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동침(同寢) (3)
다음 날 아침, 햇살이 눈이 부셔서 희나는 눈을 떴다.
부옇던 시야가 또렷해지자 정면에 걸린 벽시계가 보였다. 시곗바늘은 아직 오전 일곱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겨우 세 시간 정도 잤을 뿐인데 푹 잔 것처럼 몸이 개운했다.
희나는 눈을 돌려 진혁을 찾았다. 그런데 잠들기 전까지 옆에 있던 진혁은 자리에 없었다.
혼자 먼저 가버렸나 싶어 벌떡 일어나자 곧 소파 등받이 위로 진혁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선생님?”
작은 소리로 불렀는데 반응이 있었다. 진혁이 느릿느릿 고개를 돌려 돌아보았다. 아마도 잠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안경을 쓰지 않은 얼굴은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고 눈가가 빨갛다.
“일찍 일어났네요-. 잘 잤어요?”
하지만 진혁은 희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리더니 소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일어났으면 빨리 나가자.”
“네? 벌써요?”
“그럼 여기서 뭐 하려고.”
수면 부족으로 진혁의 목소리가 허스키해진 것도 아랑곳없이 희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당당히 말했다.
“나 목욕하고 싶어요. 어제 보니까 신기한 욕조가 있던데.”
“…….”
“선생님- 나 욕조 사용하는 법 가르쳐줘요.”
진혁은 한숨을 푹 내쉬었지만 곧 일어나 욕조로 가 물을 받아주었다.
그리고 거품이 나오는 입욕제까지 뿌려서 목욕물을 받아준 뒤에 쓰러질 것 같은 걸음걸이로 걸어 나갔다.
그가 나간 목욕탕에서 희나는 향기가 나는 욕조를 보면서 기분이 좋았다.
이런 목욕탕에서 목욕을 해보는 건 처음이다.
곧 입고 있던 교복을 훌훌 벗고 새하얀 나신이 된 희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문을 아주 조금 열었다. 그리고 옷이 젖지 않게 문틈으로 손을 뻗어 옷가지를 내려놓았다.
“아, 정말…… 너무하네…….”
속옷을 포함한 옷가지가 문밖으로 나오는 걸 봤는지 진혁이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희나가 콧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목욕을 하고 나오자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진혁은 침대에 누운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깨우고 싶지 않아 내버려두고 희나는 옷을 갈아입은 뒤 머리를 말렸다.
드라이 소리에도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갈 준비를 마친 희나는 잠자고 있는 진혁의 옆에서 뒹굴뒹굴하며 시간을 보냈다.
잠자는 얼굴을 들여다보고 머리카락을 만져보고 입고 있는 후드 티의 매듭을 꽃모양으로 만들고 손가락을 잡아당겨 보았다.
아주 깊이 잠들었는지 살짝 벌어진 입이 바보 같아 보이는 것이 재미있어서 몰래 사진도 찍었다.
그러고 있는 사이 시간은 쑥쑥 흘러가 열한 시가 되었지만 그래도 진혁은 일어나지 않았다.
뚜루르르르르-.
진혁의 앞머리를 벼머리로 땋고 있던 희나는 갑자기 벨소리가 울려 화들짝 놀랐다.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당황하는데 진혁이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그는 바로 앞에 있는 희나를 보고 좀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부스스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네, 네. 알겠습니다.”
대충 그렇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은 진혁은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놀라며 말했다.
“벌써 11시네. 왜 안 깨웠어?”
“완전 깊이 잠들어서 옆에서 무슨 짓을 해도 안 깨던데요?”
“무슨 짓?”
되묻다가 TV 옆에 걸린 거울을 본 진혁은 얼굴을 붉히며 꼼꼼하게 땋아져 있는 앞머리를 풀어냈다.
“아하하- 꼬불꼬불해졌다. 파마한 거 같아-.”
“자는 사이에 이런 장난이나 치고!”
“세상모르고 잠든 사람 잘못이죠-. 밤에 안 잤어요?”
진혁은 앞머리를 잡아당기며 그녀를 힐끔 보더니 또 깊은 한숨을 내쉬며 툭 말을 내뱉었다.
“바보야, 어떻게 잠을 자.”
“난 잘 잤는데?”
“하아…… 내가 말을 말지.”
그는 자리를 털고 먼저 일어나서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곱슬곱슬해진 머리카락을 감추려고 옷에 달린 커다란 후드를 뒤집어쓰자 더 어려 보인다.
“나갈 준비는 다 한 거야?”
“네. 그런데 그러고 가게요? 경찰한테 가볼 거 아니었어요?”
“너 목욕하는 사이에 형사님이랑 통화했어. 알아보고 연락해주시겠대.”
