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어느 맑은 날 오후 (2)
“알아?”
희나도 곧 기대에 찬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러자 지훈이 웃으며 희나의 뺨을 꼬집더니 말했다.
“모르는 사람인데.”
“……장난치지 마!”
“토끼눈 뜬 게 귀여워서-. 진짜 이뻐 죽겠네.”
과도한 칭찬에 손발이 오그라든 희나가 기겁을 했다. 옆에 앉아 있던 병태도 질색을 하는 표정으로 지훈의 머리를 밀어내며 핀잔을 던졌다.
“야, 솔로 앞에서 작작 해라. 느끼해서 못 봐주겠네, 진짜.”
“너네는 이 사람 본 적 없어?”
희나는 병태가 지훈을 처치하도록 내버려두고 옆에 있는 현상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현상은 화면을 흘깃 보고는 고개를 저은 뒤 병태에게 넘겼다.
“본 적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정말? 잘 생각해봐. 키 162 정도고 보통 체격이야. 옆으로 돌리면 사진 더 나와.”
희망이 보이자 희나는 눈을 빛냈다. 병태는 슬라이드해서 사진을 몇 장 더 보더니 생각난 듯 무릎을 탁 쳤다.
“아- 이 누나, 생각났다.”
“누군지 알아?”
“잘은 모르는데 본 적은 있어. 혜진인가 뭐 그런 이름이었던 거 같은데.”
이름도 비슷하다. 이 정도면 맞을 확률이 높았다.
“본 적 있어? 어디에서 봤는데.”
“밤에 돌아다니다가 몇 번. 저기 역 앞에 맥도날드 알지? 거기 가끔 와서 짱 박혀 있는 형 여친 같던데.”
“형? 누구?”
“몰라. 가출한 애들 모아서 다니는 형이야. 몇 번 마주쳐서 논 적은 있는데 나도 잘은 몰라.”
가출한 애들이 모여서 다녔다면 더더욱 진혜일 확률이 높았다.
“그 형이면 아마 홍다정은 알 걸.”
잠자코 있던 현상이 한마디 던졌다. 귀가 번쩍 뜨인 희나가 현상을 돌아보았다.
“홍다정이 누구야?”
“너네 반이잖아. 몰라?”
“우리 반? 누구?”
“그 키 좀 작고 얼굴 동그랗고……. 그거 무슨 머리라고 하더라. 웃긴 머리 하고 다니는 애 있잖아.”
설명을 듣자 희나는 곧바로 사과머리가 떠올랐다. 1학년 때도 같은 반이었는데 이름이 홍다정인 줄은 오늘 처음 알았다.
더러운 성격과 굉장히 안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희나는 운동장 구석 쪽에 있는 사과머리를 돌아보았다. 지훈들과는 다르게 곧이곧대로 말해줄 것 같지가 않다.
희나가 그쪽을 보면서 골치 아픈 표정을 짓고 있는데 지훈이 물었다.
“그 여자가 누군데? 왜 찾는 거야?”
“아는 사람 가족인데 가출했다고 해서. 좀 찾아봐 주기로 했거든.”
“그래? 그럼 내가 홍다정한테 물어봐 줄까?”
참 반가운 제안이었다. 희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훈이 뒤를 돌아보더니 앉아 있는 아이들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야, 누구 홍다정 전번 있는 놈 없냐?”
그러자 뒤에서 누군가가 주섬주섬 전화를 꺼내더니 내밀었다. 지훈이 그것을 받아 들고는 그대로 그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곧 저만치서 다정이 전화기를 꺼내 받는 모습이 보였다.
“야, 홍다정. 잠깐 이쪽으로 와 봐.”
다짜고짜 하는 말에 다정의 더러운 성깔을 아는 희나는 움찔했으나 지훈은 거침이 없었다.
“나 신지훈이야. 7반 응원하는 데에 있어. 운동장 가운데. 이리로 와.”
그러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휙 끊었다. 희나는 이런 걸로 될까, 싶었는데 잠시 후 정말로 사과머리가 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사과머리네 패보단 이쪽이 학교에서 더 실세인 모양이었다.
곧 도착한 사과머리는 희나 쪽은 보지도 않고 지훈에게 물었다.
“왜 불렀어?”
“너 이 여자 알아?”
지훈은 오게 해서 미안하단 말도 없이 희나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다정은 사진을 힐긋 보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
“아, 민정 언니네 팸 언니네. 이 언니는 왜?”
