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그리고, 데이트 (2)
더 틱틱대기도 뭐해서 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을 잡은 채 둘은 상점가를 걸었다. 지훈이 몸을 구부려 희나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봐봐. 걸어가는데 사람들이 다 쳐다보지? 니가 너무 예뻐서 그래.”
말을 듣고 살펴보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한 번씩 이쪽을 훑고 있었다.
‘널 보는 거 같은데.’
그런 말이 튀어나올 뻔해서 희나는 뒷말을 삼켰다. 사람들이 다 너만 봐-, 아냐 너만 봐- 이런 닭살 커플이나 할 법한 상황으로 흘러가는 건 생각만 해도 손발이 오그라든다.
곧 지훈이 한 가게로 들어갔다.
귀여운 2등신 흑인 캐릭터들로 장식된 세련된 가게였다. 작게 나뉜 선반들이 무수히 벽에 쌓여 있고 칸칸마다 모자가 들어 있었다. 꽤 센스가 좋은 매장이다.
지훈은 신난 표정으로 야구 모자를 골랐다. 희나도 옆에서 구경하다가 가격표를 보고 금세 흥미를 잃어버렸다. 모자 하나가 희나가 입고 걸치고 다니는 옷들보다도 훨씬 비싸다.
그는 알록달록 현란한 모자들을 이것저것 써보더니 하나를 골라서 쓰고 물었다.
“어때-? 어울려?”
노란 챙에 본체에는 기하학적 무늬가 들어간 모자였는데 지훈의 개성 있는 분위기에 잘 어울렸다. 희나가 솔직히 고개를 끄덕이자 지훈이 뭔가를 희나에게 푹 씌우면서 말했다.
“자, 커플 모자-. 역시 너한테도 어울리네-. 얼굴이 작아서 모자가 좀 큰가?”
지훈은 희나의 몸을 휙 돌려서 벽에 붙어 있는 전신 거울에 비췄다. 지훈이 쓴 모자와 같았지만 챙만 분홍색이었다. 둘이 같은 모자를 쓰고 있으니 정말 고등학생 커플처럼 보인다.
“이거 봐. 쩔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지?”
희나의 생각을 읽은 듯 지훈이 귓가에 얼굴을 바짝 대고 말했다. 어색해진 희나가 모자를 벗으려고 하는데 지훈이 팔목을 잡아 저지하고는 휴대폰을 앞으로 휙 들어 올렸다.
“여기 봐- 여기. 이쁘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페이스에 휘말려 셀카를 찍혀버렸다. 지훈은 새초롬한 표정의 희나를 보고도 계속 싱글벙글이었다.
그가 떨어져 나가자 희나는 잽싸게 모자를 벗었다. 소녀스러움과 영 먼 인생을 살아왔더니 분홍색을 보면 왠지 등이 간질간질하다.
그러나 지훈은 희나가 내려놓은 모자를 받아 들고 계산대로 갔다. 희나는 계산하는 지훈을 말리려고 했지만 그럴 틈도 없이 모자를 사버렸다. 그리고 매장 밖으로 나온 지훈이 다시 모자를 씌우려고 하는 걸 희나가 저지했다.
“나 모자 사달라고 한 적 없어. 이런 비싼 모자 받을 생각도 없고.”
“그러지 말고 한 번만 써줘. 응? 내가 보고 싶어서 그래-.”
지훈은 애교를 부리며 끈질기게 말했다. 한 번만 써 달라는데 완고하게 버틸 명분도 없어, 희나는 또 페이스에 휘말려 모자를 써버렸다.
커플 모자까지 장착하자 완전 신이 났는지 지훈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그리고 부담스러워하는 희나를 고급스러워 보이는 태국 요리 전문점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자 지훈은 희나를 뚫어질 정도로 쳐다보며 웃었지만 희나는 점점 눈을 마주치기가 민망했다.
그냥 맘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자는 가벼운 마음이었는데 너무 좋아하니까 미안해진다. 남자 친구를 사귈 생각도 없고, 그럴 만한 형편도 아니다. 뭘 원하는지 잘 알고 있는데 그걸 줄 생각이 없으면서 신세를 지기가 점점 껄끄러워지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가만히 딴 곳만 보고 있는 희나를 바라보던 지훈이 툭 던지듯 말했다.
“너 남자가 진짜 있긴 있나 보네?”
