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동침(同寢) (1)
“그나저나 아까 어떻게 찾아온 거예요?”
“전화 끊자마자 바로 나왔지. 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렇게 위험한 짓을 하다니.”
진혁의 말에 희나는 뜨끔했다. 아까는 정말 무서워서 진혁이 달려와 준 것이 솔직히 고마웠다.
만일 그가 와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무슨 일을 당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입에서 고맙다거나 미안하다는 말이 도무지 나오지 않았다. 어물거리다가 희나는 그냥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치만 거의 찾을 뻔했는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네가 위험할 뻔했잖아.”
정말로 걱정을 많이 했는지 질책하는 어조였다. 그러나 진혁의 화난 표정은 희나가 눈꼬리를 내리고 올려보자 곧 누그러들었다.
“어쨌든 무사하니 됐어. 하지만 다시는 그런 위험한 일은 하지 마.”
잘못한 건 잘못한 거니 희나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덧붙여 말했다.
“선생님 동생 거기 갇혀 있는지도 몰라요. 경찰에 신고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가끔 연락 오는 걸 보면 아마 갇혀 있진 않을 거야. 그래도 내일 아는 형사님께 말해볼게.”
희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따라간다는 자신의 한마디에는 바로 뛰쳐나온 사람이 1년이나 찾던 동생이 지척에 있다고 하는데 묘하게 차분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기, 선생님.”
“응?”
“동생 보고 싶어요?”
“……잘 모르겠어.”
나온 대답은 이상했지만 의외는 아니었다. 진혁은 씁쓸한 어조로 한마디 덧붙였다.
“확실한 건 동생은 날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는 거야.”
희나는 눈을 잠시 깜빡이다가 질문을 툭 던졌다.
“선생님 동생은 왜 가출한 거예요?”
“음…… 별로 좋은 얘긴 아닌데…….”
“궁금해요. 그렇게 어머니도 잘 챙겨주고, 선생님도 바보 둔탱이지만 그다지 나쁜 오빠일 거 같진 않은데. 왜 굳이 나가서 그런 불한당 같은 놈들이랑 돌아다니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가네요.”
진혁은 잠시 망설이다가 나직이 말했다.
“어머니는 좋은 분이셔. 하지만 동생한테도 그랬던 건 아니야.”
완곡한 말이었지만 거기까지만 들어도 감이 왔다. 희나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진혁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뭐 흔한 얘기지.”
“그냥 아들 편애요? 아니면 불량소녀와 우등생 오빠 뭐 이런 거예요?”
“둘 다.”
자신의 입으로 스스로를 우등생에 비유하는 것이 멋쩍은지 진혁은 볼을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동생은 날 아주 싫어해, 진심으로.”
“글쎄요. 그런 경우에 보통은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나요?”
“사실은 동생이 집을 나가고 난 다음에…… 집 근처 길거리에서 우연히 딱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었어.”
털어놓기 시작하자 말문이 트인 모양이었다. 진혁은 회상하듯 멍한 시선을 허공에 둔 채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어떻게든 설득해서 집에 데리고 가려고 했어. 문제가 있더라도 일단 집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자고. 그러니까 아주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더니 길거리에서 소리를 질렀어.”
“…….”
“울면서 나만 없어지면 되니까 집에 돌아오길 바라면 죽어버리라고 하더군.”
희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옆에 앉아 있는 진혁을 보았다. 말의 내용은 슬픈데 표정은 담담하다. 지금은 저런 표정을 짓지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충격을 받았을 테지.
“저딴 애새끼들 가지고 나가든가 하지 남겨두고 갔어! 내가 알 게 뭐야, 저런 것들 뒈지든 말든! 아니, 차라리 뒈져버리는 게 낫지!”
어머니가 나가고 나서 아버지가 돌봐주러 왔던 외할머니를 밀치며 했던 말이었다.