“샤워하고 나가도 돼요. 나 기다릴 수 있는데.”
“지금 나가야 해. 나갈 시간 돼서 전화 온 거야.”
그 말을 듣자 희나는 왠지 아쉬워졌다. 모텔에 있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나가기 싫어 침대에 앉은 채 뭉그적대자 진혁이 돌아보며 조용히 말했다.
“가자.”
그를 바라보니 안경을 쓰고 있었다. 어젯밤의 그 모습은 사라지고 평소의 담담한 모습이다.
나갈 때가 되니까 마음이 편해진 모양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심통이 났다. 희나는 소파에 있는 가방을 휙 집어 들고 그를 따랐다.
쭈그려 앉아 벗어놓았던 신발을 신고 몸을 일으키니 진혁이 그녀를 위해 문을 연 채로 잡아주고 있었다.
문 밖을 보고 희나는 잠시 멍하니 생각했다. 지금 나가면 아마도 다시는 진혁과 이런 곳에 올 일은 없을 테지.
그녀는 일어서서 나가는 대신 몸을 돌렸다. 그리고 팔을 뻗어 진혁의 안경을 휙 벗겼다.
순간적인 일에 당황한 진혁이 잡고 있던 문을 놓쳐 문이 닫혔다. 희나는 그의 탄탄한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너…… 무슨…….”
희나가 가슴팍에 고개를 묻자 진혁이 당황한 소리를 냈다. 희나는 밀어내지도, 마주 안아 오지도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진혁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빨개진 얼굴로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 번 더 있는 힘껏 끌어안은 후 다시 또 휙 그를 놓았다. 그리고 안경을 그의 손에 쥐어 주곤 몸을 돌려 먼저 문을 나갔다.
“희나야-.”
“바보.”
뒤에서 진혁이 불렀지만 그녀는 돌아보지 않은 채 그렇게 말하고 복도로 나왔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진혁이 나왔다.
그렇게 방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밖으로 나오기까지 둘은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창문 하나 없이 깜깜한 복도를 지나 모텔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안은 여전히 어둑어둑한데 바깥은 놀랍도록 환해서 눈이 부셨다.
주변이 모텔촌인지라 건너편 모텔에서도 누군가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돌려 숙이면서 얼굴을 감췄다. 뒤에서 따라오던 진혁이 어느샌가 앞으로 걸어 나와 그녀의 앞을 가려주었다. 그리고 둘은 말없이 역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모텔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떨어져갈수록 거기서 있었던 사실에서도 멀어져가는 것 같다. 점점 주변이 익숙한 풍경으로 바뀔수록 설렘도, 묘한 두근거림도 점점 건조해지며 현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줄곧 미소가 걸려 있던 그녀의 입가도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흘깃 돌아본 진혁도 남자의 얼굴은 안경 속으로 사라지고 선생님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간밤은 그저 많은 일이 있어서 혼란스러웠던 데다 장소가 건 마법에 걸려 있었을 뿐인 거다.
지금의 편안한 관계를 바꾸고 싶지 않다. 아니, 그럴 수도 없다. 우린 일곱 살이나 차이 나는 교생과 학생이니까.
희나가 그렇게 생각하며 진혁의 옆얼굴을 올려다봤을 때 그도 마침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서로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묵묵히 걸어 역 근처에 도착하자 희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월요일에 봐요.”
“……집까지 데려다줄게.”
“그럴 필요 없어요.”
희나는 딱 잘라서 말했다.
“이제 해도 떴고 역 앞이니 내가 알아서 갈래요. 선생님이나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말투는 간밤의 애교가 사라진 원래로 돌아가 있었다. 진혁은 잠시 그녀를 쳐다보았으나 굳이 더 권하지 않았다.
“그래, 그럼 나중에 보자.”
그렇게 말하고 그는 역으로 가는 대신 돌아섰다. 희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 가는 거예요?”
“차 가져왔어.”
역까지 데려다주러 온 거구나. 깨달은 희나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아까 전까지는 바라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나왔고, 또 눈이 마주치면 왠지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왠지 볼수록 점점 우울해졌다.
진혁도 평소보다 무뚝뚝해 보였다.
그는 곧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걸음이 유독 빨라서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모텔에서 그런 일이 없었다면 진혁이 고시원까지 데려다줬을 거고 가볍게 웃으며 밥이라도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러는 수밖에 없었다.
위기를 느껴 필요 이상의 선을 긋고 그 선을 넘어오지 않는다. 그래야만 둘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희나는 생각했다.
잠시 멍하니 멈춰 서 있던 희나는 곧 돌아서 주유소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방금 진혁이 그랬던 것처럼. 궤도를 이탈해 파동하기 시작한 마음에서 도망치듯이.
