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한밤의 침입자 (1)
‘어떻게…… 어떻게 내 이름을…….’
놀란 그녀를 보고 큭큭 웃으며 선규는 다시 귓가에 대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너…… 이름 유진혜 아니잖아. 너 이름 희나잖아. 교복 명찰 봤어.”
희나는 방심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명찰이라니, 그런 사소한 것을 신경 쓰지 않다니.
선규의 기분 나쁜 목소리가 계속해서 낮게 속삭였다.
“처음 봤을 때부터 남매라기엔 분위기가 요상해서 관찰 좀 했지. 그 남자랑은 무슨 관계야? 사귀는 남자? 아니면 좋은 거 해주고 보살핌 받는 거야?”
굳어 버린 희나가 비명을 지르지 않을 거라 확신했는지 그의 손이 막고 있던 입을 놓아주었다. 희나는 고개를 저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니야, 그런 거…….”
“아니긴 뭐가 아니야. 거짓말하지 마.”
어둠에 익숙해진 그녀의 눈에 웃고 있는 치아만 하얗게 보였다. 선규의 은근한 목소리가 희나의 귓가를 때렸다.
“나 어제 너희 둘이 모텔에서 나오는 거 봤어.”
희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뻐서 잘해주려고 했더니 어린 게 벌써부터 발랑 까져가지고 모텔이나 다니고…… 가출이나 하고. 너 같은 애들은 혼 좀 나봐야 되지. 이런 야한 몸으로 살랑거리니까 남자들이 눈 돌아가는 거야.”
그러면서 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희나가 반사적으로 몸을 뒤틀자 그가 위협하듯 말했다.
“움직이지 마-. 어차피 많이 해봤을 거 아냐. 이렇게 예쁜데 그 자식은 얼마나 신나서 해댔겠어? 부럽네.”
귓가에 파고드는 추잡한 말이 너무나도 충격적이다. 바들바들 떠는 그녀를 보면서 그는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니까 나한테도 한 번 주라. 그 샌님 같은 놈보다 오빠가 더 잘해줄게. 잘해주면 나도 용돈 좀 줄 수 있어.”
그러면서 옷 속으로 손이 파고들어 온다. 그 끔찍한 느낌에 희나는 온몸에 닭살이 돋는 것 같았다.
‘시, 싫어……. 싫어!’
이런 놈한테 당하다니 죽는 것이 낫다. 희나는 있는 힘껏 몸을 일으켜 눈앞에 보이는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정신없이 소리를 지르며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누군가, 아무나 제발 듣고 와주기를 바라며 팔다리로 정신없이 벽을 두들기고 난동을 부렸다.
“이런 미친년이…….”
선규가 마구 휘두르는 희나의 양 팔목을 붙잡아 눌렀다.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팔목이 부러져 꺾일 것처럼 아팠지만 희나는 저항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때 그녀의 귀에 구원과도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뭐야-.”
얇은 벽을 뚫고 옆방에서 중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불을 켜는 기척이 있었다. 옆방 대학생이 난동에 잠이 깬 모양이다.
선규는 몇 마디 욕지기를 내뱉더니 희나의 몸 위에서 광속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황급히 문을 열고 나갔다.
그가 나가는 것과 동시에 옆방에서도 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 뭐예요? 이 새벽에 왜 저런대요? 무슨 일 있어요?”
“제가 방금 들어가 봤어요. 이 방 학생이 악몽을 꿨나 봐요. 괜찮다고 하네요.”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목소리에 구역질이 격하게 치밀어 오른다. 분노와 공포로 팔다리가 바들바들 떨렸지만 희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너 괜찮아?”
물어 오는 옆방 대학생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녀는 쓰러지듯 달려 화장실로 갔다.
그리고 화장실 문을 잠근 뒤 우웩 소리와 함께 변기에 속에 든 것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온갖 감정이 뒤섞여 내장이 역류하는 것 같다. 그녀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게워냈다.
한참을 켁켁거리며 속을 비워 낸 그녀는 탈진해 바닥에 주저앉았다.