희나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말의 내용과 어울리지 않게 지훈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저번 주까진 정말 나 싫어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멀리하는구나 했는데, 지금은 별로 나 안 싫어하는 거 같거든. 은근슬쩍 어울려주기도 하고. 그런데 마음이 닫혀 있는 거 같아.”
족집게다. 희나는 목이 타서 앞에 놓인 물 잔을 집어 마셨다.
“아무래도 내가 싫다기보다는 누군가에게 의리를 지키려 하고 있는 거 같아. 전에 말한 남자 친구?”
이 이상 휘둘리지 않으려고 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야?’
“네가 모르는 사람.”
“흠……. 그래? 어떤 사람인지 내가 맞혀볼까?”
맞혀보겠다는 말의 의미가 불명해서 희나는 눈썹을 모은 채 지훈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말에 집중하는 듯하자 그는 미소를 띠우면서 조용히 말했다.
“누군지는 몰라도 분명히 바보 같고 둔감하고 가엾은 놈이겠네.”
말을 듣는 순간 희나는 뜨끔했다. 그냥 험담하는 것일지 몰라도 그가 말한 것이 진혁에 대한 희나의 평가와 거의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며 2차로 뜨끔했다.
‘남자 친구도 아닌데 왜 선생님을 떠올린 거야.’
희나는 그런 속내를 들키지 않기 위해 말을 얼버무렸다.
“무슨 소리야. 아무렇게나 말하기는.”
“아무렇게 말하는 거 아닌데-. 다 근거가 있어.”
지훈은 탁자에 놓인 희나의 손을 잡아끌더니 손가락을 세 개 폈다.
“일단 바보 같은 건 확실해. 이렇게 예쁜데 다른 남자 만나러 나오게 놔두고 있잖아. 나라면 딴 놈 만나는 꼴 절대 못 볼 건데.”
그리고 손가락을 하나 접으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만나는지도 모르고 있을 테니 둔감할 거고…….”
두 개째 손가락이 접혔다. 그리고 그는 세 개째 손가락을 접는 대신 희나의 팔목을 잡아끌어서 손등을 입에 가져다 대면서 말했다.
“그리고 좀 있으면 나한테 여자 친구 뺏길 테니 가엾은 놈이야.”
손등에 입술이 닿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희나는 지훈의 예쁜 눈에서 시선을 떼어내고 팔을 뿌리치며 쏘아붙였다.
“느끼하게 굴지 마, 바보야. 누가 너랑 사귄대?”
하지만 지훈은 앙탈을 부리는 희나를 보고 픽 웃을 뿐이었다. 여자를 많이 사귀어봐서 그런지 혀에 기름이라도 바른 듯 저런 낯 뜨거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척척 한다.
그 대쪽 같은 마이페이스에 휘말려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열한 시였다. 코엑스 몰은 이미 닫았고 희나와 지훈이 마주 앉아 있는 타이 요리점도 닫을 시간이 되었다.
손을 잡은 채 코엑스 몰에서 나와 둘은 바이크를 세워 둔 빌딩 주차장 쪽으로 걸었다.
곧 주차장에 도착하자 지훈은 희나의 모자 위로 헬멧을 씌워주며 물었다.
“어때- 오늘 재미있었어?”
희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솔직히 시간 가는 줄도 모를 정도로 재미있었다. 영화도 끝내줬고, 요리도 맛있었다. 받은 모자도 솔직히 마음에 든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어도 왠지 마음이 불편했다.
“다음에 나랑 또 놀아줄 거야?”
진지한 눈동자를 쳐다보던 희나는 곧 그 열기에 다시 시선을 떨구고 말았다. 그리고 망설이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친구로서라면 괜찮…….”
“친구로서는 싫어.”
친구가 전혀 없는 희나로서는 나름 용기를 내서 말한 건데 단호하게 확 잘려버리자 무안해졌다.
희나가 놀란 듯 눈을 조금 크게 뜨자 지훈이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희나의 머리카락에 손을 얹었다.
“넌 한 번 그렇게 하면 평생 친구로만 생각할 거 같아서 싫어.”
“…….”
“방심하면 친구가 될 거 같으니까 확실히 선을 그어놔야지.”
중얼거리듯이 말하는가 싶더니 지훈의 얼굴이 확 다가왔다. 그리고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이마에 따뜻하고 촉촉한 것이 닿았다.
