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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18화 (18/140)

18화. 잠입(潛入) (3)

얼마가 지나자 희나는 슬슬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궁전 모텔을 지나 효찬이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여기서부터는 모텔촌이라기보다는 여인숙이나 여관이 모여 있는 여관촌이다.

하지만 희나는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길은 좁았고 뒤쪽에는 다른 아이들이 서 있는지라 도망치기도 무리였다.

점점 겁이 나기 시작했지만 최대한 태연한 척하려고 노력했다.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이면 될 일도 안 될 것이다.

“저기야-.”

역에서 15분쯤 떨어진 곳까지 걸어오자 효찬이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하얀색의 3층짜리 작은 건물이 있고 ‘영선장’이라는 낡은 간판이 붙어 있었다.

“가자. 밖은 이래도 무지 넓고 밤에도 떠들어도 돼.”

“아니, 난 여기서 기다릴게.”

“왜? 들어갔다가 가지?”

“그냥 진혜 언니 불러줘. 잠깐 얼굴만 보고 가려고 온 거야.”

“뭘 귀찮게 불러내. 들어가서 보면 되지.”

앞까지 가면 불러내 준다고 했으면서 말이 바뀌었다. 이쯤 되니 희나도 불안이 좀 현실감 있게 몰려온다.

“나 아직 다른 팸이거든. 진혜 언니 얘기 들어보고 나서 옮길까 말까 하는 거라서.”

“그래? 그럼 진짜 불러다 줘?”

효찬이 희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이제 그 얼굴에 웃음기는 없었다.

희나는 망설여졌다. 여기서 진혜가 나와도 문제다. 진혜는 희나가 누군지 전혀 모른다.

“아니, 생각해보니 너무 늦었으니까 그냥 가 보는 게 낫겠다. 언니한테 나 왔었다고 전해줘-.”

말하면서 이제는 숨길 수 없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할 거란 자각이 들었다. 필사적으로 태연하려 애쓰며 희나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너 이름이 뭔데?”

“나? 나…….”

여기서 본명을 말하면 안 될 것 같아 희나는 순간 생각난 아무 이름을 말해 버렸다.

“홍다정.”

그 말을 듣고 딱딱하게 굳은 효찬의 표정에서 낮게 깔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누구야?”

그 음산한 모습에 희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바보 같았다. 그는 분명히 다정의 이름을 알고 있었던 거다.

“야, 너 거기 잠깐 서봐.”

“나, 나 갈게. 나중에 봐.”

“야, 안 잡아먹으니까 잠깐 서라고.”

위협하며 효찬이 걸어오기 시작했다. 희나는 부르는 것을 무시하고 더 빠르게 걸었다. 멈춰 서면 위험하다. 그런 직감이 왔다.

그녀가 서지 않자 따라오는 효찬의 걸음이 빨라졌다. 순간적으로 희나는 휙 뒤로 돌아 잽싸게 달리기 시작했다.

“야-! 너 거기 안 서!”

뒤에서 들려오는 고함 소리를 들으며 희나는 필사적으로 달렸다. 여기서 잡히면 끝장이다.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가출 팸들이 저지르고 다니는 범죄에 대해서는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끌려가서 감금당하고 매춘에 동원될지도 모른다. 바보 같은 치기로 어리석은 짓을 하고 말았다. 밀려오는 후회와 두려움으로 희나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야- 너네는 저쪽으로 돌아서 잡아 와!”

“네, 형!”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겁이 나서 희나는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있는 힘을 다해서 골목골목을 이쪽저쪽으로 숨어 가며 달렸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누가, 누가 좀…….”

희나의 입에서 들어 줄 이 없는 울먹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움에 질려 있었다.

“야- 그만 뛰라니까! 어차피 도망 못 가!”

이제 목소리는 거의 지척까지 와 있었다. 이대로라면 큰길에 도착하기 전에 붙잡히고 말 것이다.

희나는 큰길로 곧장 달리는 대신 그를 따돌리려 궁전 모텔 쪽 골목으로 꺾어져 들어갔다.

