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동침(同寢) (2)
“아직도 안 잤어?”
희나는 대답하지 않고 조금 입을 벌린 채 진혁을 보았다. 샤워를 해서 젖은 머리에 맨 얼굴이었다.
안경을 쓰지 않은 모습은 처음 본다. 늘 안경을 쓰는 사람 중에는 벗으면 얼굴이 이상해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진혁은 그런 것이 없었다. 잘 보이지 않는 탓에 눈을 조금 찌푸리고 있어 날카로워 보이지만 상당히 괜찮은 것 같았다.
“안 자? 새벽에 아르바이트 가야 하잖아.”
“……늦는다고 말해뒀어요.”
“그래도 조금 자두지 그래. 시간이 늦었는데.”
진혁은 희나 옆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머리에 쓴 수건으로 가볍게 물기를 닦아내며 말했다.
“생각해보니까 난 이만 나가도 될 것 같은데. 어차피 저쪽은 내 얼굴도 모르니까.”
샤워하면서 그런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희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나 혼자 여기에 있다가 아침에도 여기서 혼자 나가라구요?”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나랑 있는 게 더…….”
“더 뭐요?”
희나의 되물음에 진혁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그가 곤란한 듯 말을 피하자 희나는 웃으면서 또 물었다.
“선생님이랑 있는 게 더 위험하다고요?”
“……안 갈 테니까 그 얘긴 이제 그만해.”
그러면서 진혁은 어색한 분위기를 환기하려 TV를 틀었다. 희나가 말릴 틈도 없이 일어난 일이라 곧 격렬한 살색 영상이 온 화면을 가득 채웠다.
깜짝 놀라 리모컨을 떨어뜨린 진혁은 황급히 주워 끄려고 했지만 당황해서 몇 번이나 이런저런 버튼을 누른 뒤에야 간신히 TV를 끌 수 있었다. 물론 이미 상당히 적나라한 장면이 자세하게 지나간 뒤였다.
굳어버린 진혁을 보며 희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진혁은 간신히 평정을 유지하고 있던 얼굴을 다시 붉힌 채 어색하게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구석에 있는 미니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목이 탔는지 안에 있는 물을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당연한 듯 찾아 마시고 넣어두는 동작이 익숙해 보여 희나는 입을 모으고 떠보듯 물었다.
“선생님은 모텔 자주 와봤나 봐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자.”
“누구랑 왔을까나-?”
“빨리 안 자면 화낼 거야.”
진혁은 나름 근엄하게 말했지만 희나는 하나도 안 무서웠다.
그래도 소박한 선생으로서의 위엄이나마 지켜 주기 위해 순순히 일어나 침대로 갔다. 빳빳한 시트에서 작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침대는 기분 좋고 푹신했다. 그래도 여전히 잠을 잘 마음은 들지 않았다.
“나 잠 안 와요.”
“……불 끄면 올 거야. 거기 머리맡에 보면 불 끄는 버튼 있어.”
돌아보지도 않고 말하는데 그의 말대로 불 끄는 버튼이 있다. 아무래도 모텔을 와 본 경험이 제법 있긴 한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희나가 불을 끄기 전에 진혁을 돌아보니 얼굴이 그늘진 것처럼 보였다.
“선생님 많이 피곤해 보이네요.”
“……너랑 얘기하니 진이 다 빠진다.”
목소리가 정말 힘이 없었다. 희나는 불을 무드 등으로 바꾸고 다시 누웠다.
불을 끈 채 누워 있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낯선 잠자리 때문인지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진혁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말없이 누워 있으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희나는 화려한 벽지가 발린 천장을 보며 진혁이 언제 모텔에 왔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아직 어리고 경험이 없어도, 모텔을 보통 어떤 용도로 쓰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여자 친구랑 왔을까?’ 하고 생각하니 왠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진혁의 깔끔하고 단정한 학교에서의 모습과 오늘 보여준 모습들은 괴리가 컸다.
물기에 젖은 머리, 흐트러진 옷차림, 안경을 벗은 섬세한 이목구비와 긴 속눈썹.
속눈썹을 떠올리자 아까 진혁이 저를 벽에 밀어붙였던 것이 연이어 떠올랐다. 강한 힘이었다.
거기서부터 생각의 나래는 터무니없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학교에서의 금욕적이고 순진해 보이는 진혁도 알고 보면 여자 친구와 모텔을 찾곤 했던 어른인 것이다.
그는 여기서 어떻게 했을까. 아까 그랬던 것처럼 그녀를 밀어붙였을까? 여자 친구에게는 멈추지 않고 진짜 키스를 했을 거다. 영화에서처럼 혀를 섞는 농밀한 키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희나는 순간 경련하듯 고개를 저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들켰을까 하는 마음에 진혁 쪽을 슬쩍 넘겨다보았다. 소파에 앉은 그는 졸기 시작했는지 몸이 조금 흔들리고 있었다.
잠시 그 모습을 보던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진혁을 불렀다.
“선생님.”
작은 목소리로 한번 불렀으나 반응이 없었다. 희나는 잠시 텀을 두고 한 번 더, 조금 더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선생님.”
“어? 왜?”
“잠깐 이쪽으로 와주세요.”
“왜 그러는데?”
“잠깐만요-.”
잠에서 덜 깬 듯 진혁은 나른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일어나 침대 옆으로 와서 섰다.
“왜 그래? 뭐 문제 있어?”
그가 묻는 찰나, 순간적으로 몸을 일으킨 희나의 손이 진혁의 팔을 잡았다.
“피곤한 거 같은데 그냥 침대에 누워서 자요.”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괜찮으니까, 그냥 누워요.”
