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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22화 (22/140)

22화. 그리고, 데이트 (1)

희나는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고등학생이 데이트 같은 간지러운 단어를 잘도 아무렇지 않게 입에 올린다.

“데이트는 무슨 데이트야. 어차피 학교에서 맨날 보는데.”

[학교에서 보는 거랑 다르지-. 그리고 학교에는 다른 애들도 많이 있잖아. 난 너랑 둘이 놀고 싶어.]

“그치만 난 데이트 같은 거 할 시간 없어.”

[아르바이트 쉬는 날 없어?]

“없어. 평일엔 카페에서 일하고 주말엔 주유소에서 새벽부터 풀로 일해.”

[……너 그러다 과로로 쓰러지겠다.]

“그러니까 데이트 같은 거 못 해.”

통화하는 사이에 사당으로 가는 버스가 네 대째 지나갔다. 희나는 다음 건 꼭 타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딱 잘라 말했다.

[너 그럼 지금도 아르바이트 중이야?]

“아니, 가려고 기다리고 있어.”

[새벽부터 풀로 한다며?]

“……사정이 있어서 늦어진 거야.”

[그럼 오늘 아르바이트 못 간다고 해. 그리고 지금 데이트하러 가면 되지-.]

속편한 소리를 한다. 희나가 안 된다고 말하려는데 지훈이 빠른 속도로 말했다.

[데이트 안 해주면 아까 말한 거 안 해줄 거야!]

“그럼 날 위험해지게 두겠다는 거야?”

[아니, 대신 아침에 가서 내가 데려오고 집에 갈 때도 데려다주고 계속 붙어 있으면 되지. 둘 중에 하나 골라.]

지훈의 쓸데없이 극진한 근성으로 볼 때 자신의 말을 지킬 가능성이 높았다. 난감해진 희나는 손끝을 잘근잘근 깨물며 고민했다.

어차피 늦은 데다 주유소 아르바이트는 몇 년이나 성실하게 해왔기 때문에 하루 정도 쉬는 건 이해해 주긴 할 거다. 데이트 정도로 그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좋은 거다.

하지만 어제 집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교복 차림인 것이 마음에 걸렸다. 고시원에 가도 아르바이트하러 갈 때 입고 가는 트레이닝 복뿐 데이트할 때 입을 만한 옷 같은 건 하나도 없다.

“그치만 지금은 좀 그런데-.”

[너 뭐 하고 있는데?]

“그냥, 좀 이런저런…….”

[거짓말이네. 지금 갈게.]

희나가 성의 없이 둘러대자 지훈이 칼같이 잘랐다. 결국 희나는 할 수 없이 정직하게 말했다.

“나 지금 교복 입고 있어. 몰골이 말도 아냐.”

[하하. 그런 거도 신경 써주는 거야? 신경 쓰지 마-.]

“……좋아. 그럼 네 맘대로 해.”

마지못해 한 말에 지훈은 뛸 듯이 기뻐하더니 어디인지 듣고 [30분 안에 갈게-!]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희나는 곧 주유소에 전화해 오늘 사정이 있어서 아르바이트를 쉬겠다고 말했다. 예상대로 사장님은 별다른 싫은 기색 없이 그렇게 하도록 해주었다.

기다리는 동안 시간이 붕 떴으나 고시원에 가면 선규가 앉아 있을 시간이고 로데오거리 주변은 왠지 꺼림칙했기에 희나는 그냥 버스 정류장에 계속 앉아 있었다.

그렇게 정확히 30분 정도 지났을 무렵, 멀리서부터 바이크 한 대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버스 정류장이었기 때문에 희나는 터덜터덜 걸어서 모퉁이 쪽으로 갔다. 바이크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희나의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오래 기다렸어?”

말하면서 지훈이 헬멧을 벗었다.

핑크빛 도는 갈색 머리에 현란한 무늬가 들어간 후드, 스키니에 하이탑까지 그야말로 아이돌 패션이다. 거기에 독특한 모양의 올 블랙 바이크까지 타고 있으니 압도적으로 눈길을 끈다.

하여튼 화려한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희나는 고개를 젓고는 툭 물었다.

“아니. 그런데 뭐 하려고?”