다정이 알고 있다는 말에 희나의 눈이 번쩍 뜨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현상이 물었다.
“팸?”
“가출 팸. 한 열다섯 명인가 있어.”
“혹시 연락처나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
희나가 끼어들어서 질문하자 다정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그녀는 지훈을 대할 때와 달리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몰라. 지들끼리 돌아다니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어디 가면 찾을 수 있는지 몰라?”
“글쎄, 그냥 밤에 놀이터 뒤져보거나 역 앞 맥도날드에 죽치고 있으면 나올지도?”
그렇게 말하고 지훈에게 휴대폰을 돌려준 다정은 희나를 보면서 내뱉듯 물었다.
“왜? 너도 가출하려고 그러냐? 하긴, 너네 집 열라 그지 같다며?”
순간적으로 당한 모욕에 희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희나가 다정을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선 채로 희나를 내려다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말을 이어갔다.
“거기 가봤자 조건만 열라 돌리고 니한테 떨어지는 것도 없어. 집 나올 거면 차라리 내가 너 재워줄 오빠들 많이 아는데 소개해줄까?”
“닥쳐, 홍다정. 까이고 싶냐?”
지훈이 얼굴을 굳힌 채 살벌한 어조로 말했다. 항상 웃고 있는 모습만 보이던 지훈의 변화에 희나는 놀랐다. 다정도 놀랐는지 순간 움찔했다가 곧 발끈한 표정이 되었다.
“뭐야, 생각해서 말해줬더니-.”
“물어보는 거에만 대답해. 쓸데없이 입 털지 말고.”
다정은 입 안으로 욕지기를 내뱉는 듯했지만 지훈에게 덤빌 수는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옆에서 현상이 화난 표정을 짓고 있는 지훈을 진정하라는 듯 툭툭 치고는 대신 그녀에게 물었다.
“그 여자 연락처 알 만한 사람 몰라?”
“몰라. 그쪽이랑 상관하기 싫어.”
“아까 민정 언니란 사람은?”
“그 언니도 그쪽 팸에서 도망쳤어.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를걸. 가출 팸이랑 친하게 지내면 짜증 나. 볼 때마다 한 번만 재워달라고 하고. 목욕만 하고 간다고 집에 들어와서 안 나가고 며칠씩 박혀 있어. 나도 민정 언니 때문에 엄마한테 열라 깨졌어.”
짜증 내는 표정이나 어조로 볼 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지훈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희나를 보고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다정에게 가라는 듯 손짓을 했다.
멋대로 불러 놓고 손짓 하나로 가라고 하는 행태에 다정도 성질이 나는지 화난 표정이 되었지만 이를 악물고 돌아섰다. 대신 가기 전 다정이 희나를 쏘아보면서 입으로 소리 없는 욕설을 했다.
아무래도 교실에 돌아가면 또 피곤하게 굴 것 같다는 생각에 희나가 눈썹을 찌푸리는데 옆에 있던 지훈이 다정을 위협했다.
“홍다정, 너 나 없는 데서 희나한테 싸가지 없이 하다 걸리면 진짜 개 털릴 줄 알아. 빡치면 니네 다 밀어버리는 수가 있어.”
“누가 뭐 한댔어? 왜 자꾸 난리야, 대체?”
지훈의 냉랭한 표정에 다정은 쫀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냥 꼬리를 말기는 싫은지 사납게 말하고는 휙 돌아서 가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지훈이 인상을 팍 구기자 현상이 그의 얼굴을 휙 밀면서 말했다.
“여자애하고 싸우지 마, 또라이 새끼야.”
“싸우긴 누가 싸워. 좋게 말로 하고 있잖아.”
“좋게 하긴 뭘 좋게 해, 미친놈아.”
현상은 딱딱하게 지훈에게 잔소리를 날리고는 희나를 향해 말을 이었다.
“홍다정이 모르면 아마 다른 애들은 거의 모를 건데. 가서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겠어.”
“나도 역 앞에 맥날에서 봤으니까 12시 넘어서 가봐. 있을지도 몰라.”
“그래. 그런데 혹시 그 가출 팸 다른 멤버들 어떻게 생겼는지 좀 알려줄 수 있어?”