힘없이 떨어뜨린 눈에 아직까지 떨리고 있는 자신의 가느다란 팔다리가 보였다. 빌어먹게 약하다.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을 정도로. 아무도 보호해주지 않는데, 혼자서 살아 나가는 수밖에 없는데 너무 약하다.
희나는 무력감에 분해서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흘렸다. 그 따위 더러운 인간들 다 죽어버리면 좋겠다.
한동안 그렇게 앉아 있다가 그녀는 벌벌 떨며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복도에는 선규도, 아까 그 대학생도 이미 없었다. 방으로 돌아가려다 희나는 멈칫했다.
‘방에 있을지도 몰라.’
대학생을 보내고 안에 들어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놈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니까.
희나는 식당으로 걸어가 서랍에 있는 조리 도구들 중에 식칼을 꺼내 들었다. 잘 손질된 식칼은 어둠 속에서도 파랗게 날이 서 있었다.
‘손대려고 하면 죽여버릴 거야.’
그녀는 살인자가 되어도 무섭지 않을 만큼 증오와 두려움으로 격해져 있었다.
희나는 떨리는 발걸음으로 돌아와 문을 확 열었다. 다행히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선규가 들어가서 숨을 만한 공간도 없는 방이었지만 문틈, 침대 밑, 옷장까지 샅샅이 살핀 뒤 그녀는 문을 잠그고 의자를 끌어다 문 앞에 놓았다.
저 따위 가벼운 의자는 아무 의지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문도 잠가 봤자 그는 모든 열쇠를 가지고 있다.
희나는 벽장에 몸을 기대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한 손으로 칼을 들고 문을 겨눈 채 벌벌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천천히 화면 잠금을 풀고 1, 1, 2를 누르던 희나의 손이 통화 버튼을 누르기 직전에 멈췄다. 아까 전에 선규가 했던 말이 불현듯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그 남자랑 무슨 관계야?”
그 비겁한 남자는 경찰서에 가면 자신의 혐의를 벗어나기 위해 내가 원래 문란한 여자라는 식으로 몰아가겠지. 그 근거로 선생님의 이야기를 꺼낼 거야.
희나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진혁의 이름으로 계약했으니 신분이 탄로 나는 건 순식간이다. 겨우 2주 된 교생이 보증을 서줬다는 것도 의심스러운데 모텔에서 나오는 걸 봤다는 말까지 해버리면 끝장이다.
경찰은 우리 둘의 관계를 원조교제 같은 걸로 의심할지 모른다. 아니, 둘이 그냥 구설에 오르는 순간 선생님은 끝장이다. 교생 실습은 끝날 거고 어쩌면 신문에 나 버릴지도 모른다. 아무 일 없었다 해도 누구도 믿지 않을 거다.
희나는 절망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경찰에는 못 가.’
아직 정말로 당한 건 아니니 선규는 크게 처벌받지 않을 게 뻔했다. 나쁜 건 선규인데 진혁의 삶만 망가뜨리게 되고 말 뿐이다.
그녀는 진혁의 부드러운 미소와 다정함을 떠올렸다. 밤새 힘들어하면서도 그녀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으려 했던 결벽함. 그에게 그렇게 할 순 없었다.
희나는 힘없이 휴대 전화를 내려놓았다. 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흘러넘쳤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꼭 쥐고 있는 칼을 놓지 않았다.
‘다시 돌아올지도 몰라.’
여전히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렇게 피곤해서 잠이 들었었는데 더 이상 잠은 조금도 오지 않았다. 희나는 두 손에 칼을 꼭 쥔 채 온몸을 잔뜩 웅크리고 눈물을 흘리며 밤을 새웠다.
온몸을 마비시킬 것 같던 공포는 해가 뜰 즈음이 되자 조금 누그러들었다. 자그마한 창문으로 아침 햇살이 들어오자 희나는 못 박힌 듯 쳐다보고 있던 문에서 간신히 시선을 떼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밤새 긴장해서 뻐근해진 몸을 움직여 일어섰다. 떨리는 손으로 벽장을 열고 안에 들어 있는 보스턴백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벽에 걸려 있는 교복과 이런저런 물건들을 꺼내서 닥치는 대로 쑤셔 넣었다.
