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불청객과 이해 (1)
체크무늬 남방을 입은 장난기 많게 생긴 남자가 희나 쪽으로 얼굴을 쑥 내밀더니 동조하며 말했다.
“이얄- 진짜네-. 우와- 쩔어.”
“야- 피부 하얗고 뽀송한 거 봐. 역시 여고생은 달라-.”
둘이서 무슨 동물원 토끼 보듯 하며 즐겁게 얘기하고 있었다.
“누구세요?”
“오빠! 미성년자한테 침 좀 흘리지 마요.”
이번엔 긴 웨이브 머리에 참해 보이는 여자가 걸어오더니 핀잔을 날렸다. 총 세 명의 사람이 등장했는데 그 뒤로도 더 있는지 아직 모습이 보이지 않는 남자가 소리쳤다.
“야- 너네끼리만 들어가지 말고 좀 도와줘, 이것들아!”
“유진혁 놈 쓸데없이 길어서 우리 같은 루저들은 감당이 안 돼-. 니가 알아서 들고 와.”
진혁의 이름이 나오자 희나는 고개를 내밀고 문 밖을 바라보았다.
낯선 남자가 진혁을 부축한 채 올라오고 있었다. 모자를 눌러쓴 래퍼같이 생긴, 아주 다부진 체격의 남자였는데, 진혁은 거의 업히다시피 그에게 몸을 기대고 있었다.
“선생님?”
진혁을 발견한 희나가 작게 부르자 그를 부축하고 있던 남자가 가슴을 부여잡았다.
“우와- 귀여운 목소리로 선생님이래. 나 좀 심쿵했어. 불타오르는데-.”
“그만 좀 하악대요-. 안녕-. 늦은 시간에 미안. 우리 진혁 오빠 학교 친구들이야. 좀 들어갈게.”
참해 보이는 여자가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희나에게 이제야 설명 비슷한 것을 했다.
희나가 갈피를 못 잡고 황망히 서 있는 가운데, 낯선 두 여자와 두 남자는 진혁을 부축한 채로 제 집처럼 집에 쏙 들어왔다.
“안녕-. 이름이 뭐야? 난 박유정이야-. 만나서 반가워.”
“안녕하세요……. 주희나예요.”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유정에게 희나는 쭈뼛거리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색하게 악수를 하자 다들 구름같이 몰려와서 떠들어댔다.
“나는 이수진이야. 여기 있는 이상한 오빠들은 거북이랑 경부 오빠라고 하면 돼-. 삼촌이라고 해도 되고.”
제일 처음 눈을 빛냈던 커트머리 여자가 그렇게 말하며 희나의 손을 잡고 붕붕 흔들었다.
희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체크 남방과 진혁을 소파에 던져 놓은 모자남을 쳐다보았다.
“거북…… 이? 경부?”
“어, 반갑다-. 거북이야.”
별명 같은데 본명처럼 소개했다. 약간 동그란 인상에 동안인 얼굴이 포켓몬스터 꼬부기를 닮은 감이 없잖아 있었다.
옆에 서 있던 야구 모자를 쓴 남자가 거북이의 얼굴을 밀어내며 말했다.
“이 자식 얼굴이 졸랭 거북하게 생겼잖아. 그래서 거북이야, 거북이. 오빠는 경부나 아니면 빈이 오빠라고 불러-.”
“닥쳐, 빈은 얼어 죽을 빈이야. 경부 멍청이 새끼야.”
누가 봐도 닉네임인 거북이와 다르게 경부는 본명인지 아닌지 헷갈렸으나 희나는 캐묻지 않고 그냥 수긍했다.
한창 자기소개를 마친 그들은 거실로 가서 탁자 위에 술병을 늘어놓고 오징어 등을 뜯어 놓더니 둘러앉아 희나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여기 와서 앉아-. 아직 안 잘 거지?”
희나는 망설이다가 다가가서 앉았다. 다들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쳐다보는 것이 부담스럽다. 모두에게서 조금씩 술 냄새가 나는 것이 다들 어느 정도씩 취한 것 같았다.
희나는 소파에 길게 누운 채 완전히 뻗어 버린 진혁을 쳐다보았다.
“선……생님은 왜 저렇게 된 거예요?”
“흐흐흐. 이 녀석이 어제부터 동아리 방에 와서 자고 있다는 후배의 제보를 받고 왠지 심상치 않아서 끌고 나가서 술을 먹였지.”
거북이는 신나는 표정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술 마셔도 밖에서 안 자고 꼬박꼬박 기어들어 가는 놈이 교생 실습 중인데 동아리방 같은 데서 자고 있다는 게 수상해서-.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니까 어물어물거리더라고. 저놈 거짓말 끝장나게 못해서 얼굴에 다 티가 나거든.”
“오늘은 그래도 유진혁치고는 오래 버텼어-.”
“그래. 낄낄, 그래도 그래 봤자 유진혁이지.”
