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어느 맑은 날 오후 (1)
점심시간이 끝나고 교실로 돌아오니 아이들이 모두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시간표상으로는 물리 시간이었기 때문에 의아했지만 희나에게는 물어볼 만한 친구가 없었다. 잠시 눈치를 보다가 어쨌든 대세를 따라 옷을 갈아입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운동장에는 2학년 7개 반이 다 나와 있었다. 교생들도 모두 도우미로 동원됐는지 진혁의 모습도 보였다. 곧 반장들의 지시에 따라 각 반별로 나뉘어서 늘어섰고, 2학년 체육 담당인 남자 선생이 앞에 서서 커다란 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오늘 오후에는 체육대회 2학년 구기 종목 예선을 한다. 여자 반은 반 대항으로 피구, 남자 반은 축구 예선이다. 여자는 한 팀, 남자는 두 팀씩 뽑아서 대회 날은 1, 2학년이 먼저 시합하고 이긴 팀이 3학년 대표랑 붙는 거야.”
희나는 그제야 체육대회 프린트를 받은 것이 기억났다.
보통의 입시 교와 다르게 희나가 다니는 천호고등학교는 체육대회를 좀 확실하게 하는 편이었다. 종목도 많고 예선도 철저히 했다. 모두 한 가지 이상의 종목에 출전해야 했기 때문에 희나는 묻어갈 생각으로 피구를 지원했었다. 희나의 얼굴에 귀찮음이 가득 떠올랐다.
“일단 반장 나와서 제비 뽑아. 반이 홀수니까 제비 뽑아서 한 팀은 부전승이다.”
희나의 학교 2학년은 1, 2, 3반은 여자 반이고 4반이 없고 5, 6, 7, 8반은 남자 반이었다.
그나마 희나의 반 반장이 부전승을 뽑아 한 경기만 하면 되었다.
제비뽑기가 끝나자마자 진혁의 인솔로 3반은 조회대 옆에 있는 스탠드로 이동했다.
“진혁 쌤 생각보다 튼실해 보이지 않아?”
“은근 짐승남이네. 아, 볼수록 내 스타일이야.”
뒤에서 여자애들이 소곤대는 소리를 듣고 희나는 진혁 쪽을 흘깃 보았다. 슈트 대신 반팔 티셔츠에 트레이닝 복을 입고 있어서 팔과 체형이 드러나 있었다.
전에 상의를 벗었을 때도 느꼈지만 슈트를 입고 있으면 그냥 마른 체격으로 보이는데 의외로 몸이 다부지다. 별로 그래 보이지 않는데 은근히 운동을 열심히 하는 모양이다.
“피구 출전하는 학생 다 이쪽으로 와주세요.”
다들 스탠드 계단에 층층이 앉고 나자 진혁이 말했다. 곧 군데군데에서 여자아이들이 일어나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희나도 마지못한 표정으로 그녀들의 뒤를 따랐다.
내키지 않아 하는 희나와 다르게 같이 출전하는 나머지 아홉 명은 의욕이 활활 불타고 있었다. 그녀들은 진혁을 동그랗게 둘러싸고 꺅꺅대면서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선생님- 우리가 다 이기고 올게요.”
“완전 쩔게 1등 할게요-! 쟤네들 울려버려요-!”
“그래요. 힘내요-.”
여고생들의 패기 넘치는 출사표에 진혁은 쿡쿡 웃으며 파이팅을 해주었다.
뒤쪽 스탠드에 앉아 있던 한 여학생이 큰 소리로 외쳤다.
“샘- 지현이가 이기면 한번 안아 주면 좋겠대요-.”
“야- 내가 언제 그랬어~!”
“그랬잖아-! 와, 말 바뀌는 거 봐!”
지현이 얼굴을 붉히면서 손을 휘휘 내젓자 진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소동의 와중에서 진혁은 고개를 돌리다가 약간 떨어진 뒤쪽에 덩그러니 서 있는 희나를 발견했다.
“너도 시합에 나가?”
그가 희나에게 말을 건네자 순간 주위가 조용해지며 그녀에게로 시선이 확 쏠렸다. 늘 학생들에게 존대하는 진혁이 희나에게 자연스럽게 반말로 말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희나는 당황했지만 둔탱이 바보는 눈치채지 못했는지 태연자약하게 이쪽을 보고 있었다.
“열심히 해.”
진혁이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말하자 주변의 눈초리가 더 무시무시해진다.
희나는 대답하지 않고 인상을 찌푸린 채 슥 몸을 돌렸다. 자각이 없는 인기남은 이래서 피곤하다.
