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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25화 (25/140)

25화. 한밤의 침입자 (2)

주변에 학생들이 많아 혹시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 염려스러웠지만 다행히 희나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저 앞에서 걷고 있는 진혁은 학생들의 인사를 받기도 하고 간간이 웃으며 재연과 걷고 있었다. 표정이 딱히 밝진 않았지만 어둡지도 않았다.

‘내가 학교에 안 왔는데 신경도 안 쓰는 모양이네.’

희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자신은 이렇게 괴로운데 진혁은 다른 세상에 속한 것처럼 즐거워 보여 괜히 속상해졌다.

역에 도착한 진혁을 따라 희나도 전철을 탔다. 그는 반포역에서 내린 뒤 고급 아파트 단지로 걸어 들어갔다. 재연은 여전히 함께였다.

이쯤 되니 여기서 과외를 하는 건지 재연과 데이트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들킬 우려가 커서 단지 안으로까지 따라갈 수는 없었다. 희나는 길을 건너서 단지 입구가 잘 보이는 버거킹 1층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염없이 기다렸지만 여섯 시에 들어간 진혁은 열 시가 되도록 나오지 않았다.

‘혹시 저기가 저 선생 집 아냐?’

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보기에 재연은 진혁에게 명백히 호감이 있었다. 둘 다 성인남녀이니 사귀게 되었다면 서로의 집에 묵는 것이 이상할 것은 없었다.

희나는 우울해하며 그 생각을 몰아냈다. 그는 여자 친구가 생겼다면 희나와 좀 더 결벽하게 선을 그을 성격이다. 그런 부실한 이유에 진심으로 납득한 것은 아니지만 희나는 둘이 사귀고 있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

구실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자신이 이렇게 비참한데 진혁이 재연과 희희낙락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기다림이 길어져 다른 출구로 이미 나가 버린 게 아닐까 불안해질 무렵, 드디어 기다리던 진혁이 그녀와 함께 걸어 나왔다. 재연의 복장이나 들고 있던 가방을 다시 가지고 나온 걸 볼 때 이곳이 그녀의 집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희나는 안도했다. 서둘러 트레이를 치우고 역으로 가는 진혁의 뒤를 밟았다.

또다시 전철에 올라타 희나는 둘을 관찰했다. 다행히 계속 함께 가지 않고 고속터미널역에서 재연은 내렸다. 진혁은 이수역에서, 그리고 사당역에서 한 번 더 갈아탔다.

진혁이 내린 최종 종착역은 낙성대역이었다. 어디에 살고 있는지 몰랐는데 상당히 먼 곳에 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학교에서 먼 만큼 진혁의 집에 묵어도 누군가에게 들킬 우려가 적다.

희나가 아르바이트하는 주유소가 있는 사당과 가까운 점도 좋았다. 희나는 오늘 처음으로 입가에 미소를 띠며 뒤를 따랐다.

역사에서 내려 시장 길을 통과해 5분쯤 걷자 한적한 주택가로 접어들었다. 진혁은 나지막한 주택으로 들어갔다. 희나는 그가 2층에 있는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전봇대 뒤에 숨어서 확인했다.

집을 확인한 건 좋지만 이다음이 문제다. 그 고지식한 성격으로 볼 때 희나가 재워달라고 하면 경악하며 거부할 것이 자명하다.

희나가 망설이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꺼내 보니 진혁이라 깜짝 놀랐다.

고민하는 사이 끊겼으나 곧 다시 걸려왔다. 계속 울리는 휴대폰을 보면서 희나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렇지 않았다.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었던 거다.

희나는 전화를 받는 대신 진혁이 들어간 집 대문으로 갔다.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인터폰에 카메라는 달려 있지 않은 모양이다. 안쪽에서 진혁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희나는 대답하지 않고 벨을 몇 번 더 눌렀다.

얼마 후 현관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살짝 열렸다.

“누구……”

진혁의 말이 멈췄다.

“네가 여긴 어떻게?”

야구 모자를 눌러쓴 채 고개도 들지 않았지만 그녀임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너 괜찮은 거야? 학교는 왜 안 왔어? 집은 어떻게 알고 왔어?”

“아까 하교할 때부터 몰래 따라왔었어요.”

“뭐? 왜 안 부르고…….”

진혁이 말을 하다 멈췄다. 자신이 재연과 줄곧 함께 있었음을 상기한 것이다.

“전화를 하지 그랬어. 그럼 과외 하는데도 계속 기다린 거야?”

“네. 그보다 문 밖에 계속 세워둘 거예요?”

희나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그러자 모양 좋은 입술이 난감해하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할 얘기가 있으면 같이 나갈게.”

“할 얘기 같은 거 없어요.”

“그럼 왜 여기까지 왔는데?”

“나 선생님 집에서 재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단호한 답변이 날아왔다. 그녀의 제안에 진혁의 목덜미가 살짝 붉어진 것이 보였다.

“왜 말도 안 돼요? 어차피 남는 방도 있을 거 아니에요.”

말하며 희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그의 얼굴을 살폈다. 예상대로 진혁은 허점을 찔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여동생이랑 같이 살았다면서요. 다 크고 서로 싫어하는 남매가 한 방에서 자진 않았겠죠.”

“…….”