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방치해뒀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부재중 전화와 카톡이 몇 통 와 있었다. 지훈에게서 온 것이었다. 보나마나 또 놀자고 귀찮게 하겠거니 하며 대화창을 연 희나는 깜짝 놀랐다.
그가 새벽 시간대에 「너 어디야?」, 「괜찮은 거야?」, 「확인하면 연락해줘」라는 메시지를 연달아서 보냈기 때문이다.
혹시나 어젯밤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이 아닌가 싶어 희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냥 가출 팸과 함께 가는 걸 봤다거나 하는 정도에서 그친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진혁과 모텔에 들어가는 걸 보기라도 했다면 크나큰 문제의 소지가 된다.
‘봤다면 어떻게 하지? 뭐라고 변명을 하지?’
그때 휴대폰이 살짝 진동해서 놀란 그녀는 하마터면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카톡이 온 것이다.
「희나야- 너 괜찮은 거야? 대답 좀 해 봐.」
아마 수시로 대화창을 확인하다가 읽음 표시가 뜬 것을 보고 바로 보낸 모양이었다.
희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보이스톡을 걸었다. 어떤 상황이든 일단 부딪쳐봐야 알 수 있을 테니까.
버튼을 누르자마자 신호음이 나오기도 전에 곧 지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희나야? 괜찮아?]
“……난 괜찮지. 왜 전화했는데?”
[홍다정한테 밤에 전화 왔었어-. 가출 팸 애들이 어떤 여자애 찾는 거 같은데 네 이야기 같다고 어떻게 된 거냐면서.]
아마 다정의 이름을 팔았던 것 때문에 그녀에게 연락이 간 모양이었다. 자신에게 직접 연락하지 않는 걸 보니 제 전화번호는 저장 안 한 모양이라 생각한 희나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래서? 그 애들에게 내 이름 얘기했대?”
[엄청 정색하면서 일단 모른다고 해뒀다고 하던데.]
홍다정이 그런 기특한 짓을 하다니 의외였다. 희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지훈이 다시 물어왔다.
[그런데 왜 그 애들이랑 엮인 거야? 너 혼자 찾아봤어?]
“어, 조금.”
[내가 같이 가준댔잖아. 별일 없었어?]
“아무 일 없었어, 일단은.”
[일단은?]
희나는 잠시 생각해 본 뒤 지훈에게 어제 있었던 일 중 진혁과 관련된 것만 쏙 빼고 전부 털어놓았다. 지훈은 잠잠히 듣고 있다가 걱정스레 말했다.
[걔네들 천호동 주변 밤낮없이 어슬렁거리는데, 혼자 돌아다니다 마주치면 위험하지 않겠어?]
그 말을 듣자 어제 따라오던 발소리와 살벌하던 표정이 다시 떠올라 낮인데도 괜히 오싹해졌다. 희나는 괜스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뭐, 조심해서 다니면 괜찮겠지. 만약에 덤벼들면 경찰에…….”
[그런 걸로는 안 돼. 내가 떼어내 줄게.]
“네가? 네가 무슨 수로?”
[그런 애들은 경찰 같은 거 신경도 안 써. 힘 보여주고 겁 줘서 떨궈내는 게 최고야. 어차피 니가 딱히 걔들한테 원한 산 건 아니니까 건드리면 가만 안 둔다고 몇마디 하면 알아서 피해 갈 거야.]
그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희나도 사실상 가출 청소년이나 마찬가지인 처지라 보호해줄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여러 명이던데. 네가 그렇게 세?”
[뭐 나 혼자 전부는 아무래도 힘들겠지만, 나도 혼자는 아니니까.]
지훈은 자신만만했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찾아다닐 거라면 기왕 하는 김에 그 여자에 대해서도 내가 물어봐 줄게. 내 생각엔 열아홉 살이고 갇혀 있지 않았다면 계속 거기 같이 있을 거 같진 않지만.]
“아니, 그럴 필요 없어.”
희나는 서둘러서 딱 잘라 말했다. 진혜에게까지 관여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혹시 지훈이 그녀를 만났을 때 희나를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고, 그 과정에서 진혁의 동생이란 걸 알면 피곤해질 테니까.
[왜? 내가 해줄게-. 네가 계속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찾는 거보단 나을 걸?]
“됐어. 내가 알아서 할 거야.”
딱딱하게 잘라 말한 뒤 희나는 좀 작아진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치만…… 위협하는 건 좀 부탁하고 싶은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왠지 지훈의 입가가 샤악- 올라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좋아. 대신 너도 내 부탁 하나 들어줘.]
“부탁? 뭔데?”
[나랑 데이트나 한 번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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