“사진은 없는데. 근데 보면 딱 알 거야. 덩치 크고 구제 청바지에 위에 롯데 자이언츠 티셔츠 입고 다니거든. 만날 똑같은 옷만 입어.”
이번엔 병태가 희나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이 정도면 큰 수확이다.
“……고마워.”
희나가 딱딱하긴 해도 감사를 표하자, 지훈의 입꼬리가 샥 올라갔다. 그러더니 바로 의기양양해져서 희나의 어깨를 팔로 감싸며 물었다.
“가서 찾아볼 거야? 내가 같이 가 줄까?”
“필요 없어! 그리고 갑자기 자꾸 덥석덥석 만지지 좀 마!”
희나가 팔을 밀어냈지만 지훈이 이번엔 다른 손으로 희나의 볼을 꼬집었다. 그리고 능청스럽게 말했다.
“에이- 일일이 허락받고 만질 순 없잖아.”
“허락받고 만져야지, 당연히!”
“물어보면 허락해줄 거야?”
“안 해주지!”
“그러니까 할 수 없잖아.”
느물느물하게 웃고 있는 표정이 아까 다정을 위협하던 사람과는 다른 사람 같았다.
희나는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넌 내 기분은 상관없는 거야?”
“음…… 그런 건 아닌데.”
지훈은 생각하듯 턱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더니 희나를 보았다.
눈이 마주친다 싶더니 순식간에 얼굴이 다가왔다. 그리고 피할 새도 없이 볼에 느껴지는 뭉클하고 촉촉한 감촉에 희나는 기겁해서 일어났다.
주변에서 야유가 일어나는 가운데 희나의 경악한 시선을 받으며 지훈이 씩 웃었다.
“너, 너- 진짜!”
“허락받는 거보다 일단 하고 나서 용서받는 게 쉽잖아-.”
“누가 용서한대!”
희나는 붙잡으려는 지훈을 확 밀어내고는 걷기 시작했다.
“어디 가, 희나야~!”
“따라오지 마, 멍청아!”
맞추듯이 오후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가 울렸기 때문에 지훈도 따라오지 않고 멈췄다. 하지만 뒤쪽에서 웃음소리와 떠드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이야- 화나게 했다, 화났다-.”
“아, 개 부러운 자식. 졸라 느끼해-!”
“희나야- 이따 데리러 갈게- 이따 봐~.”
“오지 마!”
희나는 주먹을 붕붕 휘두르며 소리쳤다. 그리고 웃음소리로부터 도망치듯이 걸음을 빨리했다.
어쨌든 그의 덕에 진혁의 여동생의 행방에 대한 실마리를 찾았다. 진혁은 1년이나 찾아다녔는데 생각보다 너무 쉽게 풀려서 희나도 좀 얼떨떨했다.
그에게 알리려고 스마트폰을 꺼내 들던 희나는 메시지를 전송하려다가 곧 그만두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 더 확실히 찾고 나서 알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였다.
맥도날드에 가서 기다려도 진혜가 직접 나타나지 않고 패거리들만 와 있을 수도 있다. 그럼 그녀의 행방에 대해서 물어봐야 하는데 아무래도 어른 남자인 진혁과 함께 물으면 솔직하게 대답해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오늘부터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한동안 맥도날드에서 저녁식사를 해결해야겠다고 희나는 생각했다.
‘전화번호나 거처까지 알아낸 다음에 말해주면 깜짝 놀라겠지.’
왠지 기분이 뿌듯해진 희나는 시선을 돌려 앞쪽에 서 있는 진혁을 힐끔 보았다.
그는 여전히 여자애들에게 둘러싸인 채 난처해하고 있었다. 희나는 그걸 보고 픽픽 웃다가 그쪽으로 다가가는 재연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서글서글해 보이는 얼굴로 웃으면서 슬쩍슬쩍 진혁의 팔을 터치한다. 여우같아서 마음에 안 드는 여자다.
희나는 입을 비죽이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교실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아직도 희나 쪽을 보고 있던 지훈이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냉정하게 고개를 확 돌려 외면했지만 더 이상 화는 나지 않았다. 정말로 허락보단 용서가 쉬운 모양이다.
희나는 헤벌쭉 웃으면서 걷다가 골대에 부딪칠 뻔한 지훈을 보고 픽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운동장을 가득 메운 웃음소리 위로 서서히 기울고 있는 5월의 햇빛을 만끽하며 그녀는 교실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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