그가 이마에 키스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놀란 희나가 팔을 휘둘러 때리려는 것을 잽싸게 피하며 지훈은 웃었다.
“내가 이런 거 싫다고 했잖아!”
“친구로 생각하지 말라고 그러는 거야. 화내지 마-. 화내지 마.”
입이 잔뜩 나온 희나를 토닥토닥 달래면서 지훈은 팔을 잡아끌었다.
“자, 그럼 이제 가자. 집까지 데려다줄게.”
“아니, 됐어.”
“그러지 말고 타. 이제 안 그럴게, 응?”
“그런 게 아니라 나 바로 아르바이트하는 데로 갈 거라서.”
희나는 휴게실에서 자고 아르바이트를 할 생각으로 그렇게 말했다. 이대로 집에 가서 첫차를 타고 주유소로 가려면 시간 맞추기가 힘들다.
“어딘데? 태워다 줄게.”
지훈의 제안에 희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냥 그러기로 하고 뒤에 올라탔다. 바이크를 탄 채 주유소까지 가기는 좀 민망해서 주유소 도착하기 한 50m쯤 전에 내렸다.
희나를 내려 준 지훈은 저만치 보이는 주유소를 흘긋 바라보며 물었다.
“저기서 일하는 거야? 힘들겠다.”
“태워다줘서 고마워. 잘 가.”
냉랭하긴 했지만 드물게 표하는 감사의 말이 기쁜지 지훈은 하루 종일 떠나지 않던 웃음을 다시 얼굴에 한가득 띄웠다. 그리고 희나의 머리에 손을 얹고는 말했다.
“그래- 그럼 갈게. 아르바이트 힘내.”
“어, 잘 가.”
“그럼 다음 데이트 기대할게-.”
그리고 지훈은 손을 흔들더니 바이크에 시동을 걸었다. 그러더니 출발하기 전에 킥킥 웃으며 다짐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꼭 키스해야지.”
“이제 절대 데이트 안 해!”
발끈해서 못 박는 희나를 뒤로하고 지훈은 손을 흔들며 바이크를 출발시켰다. 희나는 그가 준 모자가 든 쇼핑백을 든 채 휙 돌아서서 주유소 쪽으로 씩씩거리며 걸어갔다.
오늘 하루는 참 많은 일이 있어서 정신이 없었다. 남자 친구도 아닌 다른 두 남자와 모텔에 갔다가 데이트를 하다니 뭔가 배덕을 저지른 것 같다.
희나는 다정하게 손을 흔들던 지훈을 생각하다가 곧 이어 휙 돌아서 도망치듯 가버리던 진혁을 떠올렸다. 생각하니 괜히 화가 난다.
‘바보 멍청이 둔탱이 아저씨 같으니.’
진혁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희나는 속으로 계속 그의 욕을 하며 주유소 안쪽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다.
휴게실에서 쪽잠을 자고 부스스 일어나 맞은 일요일은 하루 종일 손님이 몰렸다. 날씨가 좋아져 교외로 나가는 사람들이 많은지 가족들이 탄 차량이 끝도 없이 서울을 빠져나가고 들어오고 있었다.
딴생각할 틈 없이 바쁘게 일한 희나는 파김치가 된 채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피로가 몰려와 침대에 젖은 솜처럼 축 늘어져 잠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자다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희나는 눈을 떴다.
순간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침대 옆에 누군가가 있었다.
흠칫해서 비명을 지르려는데 그 기척에 희나가 일어난 것을 알았는지 두터운 손바닥이 그녀의 입을 거칠게 눌렀다.
“얌전히 있어. 나쁘게는 안 할 테니까.”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공포에 질린 가운데서도 희나는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몸을 누르고 있는 것은 바로 고시원 총무인 선규였다.
경악한 희나의 얼굴 위로 뜨거운 숨이 휙 끼쳐왔다. 진한 술 냄새로 코가 마비될 것 같다.
너무 놀라 몸이 뻣뻣해진 희나의 몸 위로 그의 몸이 덮치듯 올라왔다.
이건 정말로, 장난이 아니다.
상황을 파악한 희나가 거세게 저항하려는데 끈적한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인다.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을 수 있을 턱이 있나. 희나는 얼굴을 마구 휘저으며 두 팔로 묵직한 몸을 밀어내려 했다. 그때였다.
“주희나.”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고 순간 반항하던 희나의 팔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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