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잠입(潛入) (2)
별생각 없이 물었는데 의외로 반응을 보이자 왠지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희나는 편지를 만지작거리며 떠보듯 물었다.
“있나 보네요. 혹시 지현이? 얜 꽤 예쁜 앤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왜 말이 안 돼요?”
희나가 묻자 진혁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너흰 아직 어려. 더 많이 생각하고 성숙해져서 좋은 상대를 찾을 수 있는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지.”
“이미 다들 많이 사귀고 있는데요 뭐. 나보고는 지훈이하고 사귀어보라고 했잖아요.”
“너희들끼리 부딪치면서 준비하는 거지, 어른이 끼어들어서 그럴 수 있는 기회를 가로채는 건 반칙이야.”
하지만 희나는 선을 긋는 말이 듣기 싫었다. 틈만 나면 어른인 척한다.
“하여튼 할아버지 같은 소리는……. 선생님 화학 수업할 때보다 더 지루해요.”
“내 수업 지루해?”
진혁이 서글픈 말투로 묻자 희나는 틱틱대던 태도를 풀고 다시 킥킥 웃었다.
“반대로 지루할 틈이 없죠.”
수업 틈틈이 음담패설과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 밀물처럼 쏟아지고 쩔쩔매는 반응이 꿀재미였기 때문에 진혁의 수업은 집중도가 높았다. 좌절한 진혁은 탄식하듯 말했다.
“난 아무래도 선생으로서의 위엄이 부족한가 봐.”
“그걸 이제 알았어요?”
“……가서 수업 준비나 해야겠다.”
그렇게 말하고 진혁은 다 먹은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희나는 히죽히죽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리려 턱을 괸 채 그를 보았다. 그와 있으면 솔직히 눈치 볼 것도 없고 마음이 편하고 대화도 즐겁다. 물론 가장 재미있는 건 난감해하거나 쩔쩔매는 모습을 보는 거지만.
뭔가 장난칠 거리가 없을까 생각하던 희나의 눈에 몸을 굽힌 진혁의 엉덩이가 보였다. 적절히 업된 모양이 조금 찰져 보이기는 했다.
‘여기서 엉덩이를 팡 치면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그 시선은 뭐야.”
어느새 눈치챘는지 진혁이 몸을 돌렸다. 다 먹은 그릇들을 챙겨 나가려던 진혁이 문 앞에서 다시 멈춰 섰다. 희나가 오늘도 사족이 있으려나 하며 쳐다보니 역시 말을 걸어온다.
“혹시 무리하고 있는 건 아니지?”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요-.”
진혁은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표정이었으나 “그래.” 하고 작게 중얼거린 뒤 지도실을 나갔다.
그날 이후로 딱히 여동생 찾는 일에 대해서 얘기한 적은 없지만, 희나가 수면 부족인 건 사실 그 영향이 컸다. 피곤하지만 빨리 결과를 내서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희나는 잠시 창문에 몸을 기댔다가 다시 깜빡 잠이 들어 허둥지둥 수업에 들어가야만 했다.
***
아르바이트를 마친 희나는 피로한 발길을 이끌고 역 앞 맥도날드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섰다.
평일 저녁의 카페 아르바이트는 항상 밤 열한 시가 훌쩍 넘어서 끝나기 때문에 벌써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다.
늘 먹는 세트를 주문하고 나오는 사이 희나는 넓은 매장을 꼼꼼히 둘러보았다. 그러나 찾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벌써 4일째 맥도날드에 와서 새벽 세 시까지 죽치고 있었다. 하지만 진혜는커녕 가출 청소년들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집에 돌아갈 때는 일부러 놀이터 쪽으로도 돌아서 가곤 했지만 항상 아무도 없었다.
며칠째 허탕을 치고 나니 희나는 슬슬 초조해졌다. 찾는 방식에 대한 의구심도 들고, 확신이 없으니 피로는 더욱 가중되었다. 이 생활의 단 한 가지 장점은 새벽에 들어가니까 고시원 총무인 선규와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 정도였다.
내일은 주말이라 새벽부터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풀로 해야 한다. 오늘은 그냥 햄버거만 먹고 바로 집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며 희나는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2층에 도착한 순간 그녀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찾았다!’