“글쎄-. 갑자기 잡힌 거라 생각해놓은 것도 없는데. 영화라도 보러 갈까?”

어차피 아무 생각도 없었던 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타.”

“어디까지 가려고?”

“데이트니까 동네 말고 다른 데로 가자. 코엑스 쪽으로 갈까?”

“마음대로 해.”

희나는 대충 대답하곤 지훈이 어느새 시트 박스에서 꺼내 준 헬멧을 푹 눌러썼다. 이 바이크도 자주 타다 보니까 익숙해져버렸다.

지훈은 언제나처럼 희나의 팔을 자신의 허리에 두른 뒤 바이크를 달렸다.

그리고 둘은 지하철을 타고 가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코엑스 몰에 도착했다.

“이런 건 얼마나 비싸?”

바이크에서 내리면서 희나가 물었다. 이런 게 있으면 아르바이트 갈 때 편하겠다 싶어서였다. 지훈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대답했다.

“글쎄. 그렇게 안 비싸. 튜닝까지 한 700만 원 들었나.”

희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비싸 봐야 한 100만 원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700만 원이라니. 엄두도 안 나는 액수였다.

‘부잣집 아들 같긴 했지만 그 정도로 금수저였나…….’

괜히 주눅이 든 희나는 바이크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몇 년을 하루도 쉬지 않고 밤낮없이 뼈 빠지게 일해 독립하려고 간신히 모은 돈이 1400만 원이다.

딱히 아르바이트 같은 걸 하는 것 같진 않으니 부모님이 사준 것일 거다. 이런 비싼 바이크를 척척 사주는 부모님이라니, 희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사는 세계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바이크를 주차시킨 지훈은 뒤에서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희나를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왜 그래? 나랑 둘이 있는 게 불편해?”

당연히 불편하지만 부탁하는 입장이라 마냥 까칠하게 대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희나가 입술을 앙다물고 눈을 딴 데로 돌리자 지훈은 쿡쿡 웃더니 볼을 잡아당겼다.

“그래도 데이튼데 얼굴 좀 펴, 이쁜아.”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 그리고 볼도 잡지 마-!”

희나가 볼을 잡은 손을 떼어내려고 팔을 들자 지훈이 손을 덥석 잡았다.

“자- 그럼 가자. 일단 영화 먼저 예매하자.”

“손은 왜 잡아!”

“데이트하는데 당연하지-. 오늘은 나랑 데이트하기로 했으니 싫어도 참아.”

그렇게 말하고 지훈은 제멋대로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희나는 잠깐 빼 보려고 했으나 저 옹고집을 돌릴 재간도 없고 빼려고 하면 할수록 세게 잡혀서 아플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할 수 없이 ‘뭐, 손 좀 잡힌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하고 스스로 납득하며 포기했다.

주말이라 사람들로 가득한 미로 같은 통로를 지나 두 사람은 메가박스에 도착했다.

희나는 조명들로 반짝반짝 빛나는 영화관을 보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는 지금까지 살면서 영화관에 와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초등학교 때는 돈이 없었고, 중학교 때는 돈과 시간이 다 없었고, 지금은 같이 갈 친구가 없다.

희나는 처음 와 본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휙휙 돌아가는 시선을 자제하며 태연을 가장했다.

지훈은 상영 영화가 표시된 화면을 보면서 말했다.

“뭐 보고 싶은 영화 있어?”

“별로 없어.”

보고 싶은 영화는커녕 아는 영화 제목조차 30개도 안 될 거다. 빈곤한 문화력을 들키고 싶지 않아 희나는 옆에 꽂힌 팸플릿을 하나 뽑아 읽는 척했다.

지훈이 상영 시간과 영화들을 꼼꼼히 살피더니 말했다.

“이거 재밌겠다. 4D도 괜찮아?”

또 물어 왔지만 4D가 뭔지 모르니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도 알 수 없다.

“너 맘대로 골라.”

“음- 그래. 좋아, 그럼 <어메이징 슈퍼울트라보이> 이거 보자. 곧 시작하네-.”

과연 쫄쫄이맨들이 나와서 싸우는 영화가 재미가 있을까 싶었지만 희나는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지훈을 따라 표를 끊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후 이어진 두 시간은 희나가 난생처음 겪는 환상, 바로 그 자체였다!

