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잠입(潛入) (1)
봄이 무르익어 교정 화단에도 꽃이 피고 나무들도 그늘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기분 좋은 금요일 오후. 희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회과 지도실로 향했다. 낡은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자 4평 정도 되는 좁다란 자료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교사 대부분이 이미 바닥재를 교체했건만 이곳은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아서인지 여전히 나무 바닥이 남아 있었다. 안으로 발을 내디디니 자연스럽게 삐걱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낡았지만 먼지는 없었다. 진혁이 그저께 풀썩이는 먼지를 참다못해 ‘건강에 나쁘다’며 청소 도구를 가져와 청소를 하자고 설교를 했기 때문이다. 물론 희나는 하는 척만 하고 결국 진혁이 다 했다.
“별로 달라진 것도 없는 거 같은데. 크게 더럽진 않았잖아요.”
청소를 다 끝내고 뿌듯해하는 진혁에게 희나는 그렇게 말했었다. 아연실색하던 그를 떠올리며 희나는 좀 웃었다.
사실 희나는 위생 관념이 좋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녀가 6살 때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몰래몰래 드나들며 챙겨주던 외할머니는 아홉 살 때 돌아가셨다.
그 후로 한동안은 이모가 보러 와 주었지만 곧 오지 않게 되었다. 아버지에게 들키면 어머니를 어디 숨겼냐고 욕설과 손찌검을 하는 등 행패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이모의 집까지 찾아가서 만행을 부렸기 때문에, 이제 희나는 이모가 어디 사는지조차 모른다.
그런 사정으로 희나가 자란 환경은 더없이 불결한 것이었다. 곰팡이가 가득 낀 지하 월세방에는 바퀴벌레도 심심치 않게 발견되었고 먼지가 그득했다. 그런 집에서 살며 양치질도 샤워도 목욕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 스스로 할 수 있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깨끗하다’의 기준이 다른 사람의 것과 사뭇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몸은 더럽게 하고 다니면 주변에서 말해 주니 알 수 있지만 정리정돈은 딱히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으니 모르는 상태로 커버렸다.
깨끗한 것이 싫은 것이 아니다. 그저 더러운 상태에서도 편안할 수 있도록 익숙해진 것일 뿐. 그래서 정돈을 하려고 해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어디까지 해야 다 한 건지 잘 알지 못했다.
희나는 깨끗해진 바닥을 쳐다보면서 가만히 진혁을 떠올렸다.
눈처럼 하얗고 주름 하나 없이 깔끔하게 다려진 와이셔츠, 정돈된 머리카락, 그리고 언제나 변함없는 은은한 샴푸의 향기. 먹고 난 자리는 항상 깨끗하게 치우고, 체육 수업을 마친 뒤에도 땀 냄새 한 번 풍긴 적이 없다. 아마 살고 있는 집도 별반 다르지 않게 깨끗할 거다.
‘아마도 그런 사람이 좋은 가정에서 자란 거겠지.’
희나는 정갈하게 담겨 있던 맛있는 반찬들과 딸기를 떠올렸다. 진혁의 그런 성품은 아마도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것이리라. 그래서 희나는 의문스러웠다.
‘둔탱이에 바보이긴 하지만 어쨌든 착하고, 어머니도 괜찮은 것 같은데 여동생은 왜 집을 나간 걸까?’
따뜻한 집으로부터 벗어나 굶주림과 위험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다니 바보 같다.
집을 뛰쳐나가고 싶은 심정이야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는 희나였다. 하지만 집을 나간다는 건 앞으로의 미래를 포기하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하수구에서 괴로움을 참지 못해 멈춰 서느니 기어서라도 빛이 보이는 곳을 찾아 가는 것이 낫다는 것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희나는 옆에 놓아 둔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따라 진혁이 늦는다. 하지만 연락이 없으니 도리어 올 거란 확신이 든다. 그녀가 점심을 굶도록 내버려둘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오지 않을 거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 연락을 했을 거다.
희나는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하고 창가에 몸을 기댔다. 햇살이 녹을 듯이 따뜻하다. 최근 계속 네다섯 시간밖에 자지 못해 피로가 쌓인 몸은 무거운 눈꺼풀을 지탱할 힘이 없었다.
두 눈이 스르륵 감기고 흰 얼굴에 긴 속눈썹을 드리운 채 희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그대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괜찮아?”
눈을 뜬 희나는 흠칫 놀라 하마터면 책 더미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진혁이 바로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휘청거리는 희나의 팔을 붙잡고 일으켜 세우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몸 안 좋은 거 아냐?”
그가 커다란 손으로 희나의 이마를 짚으며 다시 얼굴을 가까이 댔다. 흰 얼굴과 부드러운 향기가 바로 코앞에 있자 이상한 기분이 든 희나는 황급히 몸을 뒤로 뺐다.