보자마자 깨달을 수 있었다. 2층 구석에 앉아 있는 저 아이들이 바로 그 ‘가출 팸’이라는 것을.
묘하게 후줄근한 차림을 한 남자 넷, 여자 둘로 이루어진 그 그룹은 트레이에 감자튀김만 잔뜩 쌓아 놓고 먹으며 떠들어대고 있었다.
가운데에는 병태가 말한 ‘형’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들은 대로 롯데 자이언츠 티셔츠를 입었다. 모두에게서 가출 청소년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풍겼다.
희나는 창가 쪽의 테이블에 트레이를 올려놓고 앉아 조심스럽게 유리창에 비친 그들의 모습을 관찰했다.
야구 티셔츠를 입은 가운데 사람은 일행 중에 가장 나이가 많아 보였다. 어느 정도냐면 소년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얼굴에 거뭇거뭇 수염이 자라고 있고 체격도 큰 데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 때문인지 진혁보다도 더 나이가 많아 보였다.
반면 근처에 앉은 다른 아이들은 몹시 앳된 외모였다. 여자애 중 한 명은 잘 봐줘야 중학생 정도로밖에 안 보였다.
두 소녀의 얼굴을 면밀히 살핀 결과 희나는 진혁의 여동생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둘 다 화장기가 별로 없는 얼굴이긴 했지만 저 얼굴 위에 아무리 진한 화장을 해도 사진 속의 진혜처럼 보일 것 같진 않았다.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저 사람들이 유일한 실마리였다.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고민하며 희나는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다행히 손님이 워낙 없는 데다 목소리가 커서 희나가 앉아 있는 곳까지 대화 내용이 또렷이 들렸다.
“그러니까 내일 상하차 가면 진짜 뻥 안 까고 현금 박치기 해준다니까? 나중에 주고 그런 거 없어-. 소장님이랑 이미 다 아다리 맞춰 놨으니까 가서 일만 하면 돼.”
“그럼 데리러 오나요?”
“그래. 봉고로 싣고 가서 싣고 올 거야. 점심도 준비해줄 거고. 이렇게 해주는 데 얼마 없어.”
침을 튀겨 가며 자이언츠 티셔츠는 잔뜩 생색내는 어조로 떠들어댔다. 옆에 앉아 있던 여자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듣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 내일 낮에 PC방 가 있어도 괜찮아?”
“그래-. 맨날 가는 PC방 갈 거지?”
“응.”
“대신 건수 잡혀서 전화하면 바로 날아와. 도망치면 알지?”
위협하듯 을러대는 말투에 두 여자아이는 움츠러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건수’라는 건 듣지 않아도 ‘조건’일 것이 뻔했다.
아직 채 성숙하지도 못한 두 아이와 ‘조건’을 함께 연상하니 속이 메스꺼워졌다. 희나는 먹으려던 햄버거를 내려놓았다.
찌푸린 얼굴로 감자튀김 하나를 5분씩 들여가며 먹으며 희나는 그들을 주시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갈수록 그쪽에서도 희나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유리창에 비친 희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희나도 자세히 보니 자이언츠 티셔츠 옆에 앉은 검은 모자 소년이 어쩐지 낯이 익었다. 몇 번 혼자 와서 먹곤 하던 사람이었다.
그가 희나를 가리키며 자이언츠 티셔츠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소곤거렸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난 자이언츠 티셔츠는 ‘오-’ 하고 입을 모으더니 이쪽으로 왔다. 그리고 허락도 받지 않고 희나의 옆자리에 앉더니 히죽히죽 웃으며 말을 걸었다.
“너도 가출한 거 맞지?”
아무래도 매일 죽치고 있었더니 가출 소녀로 보인 모양이다. 희나는 고민하다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난 김효찬이야. 너 진짜 이쁘네. 우리 팸에 들어올래? 잠잘 데도 있어.”
희나가 대답을 하지 않고 경계하는 표정을 짓고 있자 이번엔 은근한 어조로 꼬시기 시작했다.