한시라도 이곳에 더 있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다. 어디로든 빨리 나가고 싶었다.
옷을 갈아입던 희나는 양 팔목에 손자국 모양으로 새파란 피멍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걸 보고 나니 감각이 돌아온 듯 통증으로 욱신거리기 시작한다.
반팔 셔츠 차림이라 멍 자국이 심하게 눈에 띄었다. 희나는 헐렁헐렁한 남방을 위에 걸쳐 입었다.
큼직한 보스턴 백 하나에 단출한 짐이 전부 들어갔다. 올 때도 여기에 담아 왔으니 당연하다. 집에 싸 두었던 짐들을 시간이 없어 옮기지 못한 것이 다행이었다.
희나는 뻣뻣한 걸음걸이로 복도를 빠르게 통과했다. 입구 근처까지 왔을 때 작은 유리 창구 너머로 코를 골면서 졸고 있는 선규의 얼굴이 보였다. 그 태평한 모습에 참을 수 없는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그를 쏘아보며 신발장에서 신발을 꺼내 신는데 인기척을 느낀 그가 깨어났다. 그는 기분 나쁜 쥐새끼 같은 눈을 뜨고 이쪽을 보다가 희나가 메고 있는 짐을 보더니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 얼굴은 곧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아직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것, 도망 나가는 것을 볼 때 귀찮은 문제가 없으리란 걸 안 것이다.
그 뻔뻔스럽고 악질적인 행태에 희나는 욕지기와 함께 억울함이 치밀어 올랐다. 나쁜 건 전부 저 자식인데, 이쪽이 도망쳐야 한다는 불공평한 현실이 비참했다.
희나는 온몸 가득 차오르는 혐오감을 억누르며 눈을 돌린 채 고시원을 걸어 나왔다.
나왔지만 갈 곳은 없었다. 학교에도 갈 수 없다. 밤새 눈물을 흘려서 눈이 부어 있었기 때문이다. 운 흔적을 들키는 건 최악이다. 약한 면모는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희나는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PC방으로 갔다. 구석에 자리를 잡고 엎드려 잠시 피로한 눈을 붙였다.
깨어났을 때는 열한 시 즈음이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전화와 메시지가 몇 통이나 와 있었다.
담임과 지훈에게서 온 것이었다.
「왜 학교 안 와? 무슨 일 있어?」
못 간 사정을 설명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지금은 누구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희나는 한숨을 내쉬고 휴대폰을 그대로 뒤집은 채 다시 자리에 엎드렸다.
또 잠시 선잠이 들었다가 깨니 오후 두 시를 지나가고 있었다. 여섯 시간 정도를 잔 셈인데 허리만 아프고 피로는 그다지 가시지 않았다. 다시 휴대폰을 켰다가 바로 뜬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고 희나는 멈칫했다.
「괜찮아?」
진혁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별 내용 없이 짧은 메시지일 뿐인데 보자마자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되었는데 떠오르는 게 진혁뿐이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오직 한 사람.
희나는 진혁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메시지 같은 걸로 미주알고주알 털어놓고 싶지 않아 답장하지 않고 하교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학교가 끝나기 30분 전, 희나는 학교 앞 베리베리 파르페로 갔다. 지훈이 선물한 야구 모자로 얼굴을 조금이나마 가리고 창가에 앉아 교문을 보았다.
하교 시간이 되자 아이들이 교문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 부산한 틈을 뚫어지게 보다가 진혁이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에게 전화를 하려던 희나는 손을 멈추었다. 그의 옆에는 재연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월요일에는 과외를 하러 가야 한다고 말했던 게 떠올랐다. 자신을 위해서 시작한 건데 거기에 대고 제멋대로 쉬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희나는 그를 그냥 따라가기로 하고 수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고개를 숙인 채 그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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