“어차피 남는 방이니 거기에 재워 줘요. 고시원비 낭비할 필요 없잖아요.”

“너 네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는 거야?”

진혁은 잠시 텀을 두고 살짝 더듬으면서 말했다.

“나랑 동…… 동거하겠다는 거잖아.”

“알고 하는 말이에요.”

“내가 난감해하는 걸 보면서 재밌어하는 거라면 다른 방법도 많잖아. 이런 장난은 너무 심한데.”

“장난하는 거 아니에요. 정말 재워 달라고 온 거예요.”

“하아…….”

진혁은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너와 동거하다가 학교에 알려지면 내 입장이 어떻게 되는지 알잖아. 왜 이런 억지를 부리는 거야.”

“안 걸릴 거예요. 그리고 설령 걸려도 결백하면 밝혀진다면서요?”

“그걸 무슨 수로 밝히겠어. 어쨌든 미안하지만 돌아가.”

예상대로 반응은 단호했다. 그러나 희나는 포기하지 않고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안 돌아갈 거예요.”

“뭐라고 해도 안 들여보내 줄 거야.”

“선생님 들어가서 문 닫아도 나 안 가요. 문 앞에서 밤새울 거야.”

희나는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경찰이라도 부를 거예요?”

그는 희나를 내려다본 채 말이 없었다. 계속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 희나를 보고 뭔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것 같기도 했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설명해.”

“이유 같은 거 없어요.”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희나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강간당할 뻔해서 도망쳐 나왔다는 이야기 같은 거 자신의 입으로 하고 싶지 않았다.

진혁은 말없는 희나를 보며 긴 한숨을 내쉬더니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왔다.

“천호로 데려다줄 테니까 따라와.”

“안 간다니까요!”

“고집 피우지 마.”

희나가 반항하자 진혁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희나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아, 아파!”

“그 정도로 세게 잡지는 않았잖아.”

그녀의 격한 반응에 심드렁하게 말하던 진혁의 입매가 굳었다.

밀려 올라간 청 남방의 긴 소매 아래로 희나의 가느다란 손목이 드러나 있었다. 하얀 피부 위에 피멍 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

희나는 진혁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소매를 내려 멍 자국을 가렸다. 시선을 떨어뜨린 그녀의 머리 위로 떨리는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너 이거…… 어떻게…….”

굳게 입을 다문 채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 그녀의 얼굴을 진혁이 잡아 올렸다. 그러자 모자 아래로 숨겨져 있던 희나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밤새 울어서 붓고 붉어져 버린 눈가, 새빨갛게 충혈 된 눈은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으려고 부릅뜨고 있었다.

충격을 받은 듯한 진혁의 시선을 외면하며 희나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안 돌아가요.”

“…….”

“안 갈 거야.”

잠시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진혁은 잡고 있던 그녀의 얼굴을 놓았다. 그리고 뒤돌아서더니 문손잡이를 돌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들어와.”

진혁은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집 안으로 맞아들였다. 곧 두 사람이 들어간 현관문이 조용히 닫혔다.

***

[그럼 시청자 여러분- 다음 주에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MC의 신나는 엔딩 멘트가 방송의 끝을 알렸다. 희나는 하품을 하며 벽에 걸린 심플한 벽시계를 올려보았다.

벌써 새벽 한 시다. 희나는 벌써 일곱 시간째 꼼짝도 하지 않고 TV를 보고 있었다.

IPTV가 ‘다음 화를 재생할까요?’라는 메시지를 띄웠으나 희나는 ‘아니오’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너무 오래 앉아 있어 뻐근한 몸을 일으켰다.

3평 정도 되는 자그만 거실은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다. 희나는 거실과 연결되어 있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 역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늘어서 있는 깨끗한 유리컵을 집어 들어 물을 마셨다. 그리고 다시 아무도 없는 거실로 돌아와 덩그러니 앉았다.

이제 TV도 지루한데 잠은 오지 않는다. 진혁은 한 시가 돼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어제 진혁의 집으로 들어온 뒤 둘은 한동안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었다. 진혁은 쉽사리 물어오지 못했고, 희나도 설명을 바라는 그의 표정을 보고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가 버티는 사이 자정이 지나자 진혁도 포기한 듯하더니 열쇠를 건네주곤 나가버렸다. 그리고 만 하루가 지난 여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이래서야 집주인을 내몰아버린 셈이다.

희나는 무릎을 세워 모아 품에 안고는 힘없이 얼굴을 묻었다. 뭐 알콩달콩 사는 것까지 기대한 건 아니어도 이렇게 대놓고 피해 다닐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조금은 반가워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무리한 요구를 한 모양이다.

잠시 그 상태로 웅크리고 있다가 희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잠은 오지 않지만 일단 방에 돌아가 있을 생각이었다.

그녀가 진혜의 방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현관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열쇠를 가지고 나갔을 텐데, 웬 벨이람.’

툴툴거렸지만 솔직히 반가웠다. 신나게 문을 연 희나는 놀라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문 밖에는 진혁이 아니라 흥미로운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고 있는 낯선 커트머리의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희나를 쳐다보더니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우와- 대박. 진짜 무진장 예쁘잖아?”

“……누구세요?”

난데없이 등장한 낯선 사람에 희나는 당황했다. 그녀가 희나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또 다른 사람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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