“달방 잡아서 사는 거라 춥지도 않고 샤워도 할 수 있어. 당연히 딴 팸처럼 찜질방 이딴 덴 안 가고 방도 두 개야, 두 개. 넌 내가 특별히 일 많이 안 해도 챙겨줄게.”
“들어가기 전에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희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서 진혜의 사진을 띄운 뒤 내밀었다.
“폰 안 끊긴 거 보니 집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됐나. 어? 진혜네?”
희나는 속으로 ‘됐다!’를 외쳤다. 그녀의 표정이 밝아지자 효찬이 물었다.
“진혜랑 아는 사이야?”
“어, 조금. 진혜…… 언니도 여기 팸에 있어? 불러 줄 수 있어?”
희나는 언니를 붙여 아는 사이처럼 물었다. 하지만 효찬은 잠시 뚫어지게 희나를 쳐다보며 말이 없었다.
‘연기가 어색했나……’
희나의 등에서 식은땀이 조금 흐를 무렵 효찬이 웃었다.
“진혜는 폰 끊겨서 못 불러. 우리 사는 방이 바로 요 앞인데. 보고 갈래?”
“요 앞? 어디?”
“요 앞에 모텔촌에 있어. 그 엄청 큰 궁전 모양 모텔 근처에. 들어올 건 없고 앞에 서 있으면 불러줄게.”
그 말을 듣자 희나는 귀가 솔깃했다. 궁전 모텔 근처라면 밤에도 지나가는 사람이 많으니 무섭지 않다. 방에 들어가지는 말고 그냥 어디 모텔인지만 봐둔 뒤 진혁에게 말해주면 된다.
“그래, 좋아. 그 전에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어? 바로 가게?”
“더 있다 가려고?”
“너 음식 거의 먹지도 않았잖아.”
“난 며칠째 계속 패스트푸드만 먹었더니 질려서 입맛이 없네. 혹시 먹을 거면 먹어.”
희나가 말을 마치자마자 효찬은 햄버거를 뜯어 먹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줄 줄 알았던 희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휴대폰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에서 그녀는 빠른 속도로 진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가자 수화기 너머에서 놀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이런 시간에?]
“선생님 동생 찾았어요!”
희나는 극적으로 말한 뒤 그의 열띤 반응을 기다렸다. 그러나 진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진혜? 거기 같이 있어?]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지만, 딱히 기쁜 기색이 없었다. 너무 놀라서 그런가 싶어 희나는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나랑 같이 있지는 않은데 같이 있다는 애들을 만났어요. 요 앞의 궁전 모텔 근처에 있대요. 따라가서 어디인지…….”
[따라가지 마! 위험하니까.]
희나의 말을 끊으며 진혁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 비장함에 희나는 픽 웃었다.
“걱정 마요. 안에는 안 들어갈 거니까. 어딘지만 보고 돌아올 거예요.”
[그 근처에 있다는 거만 알면 나중에 내가 찾아보면 되니까 그러지 마. 빨리 헤어져서 돌아가.]
냉정한 진혁의 반응에 희나는 뭔가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찾아다니던 동생을 찾았다는데 기뻐하지는 않고 설교나 늘어놓다니, 이런 거 하나도 재미없다.
“뭐야- 내가 찾느라 며칠간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고마워. 하지만 이런 시간에 찾으러 다니면 안 돼. 빨리 집에 들어가.]
“아- 설교 그만해요. 그렇게 한 발 빼고 찾으니까 여태 못 찾았죠. 바보 아저씨는 상관 말고 구경이나 해요.”
[희나야, 잠깐만…….]
빈정이 상한 희나는 진혁을 무시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냥 고맙다고 하면 될 걸, 또 애 취급이야. 바보 둔탱이 주제에.’
곧바로 진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지만 희나는 수신 거절을 눌렀다. 이렇게 된 이상 보란 듯이 찾아서 그의 앞에 딱 내어놓을 생각이었다.
그대로 화장실을 나오니 다들 벌써 일어나 있었다.
“미안, 기다렸어?”
“괜찮아. 빨리 가기나 하자.”
희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들의 뒤를 따랐다.
맥도날드에서 나온 효찬은 궁전 모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희나는 길을 확실히 기억하기 위해서 주변을 살피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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