진혁을 아주 잘 아는 듯 친근하게 말하는 사람들을 보니 희나는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집에 가서 2차 하자니까 얼굴이 허예지길래 뭔가 수상해서 여자 숨겨 놨냐고 다그쳐 물었지.”
“그래-, 냄새가 났다니까. 그래서 술을 퍼먹였더니 집에 누가 와 있다고 순순히 불었어!”
거북이는 생각만 해도 자신이 올린 쾌거가 흐뭇한지 즐겁게 웃었다. 경부가 같이 웃으며 손을 쳐들자 둘이 신나게 하이파이브를 한다.
아무래도 진혁이 평소에 저 두 사람에게 자주 당하고 살 거 같다는 생각을 하며 희나는 눈을 깜빡깜빡하다가 물었다.
“선생님이…… 제가 여기 있다고 술주정으로 다 말해버린 거예요?”
“뭐- 그런 건 아니고. 저 두 사람이 절박한 상담을 원하는 진혁이를 절묘한 화술로 다 긁어냈다고 해야 하나.”
유정이 볼을 긁적긁적하며 거북이와 경부를 가리켰다. 거북이는 처진 눈가를 치켜 올리면서 울분이 터진다는 듯 말했다.
“고민 상담이 너무 재수 없잖아! 교생 실습 나간 곳의 학생이 갑자기 막무가내로 들어왔다고. 뭐 사정이 있는 거 같은데 말을 안 해줘서 미치겠다, 뭐 그런 똥 같은 소리를 하기에 열 받아서 더 술을 퍼먹였어!”
“그러니까-! 부럽다. 이 새끼 머리도 수북한 풍성충인데 이런 꽃 여고생이 집에 쳐들어오고. 복 받았어, 아주. 유진혁 주제에! 유진혁 주제에!”
그러면서 경부는 자고 있는 진혁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마구 흐트러뜨렸다.
뱉고 있는 대사와 머리카락에 대한 애증 표현, 그리고 모자 아래로 머리카락이 안 보이는 것을 볼 때 얼굴은 훈남인데 가엾게도 탈모에 시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면서도 불편한지 “우웅-.” 소리를 내는 진혁에게서 경부를 떼어 내며 수진이 핀잔을 주었다.
“뭘 새삼스럽게 열폭해-? 진혁이 안 그래도 인기도 많잖아.”
“그냥 인기랑 여고생 러시랑 같냐? 복이 아주 터졌어-! 이 새끼 거시기도 커-. 아, 짜증 나!”
“진짜? 사실이냐? 어디 보자-.”
경부가 뱉은 한마디에 다들 구름같이 모여들어 진혁의 바지를 내리려는 것을 본 희나는 얼굴이 빨개지며 경악했다. 다행히 그나마 상식인으로 보이는 유정이 나서서 진혁이 봉변을 당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아, 그만들 해요. 애기 놀라잖아요-.”
“그래, 우리 이쁜 여고생 놀란다. 나중에 같이 씻을 때 봐. 나중에-.”
“쩝. 그럼 난 못 보잖아. 궁금한데.”
“니가 보면 성희롱이잖아- 이수진!”
거리낌이 아예 없는 것이 다들 남녀를 떠나 친하게 지내는 모양이었다. 희나도 진혁에게 친구가 없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왠지 조용하고 성실해 보이는 그의 외모와 이 개성 넘치는 사람들은 영 어울리지가 않아 보였다.
일련의 소동에도 진혁은 어찌나 푹 잠들었는지 깨어날 기색이 없었다.
앞에 앉아 있던 수진이 안경을 벗겨 곤히 잠든 아이 같은 얼굴이 드러나자 희나가 중얼거렸다.
“선생님 술이 약한가 봐요…….”
“아니, 그냥 보통인데 우리가 치사량으로 먹였어. 흐흐흐. 싫다고 바동거리는 것이 얼마나 즐겁던지.”
“왜 그렇게까지…….”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아서 그랬지!”
거북이는 사악하게 웃으며 즐거워했다. 이미 좀 취한 거 같은데 호탕하게 잔을 높이 들고 맥주를 마시는 그들을 보면서 희나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언니, 오빠들도 다 선생님이에요?”
“아니-. 우리 다 다른 과야. 교직 이수하는 애 진혁이네 과에도 몇 명 없을 걸? 그리고 우리 중에 진혁이만 4학년이고 우린 2학년이야.”
경부가 오징어를 집어 먹으며 설명했다.
“그런데 다 말을 편하게 하네요.”
“유정이만 빼고 우린 학년만 다르고 다 동갑이야. 난 재수했고, 이놈이랑 수진이는 휴학해서.”
“진혁 오빠가 원래 선배 대접 못 받는 축이라. 나사가 좀 빠져서 귀엽잖아~.”
유정이 그렇게 말하자 수진이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진혁의 흰 뺨을 잡아당기면서 킥킥 웃었다. 그 친근함에 희나는 왠지 벽이 느껴졌다.
