거야.”

“알아요.”

진심으로 진혁을 걱정하는 모습들처럼 보였고, 똑똑한 사람들이라 참견하는 선도 지키는 것 같았으니 희나도 그런 걱정은 안 했다. 오히려 다른 경로로 들킨다면 도움을 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였다.

“그럼 아직 해도 안 떴으니까 좀 자고 나중에 얘기하자. 난 쟤들 깨워서 쫓아내야겠어.”

그렇게 말하고 일어서려다 진혁이 약간 비틀거렸다. 아직 취기가 완전히 가시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다시 앉아 취기를 조절하듯 심호흡을 하는 그의 등을 보던 희나가 그를 불렀다.

“선생님.”

“응?”

“나…… 여기 있어도 괜찮아요?”

진혁이 희나를 돌아보았다. 안경을 쓰지 않아 깊은 눈매가 드러난 얼굴이 평소보다도 어른스러워 보인다. 그는 곧 다시 시선을 불안정하게 돌리며 뭔가 생각을 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깊이 생각해 봤는데 네가 여기 있는 건 분명히 문제가 있어.”

“…….”

기대하지 않았어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건 역시 슬픈 일이다. 희나는 진혁을 바라보던 눈을 내리깔고 다른 데를 보았다.

그때 진혁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부드럽게 이어졌다.

“하지만…… 네가 내가 모르는 데서 위험에 처하는 건 이제 보고 싶지 않아.”

희나의 시선이 다시 그를 좇았다. 그는 희나 쪽을 쳐다보지 않은 채 어색한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

“우선은 당분간이라도 여기 있으면서 네가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곳을 찾아보자.”

그 다정한 목소리가 너무 따뜻해서 희나는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래서 가슴까지 덮고 있던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 얼굴을 반쯤 파묻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는데 희나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선생님, 나랑 같이 사는 거 많이 싫어요?”

진혁이 침을 꿀꺽 삼키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곤란한 것 같은 미소를 떠올린 채 희나를 내려다보았다.

“싫지 않아.”

아주 나직한 목소리로 그는 그렇게 말했다. 흰 얼굴은 살짝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희나는 이불 밖으로 작은 손을 내밀어서 진혁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럼 밖에서 자지 말고 집에 와요.”

“그래.”

“선생님 없이 혼자 집에 있는 건 싫어.”

진혁이 멈칫하면서 묘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또 침을 꿀꺽 삼킨 진혁의 커다란 손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는 깨지기 쉬운 유리를 만지듯이 아주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희나의 머리카락을 지나 단정한 얼굴 옆 라인을 쓸었다.

진혁 쪽에서 먼저 닿아 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왠지 심장이 저려서 희나는 입술을 꼭 다물며 커다란 눈으로 진혁을 올려보았다. 조금 떨리는 목소리가 그의 모양 좋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항상 까칠하게 선을 긋다가…… 가끔 이럴 때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술을 마셔서인지 묘하게 속내를 드러내고 있었다.

둘만 있는 방. 안경을 쓰지 않은 그의 얼굴에는 모텔에서 밤을 보내던 날 희나의 몸 위에 올라와 짓던 남자의 얼굴이 다시 조금 떠올라 있었다.

희나는 가만히 손을 뻗어서 얼굴을 감싸고 있는 따뜻한 큰 손을 잡았다. 진혁이 움찔하는가 싶더니 까만 눈에 안타까움을 떠올렸다. 둘은 홀린 듯이 서로의 눈에 시선을 맞춘 채 바라보았다.

그때, 팽팽한 긴장을 끊어내듯 바깥에서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진혁은 무언가에서 깨어난 듯 고개를 좀 젓더니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일어났다.

“그럼 잘 자. 나중에…… 나중에 얘기하자.”

희나는 도망치듯 방을 나가는 진혁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문이 닫히자마자 극도로 억누르고 있던 숨을 하아- 소리가 나도록 몰아쉬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서 터져버릴 것만 같다. 희나는 왠지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조금 뒹굴뒹굴했다. 이불에서 진혁의 향기가 나서 전신이 빨갛게 물들어버리고 말았다.

희나는 울 것 같은 기분으로 웃으며 그 향기를 깊숙이, 몸에 새길 듯 몇 번이고 깊숙이 들이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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