“그냥 조금 존 거 가지고 무슨 걱정이에요.”
“하지만 얼굴이 좀 빨간데. 열이 있는 거 아냐?”
‘당신이 갑자기 얼굴 들이대서 빨간 거잖아.’
희나는 시선을 팽 돌리며 앙칼지게 말했다.
“열은 무슨……. 그보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미안. 잠깐 볼일이 좀 있어서.”
“배고파 죽겠어요. 밥 줘요-.”
어색함을 몰아내기 위해 투정을 부리자 진혁은 빙긋 웃으면서 가져온 음식을 늘어놓았다.
처음 밥을 얻어먹은 뒤로 희나는 더 이상 점심을 빵으로 때우지 않게 되었다. 진혁이 집에서 보내준 음식들을 그득그득 가져오는 바람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돈을 아끼기 위해’라는 핑계를 대고 있었지만 사실 희나의 입맛은 집밥에 길들여지고 있었다. 맛이든 영양이든 솔직히 빵 같은 것과는 비교가 안 된다.
희나가 맛을 들리기 시작하면서 진혁의 레퍼토리도 다양해졌다. 처음에 가져온 찬합 외에도 “집에 묵혀 두고 먹지 않으니까-.”라며 이런저런 반찬들도 가지고 왔다.
거기에 항상 과일에 관련된 디저트도 준비했다. 딸기를 다 먹고 나니 배나 블루베리, 산딸기나 감, 배, 사과 같은 과일들을 통째로 가져오거나 갈아서 주스로 만들어서 가져다주었다.
실험 삼아 여기저기 재배하고 보내준 것을 다 먹지 못하고 냉동시켜 두었다는 모양이다.
“과외하고 실습하느라 바쁠 텐데 이런 거 준비할 시간이 있어요?”
“너보다야 여유가 있지. 자, 마셔.”
희나는 배불리 식사를 마친 뒤 진혁이 내미는 산딸기 주스를 마셨다. 직접 간 거라 그런지 아주 걸죽해서 주스라기보다는 죽에 가까운 농도다.
“과일을 많이 먹어야 감기에 안 걸려.”
“감기 안 걸렸다니까요-. 잔소리 좀 그만해요. 아저씨 같아-.”
“……너 내 나이 되면 하루에 세 번씩 아줌마라고 불러줄 거야.”
“누가 그때까지 만나준대요? 바보.”
산딸기 주스 탓에 붉어진 혀를 베- 내밀어 보이고 희나는 다음 먹을 것을 찾아 시선을 돌렸다. 신 걸 먹었더니 단 것이 당긴다.
먹이를 찾는 매의 눈에 진혁이 한편에 놓아 둔 쇼핑백이 포착되었다. 희나가 묻지도 않고 냉큼 집어 들자 진혁이 당황하며 손을 뻗었다.
“어? 잠깐만, 그건…….”
그가 말리기도 전에 희나는 이미 내용물을 보고 말았다. 안에는 고디바 초콜릿이 담긴 상자 하나와 초코 쿠키, 그리고 핑크색 편지봉투가 하나 들어 있었다.
“어? 뭐야- 러브레터? 아하하 요즘 세상에?!”
희나가 웃으면서 꺼내자 봉투에 제대로 담겨 있지 않았는지 편지가 툭 떨어졌다. 바로 진혁에게 빼앗겼으나 희나가 이미 몇몇 눈에 띄는 문장을 읽은 뒤였다.
“지현 학생은 귀엽네요, 라는 말에 반했대! 아하하하하하- 차돌 같은 듬직함이래!”
“남의 편지 함부로 읽지 마-!”
진혁이 얼굴을 좀 붉히며 편지를 원래대로 돌려놓는 사이 희나는 배를 잡고 웃었다.
“아하하- 지현이면 선생님 완전 좋아하는 애 아니에요? 고백 받은 거예요?”
진혁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반응을 보니 맞는 것 같았다.
“고백 받느라 늦게 온 거구나-. 대단하네요. 일곱 살이나 어린 여고생에게 고백을 받다니. 거기에 고디바 초콜릿? 저거 엄청 맛있고 비싼 건데…….”
진혁은 고디바 초콜릿 상자를 꺼내더니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에-? 나 주는 거예요?”
“그래, 너 먹어.”
“됐어요-. 고백 초콜릿 먹다 체할라. 성의를 봐서라도 먹지 그래요?”
“그건 지현이가 준 거 아니니까 먹어. 난 단 거 싫어하니까.”
“그럼 선생님이 사 온 거예요?”
그는 고개를 젓고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건 심 선생님이 주신 거야.”