학교와 시궁창 같은 집, 그리고 아르바이트가 세상의 전부인 그녀로서는 인간관계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깊숙한 교류를 하고 있다는 게 왠지 낯설었다.
자신은 궁지에 몰렸을 때 찾아올 곳이 진혁밖에 없었는데, 진혁에게 자신은 고려의 대상도 아닐 거라고 생각하니 희나는 조금 의기소침해졌다. 그는 자신의 거의 대부분을 알고 있는데 자신만 그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은 왠지 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희나는 진혁의 친구들에게 흥미가 생겼다.
“다…… 다른 과인데 어떻게 알고 지내세요?”
“어- 우리 다 같은 학교 같은 동아리거든.”
“학교가 여기서 가까워요?”
“어-. 바로 옆 동네잖아.”
잠시 멍하니 낙성대 근처의 대학을 떠올리던 희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서울대라고요?”
“잉? 몰랐어?”
희나는 깜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바보 둔탱이가 서울대라니.
진혁과 유정, 딱 부러져 보이는 수진까지는 그럭저럭 납득이 가도 솔직히 동네 노는 오빠들로밖에 안 보이는 나머지 셋이 최고 대학에 재학 중이라는 것이 믿기질 않는다.
“이런 오빠들이 서울대라니…….”
“……실례로구나, 이쁜아. 우리도 의외로 정시로 시험 치고 들어왔단다-. 유진혁 저놈처럼 농어촌 전형 아니라고-!”
경악한 희나의 시선을 받은 거북이가 발끈하며 죄 없이 잠든 진혁을 꾹꾹 찔렀다.
“무슨 동아리예요?”
“일단은 여행 동아리인데, 여행에는 별로 관심 없어. 돌아다니면서 진혁이는 말리고 우린 술이나 마시는 거지.”
“그렇지. 우리 베이스캠프이자 주요 여행지는 요기 진혁이네 집인데-. 그런고로 한마디 좀 물어보자-.”
그런 건 전혀 여행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희나에게 수진이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그녀는 아까까지 짓고 있던 웃음을 지우고 진지한 표정이었다.
“너 여기 왜 쳐들어온 거야?”
수진의 말투가 다른 사람들이 듣기에도 조금 딱딱하게 느껴졌는지 경부가 분위기를 유하게 만들려는 듯 덧붙였다.
“하하-. 이래봬도 우리가 이 녀석 이뻐라 하거든. 너도 아마 알겠지만 속없이 착해 터지기만 한 놈이라 걱정이 좀 돼서 말이야.”
“자, 자- 나도 묻어서 질문 타임! 너 얘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서 온 거야? 육탄 돌격~?”
거북이가 신난 듯 젓가락으로 소주병을 통통 치면서 경쾌하게 묻자 희나는 얼굴을 붉혔다. 유정이 옆에서 그런 희나를 감싸 주었다.
“오빠- 여고생한테 질문이 너무 노골적이다-.”
“이 정도 질문이 어때서. 너 진혁이 좋아해?”
다들 장난스런 가운데 혼자 진지한 수진이 재차 물었다. 그사이 희나는 새침한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집이 어려워서 갈 데가 없거든요.”
“집이 어려워? 가출한 거야?”
희나는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그 반응을 보고 정답이라고 생각했는지 수진이 가벼운 어조로 설교를 시작했다.
“가출했다고 이리로 온 거야? 집이 아무리 어렵다고- 이렇게 막 나오면 안 되지. 부모님이 걱정하실…….”
“모르면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부모님 얘기에 발끈한 희나가 앙칼지게 말을 끊어버리자 잠시 분위기가 싸해졌다. 미간을 찌푸리는 수진의 어깨를 경부가 감싸 안아 토닥였다.
“야, 야. 그래. 사정이 있을 텐데,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오죽하면 나왔겠어.”
그러면서 거북이가 수진에게 희나의 손목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희나는 재빨리 손을 뒤로 돌렸지만 이미 몇몇은 희나가 가정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뭐, 이건 아버지의 작품이 아니지만 틀린 사실은 아니니 희나는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뭐, 말실수한 건 미안. 그치만 이 녀석이 아무리 착해도 남자는 남자야.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여자애가 혼자서 쳐들어오고 그러면 안 되지.”
“그래, 이거는 수진이 말이 맞아. 희나 너는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저도 알 건 다 알아요. 그리고 선생님은 위험하지 않아요.”
“당연히 이놈은 위험하지 않지. 그건 우리가 더 잘 알아.”
희나가 반박하자 거북이 웃으면서 등을 팡팡 두드렸다.
“이놈은 너한테 손 못 대. 그러니까 불쌍하잖아. 넌 잘 모르겠지만- 남자는 이런 상황에 참기 힘들어. 이놈 안 그래도 여친이랑 헤어진 지 좀 돼서 쌓였을 건데.”
그런 방향으로는 생각하지 못해 의표를 찔린 희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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