그때 희나는 겨우 여섯 살이었는데도 그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어조, 목소리, 말의 내용, 심지어 그날 거기 있던 모두가 입었던 옷들까지.
문틈으로 바라본 그 광경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가 않는다. 가족에게 죽어버리란 말을 듣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때 여동생은 나랑 서울에서 둘이서 살았어. 동생은 미용사가 되고 싶다고 졸업하면 미용 전문 학교에 보내달라고 했는데, 어머니가 계속 내려오라고 하셨나 봐. 오빠 공부해야 하니까 넌 포기하라고. 넌 어차피 공부도 못하니까 농사짓다가 여기서 결혼하라고. 두 명이나 뒷바라지할 수 없다고 그런 얘기를 하면서.”
묵묵히 듣고 있는 희나의 옆에서 진혁의 이야기는 조용조용 이어졌다.
“난 나중에 어머니한테 듣기 전엔 전혀 몰랐어. 나를 편애한다는 느낌은 당연히 있었지만…… 내가 모르는 곳에서 더 많은 편애가 있다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그래서 그때 여동생도 그냥 그대로 가게 놔둔 거야.”
몰랐다는 진혁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 설령 알았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거라고 희나는 생각했다.
동생의 원망은 엉뚱하게 빗나가 있는데 그 빗겨간 화살에 맞아 진혁은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서 동생을 가게 놔둔 것에 대한 후회가 짙게 묻어났다.
“그래, 그럼 어디 한번 멋대로 잘 살아봐라 하고 생각했지. 어렸을 때부터 사사건건 부딪쳐오는 게 나도 싫었으니까. 그런데 우연히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니까…….”
희나는 ‘그런 일’이라는 것이 ‘조건 만남’을 뜻하는 거란 걸 알 수 있었다.
진혁은 괴로운 듯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막연히 잘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어. 내가 동생을 망친 게 아닌가 하고. 그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리고 왔었어야 했는데…….”
“…….”
“……내가 진혜를 만나러 가도 좋은지 모르겠어. 이제 와서 그럴 자격이 있는지.”
진혁이 동생을 찾으려고 하면서도 막상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은 이유도, 지금 당장 달려가지 않고 ‘형사’를 부르려고 하는 이유도 납득이 갔다.
희나는 손톱 쪽으로 시선을 떨궈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내가 괜한 짓을 한 거예요?”
“아니, 물론 찾긴 찾아야지. 고마워. 이렇게 애써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
그렇게 말해도 희나는 뒷맛이 씁쓸했다. 공연히 내보이고 싶지 않을 가정사에 제 발로 끼어든 기분이다. 하지만 진혁은 평소대로 다정한 말투로 돌아와 있었다.
“찾으면 이번에는 제대로 한번 이야기를 해봐야지. 가만히 넋 놓고 있는다고 누가 해결해주는 건 아니잖아. 부모님도 편찮으시니 내가 어떻게든 해야 해.”
‘내가 어떻게든 해야 한다’라는 말에 강한 동질감이 느껴져 괜히 찡해졌다.
희나는 스스로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에서 자랐다.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어쨌든 서로 필사적인 것이다.
말을 마치고 난 진혁은 조금 홀가분해 보였으나 어린 희나를 상대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것이 멋쩍은지 희나 쪽을 보지 못했다. 그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면서 화제를 돌렸다.
“벌써 두 시네. 내일 아르바이트 가지? 넌 누워서 좀 자두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이야기를 하니 아까의 묘한 긴장이 풀렸는지 진혁은 여태껏 외면하고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던 침대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별로 잠이 오지 않았지만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요. 내 방보다 훨씬 잠이 잘 올 것 같아요. 모텔 처음 오는 건데 넓고 좋네요.”
“처음 온 거라고?”
“당연하죠. 그럼 내가 모텔을 왜 와요?”
입을 내밀며 대답하던 희나는 진혁이 왜 의아해하는지 깨달았다. 처음 만났을 때 상황을 떠올린 것이다.