재연이 줬다는 말을 듣자 희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깔끔한 포장을 찍찍- 소리 나게 뜯어내고 상자를 열면서 희나는 틱틱댔다.
“이런 비싼 초콜릿을 주다니 돈이 남아도나. 이 사람도 선생님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에요?”
“관심은 무슨. 그냥 주신 거야. 네 말대로 나 같은 아저씨를 왜 좋아하겠어.”
“그 사람한테는 딱히 아저씨도 아니잖아요. 선생님 이상하게 인기 많고.”
희나는 초콜릿 하나를 꺼내 포장을 벗겨 내어 입에 물고 우물거렸다. 초콜릿은 짜증 날 정도로 맛있었다.
“그러니까 교문에서 나 보고 웃지 마세요. 선생님 때문에 요즘 애들이 나 째려본단 말이에요.”
“그건 나 때문이 아니라 지훈이 때문이 아닐까.”
쓴웃음을 짓는 진혁에게 희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였다.
뭐 사실 그럴 가능성도 좀 높다. 녀석도 인기가 꽤나 있을 법하고, 진혁은 간간이 눈이나 맞추는 정도지만 지훈은 대놓고 쫓아다니고 있었으니까. 아니, 물론 째림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아이들을 대하는 희나의 태도 때문일 것이 제일 크겠지만 말이다.
“지훈이는 아직도 아주 열심이던데. 둘이 진전은 좀 있는 거야?”
“진전이 있긴요. 어차피 좀 들이대다 말 거예요.”
“한번 찔러보는 거면 그 정도로 열심히 하진 않을 거 같은데.”
“모르죠. 2개월 전까지 다른 학교 여자애랑 사귀었다고 하던데.”
사과머리가 일부러 교실 한가운데서 떠들어서 희나도 알게 되었다. 지훈의 관심이 오래가지 않을 거란 걸 강조하려는 심리전이었지만 희나는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헤어진 지 두 달 만에 다른 여자를 쫓아다니다니. 그렇게 쉽게 쉽게 마음이 변하는 걸까.”
“너희 나이 때 2개월이면 긴 거 아냐?”
“나는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하고 싶어요.”
“엥?”
진지하게 말했는데 진혁이 얼빠진 소리를 내자 희나가 째려보았다.
“아, 미안. 네가 너무 소녀스러운 말을 해서 놀랐어.”
“저 소녀거든요?”
“그래. 그렇게 가끔 말해줘. 안 그러면 잊어버릴 거 같아.”
진혁의 놀림에 희나는 팔을 뻗어 셔츠 위로 그의 팔을 팡팡 쳤다. 진혁은 “아파- 아파.” 하면서도 쿡쿡 웃었다.
“내가 어딜 봐서 소녀스럽지가 않다는 거예요-!”
“겉모양만 그럴듯하지 내면은 살풍경하잖아-.”
“내 내면이 뭐가 어때서요?”
“지금도 아저씨같이 앉아 있어. 다리 좀 오므리고 앉으라니까.”
“속바지 입었다니까요?”
희나가 보라는 듯 치마를 휙 들치자 진혁이 기겁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도 네가 소녀야?”
“뭐 어때요-. 지금이 무슨 조선 시대도 아니고.”
“……내가 말을 말지.”
한숨을 내쉬는 진혁의 얼굴이 약간 붉어져 있는 것을 보고 희나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쿡쿡 찔렀다.
“왜 얼굴이 빨개져요? 무슨 음흉한 생각을 하나 본데?”
“넌 경계심을 좀 길러야 돼.”
“경계심은 선생님이나 기르시죠. 맨날 성희롱이나 당하는 주제에.”
학생들이 심심하면 진혁의 엉덩이를 때리고 도망을 다니는 것을 몇 번이나 보고 하는 말이었다.
그런 희나의 말을 듣고 진혁의 한숨이 깊어졌다. 엄연한 성희롱이지만 여고생한테 엉덩이를 맞았다고 고소할 수도 없으니 속수무책이라 당하는 빈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요즘 여고생들은 왜 이렇게 무서운 걸까.”
“선생님을 좋아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좋아한다면 그런 거 안 할 거 같은데. 그냥 장난치는 거잖아.”
“장난이라면 왜 혼나 가면서까지 자꾸 칠까요. 그렇게 찰진가.”
그러면서 희나가 바닥에 닿아 있는 그의 엉덩이 쪽을 내려다보자 진혁이 픽 웃었다.
“너까지 동참하지 마.”
“선생님의 엉덩이로 제 손을 더럽힐 생각은 없어요. 그보다 학교에 마음에 드는 애 없어요?”
희나의 질문에 진혁이 잠시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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