‘제발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라. 제발, 제발!’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시커먼 그림자가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뒤로 돌아간 일행이다!’ 하는 느낌이 들었다. 급하게 몸을 돌렸지만 팔이 잡혀 강한 힘이 몸을 끌어당겼다.

절망한 희나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고 동공이 크게 열렸다. 있는 힘을 다해서 비명을 지르려는데 손이 입을 막았다.

“나야. 진정해, 희나야.”

경련을 일으키듯 떨리던 몸이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멈췄다.

잔뜩 벌어진 동공에 들어온 희고 단정한 얼굴. 그 얼굴을 인식하자마자 감각이 돌아오기라도 한 듯 샴푸 향기가 느껴졌다. 그녀를 붙잡은 것은 진혁이었다

“어, 어떻게…….”

물어보고 있는데 방금 지나쳤던 발걸음이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수초 안에 이 골목으로 돌아올 것이다.

당황해서 패닉에 빠진 희나가 눈물 젖은 얼굴로 진혁을 올려다봤을 때였다. 진혁이 희나를 벽에 밀어붙인 뒤 품에 끌어안고 얼굴을 겹쳐왔다.

놀라서 크게 벌어진 그녀의 눈에 진혁의 단정한 얼굴과 긴 속눈썹만이 들어왔다. 입술이 불에 덴 듯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에게 안기는 것과 거의 동시에 진혁의 뒤쪽으로 어마어마한 기세로 효찬이 달려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를 꼭 끌어안고 있던 강한 팔은 달려가는 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느슨해졌다. 팔이 느슨해지자 희나는 다리가 풀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키스하는 줄 알았다. 입술이 바로 몇 밀리미터 앞까지 맞닿아 있었다. 바로 앞에서 느껴지던 숨결이 무서울 정도로 생생했다.

진혁은 비틀거리는 희나를 부축하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거 드라마에서나 먹히는 줄 알았는데, 실제로도 되네.”

농담처럼 말했지만 진혁의 목소리도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나마 어두워서 다행이다. 아마 얼굴이 엄청나게 빨개졌을 거야.

“가자. 걸을 수 있겠어?”

희나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다리가 떨려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진혁이 그녀를 업으려는 듯 등을 돌리자 희나가 고개를 저으며 빠르게 말했다.

“업고는 못 도망가요. 금방 다시 돌아올 거예요.”

“내가 있으니까 괜찮아. 뒤로 돌아서 나갈까?”

“혼자서는 안 돼요. 한두 명이 아니에요.”

희나는 아까 그 무시무시한 덩치를 떠올렸다. 호리호리한 진혁이 그들 모두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럼 어쩌지?”

진혁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둘은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듯 불안한 시선을 돌렸다.

그런 그들의 눈앞에 궁전 모텔의 간판이 들어왔다.

눈앞에 우뚝 서 있는 현란한 궁전 모양의 모텔을 힐끗 쳐다본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둘은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아무래도 이 방법밖에는 없겠죠?”

“……하지만…….”

진혁은 곤란한 표정을 지은 채 망설였다. 그러는 사이 골목 끝에서 커다란 몇몇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몇 명 더 합류해서 찾아보려는 것 같았다.

선택의 여지가 사라진 진혁은 한숨을 내쉬더니 앞장서서 궁전 모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주변을 살피며 어색하게 모텔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자 붉은 전등이 켜진 어둑어둑한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진혁은 희나를 당겨 안쪽으로 들여보낸 뒤 문을 닫았다.

카운터 안쪽에선 중년 여성이 어서 오란 말도 없이 멀뚱하게 앉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모텔은커녕 호텔도 체크인해본 적이 없는 희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진혁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요금표를 보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현금이 부족하겠는데.”

급하게 왔을 테니 현금을 찾을 시간이 있을 리가 없었다. 희나는 가방에 들어 있던 머니클립을 꺼냈다. 안에 끼워 둔 돈을 주려던 희나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없어졌어…….”

“잃어버린 거야?”