뿌리치려는 진혁의 팔을 희나는 더 강하게 붙잡았다. 그리고 그 팔에 매달리듯 붙어 입꼬리를 올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희나를 보는 진혁의 눈빛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놀라 벌리고 있던 입을 살짝 다물고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반응을 보며 희나는 속으로 웃었다.
희나의 의도는 그를 유혹하려는 건 명백히 아니었다. 그녀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재밌어하고 있었다.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가갈수록 곤란해하면서 자신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회피하는 진혁의 모습이, 학교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이면의 모습이 신기했다. 자신의 힘으로 남자의 얼굴을 한 그를 휘두르는 것이 즐거웠다.
홀린 듯 그녀를 보던 진혁은 힘겹게 시선을 돌려 희나를 외면했다.
“왜요? 눕기 싫어요?”
희나는 굳이 그의 시선을 따라가서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그러자 진혁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시곗바늘 소리가 들릴 정도의 정적이 잠시 방 안을 메웠다.
“……있어…….”
“네?”
그의 입에서 작은 소리가 나오자 희나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진혁의 낮은 목소리가 떨리며 흘러나왔다.
“……이 상황에 눕기 싫은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어.”
그 말을 들은 순간 그녀의 심장이 크게 한 번 박동했다.
진혁이 빈틈없이 단단하게 쌓고 있던 벽이 허물어지고 그 속의 것이 조금 나온 것이다.
희나는 그가 항상 자신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철저하게 그어 놓는 금이 싫었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려 해도 결국 그가 넘어와 버리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기분이 좋아진 희나는 그의 팔을 휙 당겨 침대에 눕히고 킥킥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이 무슨 남자예요. 누워요. 불 끌게요.”
잠시 굳은 듯이 앉아 있던 진혁은 한숨을 내쉬더니 체념한 듯 등을 돌리고 침대에 누웠다.
사실은 진혁도 눕고 싶었을 것이다. 그걸 희나는 어쩐지 알고 있었다.
목적을 달성하자 왠지 느긋해졌다.
희나는 미소를 띤 채 똑바로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누군가와 나란히 누워서 자는 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안 난다.
이상하게도 그는 포근하고 안심하고 믿을 수 있다.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러나 반면 그는 잠에서 완전 깨버린 것처럼 보였다. 계속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났고 불편한 듯 조금씩 뒤척이고 있었다.
등을 돌리고 누웠지만 온 신경이 이쪽에 쏠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희나는 몸을 돌려서 그를 향해 누웠다. 몇 번이나 넓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바로 눈앞에 있으니 등이 정말 크고 넓어 보였다.
그 위로는 여자의 것과 전혀 다른 단단한 긴 목이 있었다. 방금 이곳에서 샤워를 한 탓인지 늘 나던 익숙한 향기 대신 다른 향기가 났지만 ‘진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희나는 몸을 좀 더 가까이 한 뒤 그의 향기를 맡듯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그러자 느슨하던 등이 단번에 경직이 되었다.
“안 그래도 미치겠는데…….”
그리고 그런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희나가 뭐라고 말을 하려는데 눈앞의 등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그녀 쪽으로 돌아섰다.
다음으로 그녀가 상황을 파악했을 때는 진혁이 덮듯이 그녀의 몸 위에 있었다.
그는 팔꿈치로 희나의 머리 양옆을 짚은 채 입술을 깨물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넌 정말…… 너무 경계심이 없어.”
짜내듯 나온 말에 희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그를 보았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눈동자가 남자의 눈을 하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타까움과 갈망을 담은 그 시선이 아주 낯설었다.
섬세해 보이는 턱선 아래로 흘러내리는 탄탄한 목에 불거진 목젖도, 넓은 어깨선도 모두 그랬다.
그녀의 몸 위에 있는 것은 아주 크고 단단하고 근육이 잡혀 있는 남자의 몸이다.
그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지자 긴장이 되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던 희나는 딱딱하게 굳어 움츠러든 시선으로 진혁을 올려다보았다. 항상 다정하고 곤란한 듯 물러서기만 하는 그에게서 어른 남성의 면모를 확인하니 다른 사람 같았다.
진혁은 괴로운 듯 인상을 쓰며 희나를 보았다. 그는 그 상태로 한참을 있었다. 그가 하고 있는 내면의 갈등은 희나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버티다 그는 고개를 한 번 확 흔들더니 그녀를 놓아 주고 침대에 누웠다.
“아, 정말 미치겠네.”
정말 답답해서 미치겠다는 듯 절절하게 그는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팔로 얼굴을 가리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잠깐 굳어진 그대로 누워 있던 희나는 슬금슬금 다가가 그의 옆에 붙었다. 그러자 진혁이 지친 얼굴로 이번엔 또 뭐냐, 하는 듯이 쳐다보았다.
희나는 얼굴을 감쌌던 그의 팔을 내려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그리고 그의 몸에 기댔다.
어이없다는 듯이 그녀를 보았지만 곧 진혁도 팔을 뻗어 희나가 편히 눕도록 팔베개를 해주었다.
그래서 희나는 그의 품에 고양이처럼 파고들었다. 눈앞의 목덜미는 매끈매끈하고 부드럽고 향기가 나서 희나는 기분 좋은 듯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 몸짓에 다시 진혁은 움찔했지만 곧 몸의 경직을 풀며 체념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문을 하는구나, 정말…….”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몸을 돌려 희나를 감싸 안았다.
강하고 탄탄한 팔에 끌어안긴 희나는 진혁과 몸이 밀착되었다. 어찌나 심장이 세게 뛰는지 박동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무섭거나 기분 나쁘지 않고 따뜻하고 편안하고 그러면서도 두근두근 설레어 기분 좋았다.
희나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그의 품에 안긴 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편안한 숨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