“나 원조교제 같은 거 한 적 없어요.”
“그럼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진혁은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하긴 채팅 내용이나 장소 지정이나 많이 해 본 솜씨로 보였을 거다. 희나는 왠지 변명하는 거 같아서 여태까지 얘기하지 않았던 사실을 털어놓았다.
다정 때문에 억지로 나간 것과 그때 궁전 모텔에서 그들이 꾸미고 있던 음모까지 모두 다.
“어쩐지 너 볼 때마다 그런 일을 한다는 게 뭔가 앞뒤가 안 맞는다 싶더니…….”
“그랬나요?”
“이상했어. 그런 일 하는 애가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굳이 힘든 아르바이트를 몇 개씩 한다는 게. 너 정도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말을 하려다 멈춘 진혁이 미소를 지으며 희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행이다. 그런 싫은 경험을 안 했어서.”
누가 만지는 것은 질색이었지만 따뜻하고 커다란 손의 느낌이 싫지 않아 희나는 내버려 두었다.
진혁은 한두 번 더 머리를 쓸어 주더니 거두어들이고 이번에는 찌푸린 표정으로 말했다.
“그나저나 그런 나쁜 짓까지 꾸미다니…… 다정이도 참 큰일이네.”
“걔보단 선생님이 큰일 날 뻔했죠.”
“하긴 그래. 나쁜 마음 먹었으면 톡톡히 대가를 치렀겠어.”
그의 말을 듣자 당시 진혁이 했던 말들과 어리바리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장난기가 동한 희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짓궂게 말했다.
“그때 내가 너무 예뻐서 따라왔다고 했죠? 들어가고 싶었어요?”
진혁이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휙 피했다.
“……이런 상황에 그런 질문 하지 마.”
“그때는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요.”
곤란해하는 모양새가 재미있어서 희나는 더 몸을 가까이 가져가며 말했다.
“결국 우리 둘이 여기 들어오게 됐네요.”
붉어진 얼굴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던 진혁은 공간이 없어지자 자리에서 휙 일어서 버렸다.
그리고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타월을 집어 들더니 말했다.
“난 더우니 샤워 좀 해야겠어. 넌 빨리 잠이나 자.”
황망히 샤워실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희나는 쿡쿡 웃었다. 놀리는 보람이 있는 사람이다. 학교에서 성희롱을 일삼은 아이들의 기분을 좀 알 것도 같았다.
금방 나올 줄 알았는데 정말 샤워를 하는지 샤워실에서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희나는 편안히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러자 따라오듯 하품이 나왔다. 피곤했지만 잠이 올 것 같진 않다.
그대로 잠시 할 것이 없어서 주변을 둘러보던 희나는 모텔 방 탐험을 시작했다. 침대 주변에 달린 버튼을 눌러 보고, 화장대에 있는 화장품 뚜껑을 따서 냄새를 맡아 보았다.
그 앞에 놓인 약봉지 같은 것을 보고 집어 들었다가 희나는 홍당무가 되어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건 성 교육 시간에 본 적 있는 콘돔이었다.
다시 주워놔야 했지만 왠지 만지고 싶지 않아서 내버려 두고 그쪽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화장대 서랍을 열어 보던 희나는 TV 리모컨을 발견했다.
한가한 참에 마침 잘됐다 싶어 소파에 앉아 TV를 틀었다.
“아아아, 거기, 좋아. 아흑.”
희나는 너무나 놀라서 리모콘을 떨어뜨릴 뻔 했다.
47인치 TV를 가득 메우는 난생 처음 보는 살색 화면과 강렬한 신음 소리. 말로만 듣던 야동임이 틀림없었다.
희나는 물소리로 진혁이 아무것도 듣지 못했기를 바라며 바로 TV를 껐다.
진혁은 20분쯤 지나서야 욕실에서 나왔다. 그는 희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아직도 안 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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