희나는 의자가 움직이고 얼굴에 물이 뿌려지고 눈앞까지 튀어나오는 듯한 총알에 정신없이 빠져들어 비명도 지르고 크게 웃으며 영화에 몰입했다.

그렇게 두 시간이 지나고 여운에 잠긴 희나가 일어나지 않자 지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의 3D 안경을 벗겼다. 그러자 반짝반짝 빛나는 눈과 흥분으로 상기된 희나의 신나는 표정이 드러났다.

“하하- 진짜 재미있었나 보네? 영화 마음에 들어?”

“뭐…… 꽤 괜찮네.”

희나는 시크하게 말했지만 지훈은 그냥 넘어가 주지 않았다. 영화관을 걸어 나오며 지훈이 물었다.

“괜찮은 거치고 아주 깜짝깜짝 놀라고- 몰입하던데? 화면에 들어가 버리는 줄 알았어. 처음엔 왜 그렇게 놀랐어? 4D 영화 처음 본 거야?”

희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나마 영화관 처음이냐는 질문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지훈은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희나의 볼을 잡아당기고 얼굴을 가까이 대며 말했다.

“처음? 그럼 나랑 첫 경험이었던 거야-?”

느물느물한 말장난에 희나가 인상을 팍 찌푸리자 그가 곧 사과해 왔다.

“미안. 이런 농담 하는 거 싫어?”

“…….”

“미안미안-. 자, 아이스크림 사줄 테니까 기분 풀어.”

그리고 사달라는 말도 안 했는데 희나의 팔을 질질 끌고 가더니 아이스크림을 사서 쥐여주었다. 얻어먹기 싫었지만 희나가 좋아하는 딸기 아이스크림이었다.

‘어차피 산 거니까 아깝잖아…….’

희나는 속으로 합리화를 하며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그리고 지훈에게 질질 끌려가며 물었다.

“영화 봤으니까 이제 집에 가는 거야?”

“아니- 이제부터 시작이지. 벌써 집에 가고 싶어?”

“별로 그런 건 아니지만. 뭐 하게?”

“쇼핑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자. 아, 모자 하나 사고 싶었는데 잘됐다.”

잠잠히 따라가며 아이스크림을 먹다 보니 순식간에 하나를 뚝딱 먹어버렸다.

지훈은 쓰레기를 받아 들고 챙겨 놓은 티슈로 희나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보면 볼수록 일련의 행동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었다. 아직 열여덟 살밖에 안 됐지만 데이트는 수도 없이 했을 거란 걸 알 수 있는 레벨이다.

희나야 연애 경험이 없지만 예쁜 외모 때문에 남자들의 들이댐에는 익숙할 대로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대놓고 싫다는데 이 정도로 지극 정성인 남자는 없었다.

희나는 지훈의 서글서글한 얼굴과 단단하게 잡힌 호리호리한 체격을 훑어보았다. 아무리 연애에 관심이 없는 그녀라도 지훈이 인기가 많을 거란 건 척하면 삼천리다.

“왜 그래? 화났어?”

지훈은 미심쩍은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희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 좋다는 여자애들 많잖아. 왜 나한테 이러는 건지 이해가 안 가.”

“이쁘니까 그러지, 왜 그러겠어.”

“이렇게 짜증만 부리는데 대체 뭐가 아쉬워서 그러는지.”

“난 네가 짜증 부리는 거 받아주는 것도 좋아.”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기분 좋은 듯 그는 웃고 있었다. 이 정도면 콩깍지도 중증이다.

“너 마조히스트야……?”

“그냥 보고만 있어도 좋아. 학교에서 너 보고 놀랐어.”

“왜 놀랐는데?”

“눈, 코, 입, 피부, 얼굴, 가느다란 발목까지 다 완전 내 취향이야. 너가 가끔씩 머리 넘길 때마다 침 넘어가-.”

돌려 말하는 법도 없이 솔직하기 짝이 없다. 왠지 민망해진 희나가 눈을 똑바로 마주칠 수가 없어 시선을 돌리자 그는 손을 뻗어서 흘러내려 와 있는 희나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웃었다.

“가자, 모자 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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