희나는 고개를 저었다. 클립에서 꺼낸 적이 없으니 잃어버렸다면 통째로 사라졌어야 옳다. 내용물만 사라졌다는 것은 누군가가 돈을 꺼내 간 것이다.

언제 도둑맞았나 생각해 보자마자 짚이는 것이 있었다. 아까 맥도날드에서 진혁과 통화하러 화장실에 갔을 때 가방을 자리에 두고 그냥 갔던 것이다.

‘정말 바보같이…….’

오늘은 뭐가 씌기라도 한 것처럼 멍청하다. 희나는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쩔 수 없죠. 이제 어느 정도 걸을 수 있을 거 같으니까 나가서 도망치면…….”

진혁이 희나를 잠시 보다가 곤란한 듯 이마를 짚더니 곧 지갑에서 5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 카운터에 내밀었다.

“12시 지나면 대실은 안 됩니다. 숙박하실 건가요?”

중년 여성은 조선족인 듯 어색한 억양으로 물었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열쇠와 일회용 칫솔 두 개를 내주었다.

“402호입니다.”

진혁은 물건들을 집어 들더니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서 섰다. 희나는 종종걸음으로 따라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뭐예요-? 돈 있었잖아요.”

“방 두 개 잡기에는 부족해서…….”

“이렇게 비싼데 뭐하러 방을 두 개나 잡아요-?”

희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진혁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시선을 피했다. 내부 조명이 전체적으로 어두워서 확실하진 않지만 왠지 얼굴이 좀 빨간 것 같았다.

“넌 정말 경계심을 길러야 해.”

“……뭐가 어때요? 매일 지도실에서 둘이 있는데 뭐가 다르다고.”

진혁은 희나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한숨을 쉬더니 엘리베이터가 4층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내려버렸다.

‘뭐야. 바보 둔탱이가 왜 저래. 나까지 어색해지게.’

태연하던 희나도 왠지 의식이 되어 볼이 발그레해졌다. 그녀는 복도가 어두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진혁의 뒤를 따랐다.

좁다란 복도 구석에 있는 문에 열쇠를 꽂고 돌리자 찰칵-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진혁은 먼저 들어가라는 듯 문을 잡고 선 채 희나를 보았다.

안에는 슬리퍼가 놓여 있는 현관 왼쪽으로 문이 하나 있고 그 앞으로 방이 보였다. 흰 시트가 깔린 푹신해 보이는 퀸 사이즈의 커다란 침대, 그리고 앞쪽에 2인용 소파와 커다란 TV도 있었다.

진혁은 지친 듯한 발걸음으로 소파에 가서 털썩 주저앉았으나 희나는 아까까지의 두려움은 잊은 듯 신기한 표정으로 모텔 내부를 여기저기 기웃댔다.

“오- 신기한 욕조가 있네?”

현관 옆의 문을 열고 안을 보자 깔끔한 샤워실에는 버튼이 잔뜩 달린 특이한 모양의 욕조가 있었다. 혹시 욕조 사용법 아냐고 물어보러 진혁을 돌아보니 그는 소파에 앉은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왜 그래요? 어디 안 좋아요?”

“학생을 데리고 모텔에 오다니…… 난 최악의 교생이야.”

“피치 못할 상황이었잖아요-. 뭐 별일이 있을 것도 아니고. 좌절 그만해요.”

희나가 그의 손을 얼굴에서 떼어내려고 팔을 잡자 진혁이 흠칫 놀라더니 손을 피했다.

방 안은 복도와 다르게 조명이 밝아서 손을 치우자 약간 붉어진 진혁의 얼굴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는 다시 얼굴을 감싸진 않았지만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려 벽시계를 보았다.

“여기서 언제까지 있어야 하지.”

“글쎄요. 쟤네 밤새 이 근처를 어슬렁거릴 테니까…… 안전하게 해 뜨면 나가요.”

진혁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더니 체념한 듯 긴 다리를 뻗으며 소파에 몸을 깊이 기댔다. 희나도 그 옆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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