그녀의 까칠한 태도에 잠시 주변에 정적이 맴돌았지만 10초도 되지 않아 다시 원래의 분위기로 돌아갔다. 아이들은 다시 진혁을 둘러싸고 수다를 떨기 시작했고, 희나는 뒤로 물러났다.
“재수 없어.”
단순한 인원 점검이었던 소집이 끝나고 스탠드로 걸어가는 희나의 뒤에서 불쾌한 소곤거림이 들려왔다.
“얼굴 좀 예쁘다고 지가 공준 줄 알아, 싸가지는 더럽게 없는 게.”
“저딴 게 뭐가 좋다고 난리들인지. 남자 놈들은 진짜 눈이 삐었나 봐.”
희나를 향해 하는 말임이 명백했다. 목소리를 낮췄지만 충분히 들릴 거라는 걸 알고 하는 말들이다.
발끈했지만 희나는 꾹 눌러 참았다. 어차피 가망 없는 짝사랑에 빠져 질투 같은 거나 하고 있는 불쌍한 영혼들일 뿐이다.
스탠드 한구석에 주저앉은 희나는 빨리 끝나고 교실로 돌아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예선도 지는 편이 낫다. 예선에서 올라가 봐야 체육대회 때 또 경기를 해야 할 테니 귀찮을 뿐이다. 괜히 뛰어다니다가 힘이 빠지면 아르바이트할 때 힘들어진다.
그때 저 멀리서 호각 소리와 함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 5반과 7반 축구 예선 시작합니다. 가운데로 다들 모이세요-.”
재연이 한가운데에 서서 손짓을 하며 외치고 있었다.
희나가 멍하니 그쪽을 바라보는데 저 멀리 익숙한 분홍색이 섞인 갈색 머리가 보였다.
“희나야-!”
지훈은 그녀를 발견하고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피해다닐 테지만 희나는 마침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웬일이야? 도망 안 가네?”
얌전히 앉아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희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지훈이 빙긋 웃었다. 희나는 머리 위의 커다란 손을 치워 내면서 말했다.
“너한테 물어볼 게 좀 있는데.”
“어? 뭔데?”
그러나 채 묻기도 전에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자훈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신지훈- 예선 시작한다-. 빨리 와!”
그도 축구 시합 대표로 뽑힌 모양이었다. 지훈이 희나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나 지금 가봐야 되나 본데. 이따가 얘기할까?”
딱히 급한 질문은 아니었으므로 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끝나면 찾으러 올……. 아, 아니다. 이쪽으로 와.”
지훈의 큰 손이 희나의 가느다란 팔목을 덥석 잡았다. 희나는 놀라서 뿌리치려고 했지만 힘이 세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대로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서 걸어갔다. 지훈은 5반 골대 근처에 희나를 앉히고는 말했다.
“나 축구하는 동안 여기서 보고 있어-. 알겠지?”
아직 5월이었지만 햇빛이 서서히 뜨거워지고 있었으므로 오후 두 시에 운동장 한가운데에 서 있기는 조금 부담스럽다. 불평하기도 전에 목에 감고 있던 스포츠 타월을 희나의 머리에 꼼꼼히 씌워준 지훈이 그대로 경기를 하러 달려 나갔다.
감독이 플레이볼을 외치고 곧 경기가 시작되었다.
“야-! 꼭 이겨라! 이기면 담탱이가 치킨 쏜댔어!”
“7반 존못 새끼들 눌러버려!”
희나 주변에서 각 반 아이들의 열띤 응원이 시작되었다.
남자 반들의 경기였지만 의외로 여자아이들도 나와 있었다. 그녀들의 시선은 대부분 전방에서 상대 진영을 휘젓고 있는 지훈에게 쏠려 있었다. 외모에서 예상 가능하듯 인기가 있는 듯했다.
희나는 무릎을 세워 모은 뒤 그 위에 턱을 괴고 경기를 관람했다. 축구에 관심이 전혀 없는 문외한이었지만 지훈이 잘한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주변에 있는 아이들과 운동 신경 자체가 다르다는 느낌이었다.
‘하긴 잘하니까 자신만만하게 보고 있으라고 말했겠지.’
얼마 후 한동안 골대 앞에서 파상 공세를 펼치던 지훈이 날린 슛이 철썩- 소리를 내며 강하게 골대를 갈랐다.
다들 지훈에게 몰려들고 양팔을 활짝 벌린 지훈이 환하게 웃으면서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렸다. 골 세리머니를 하는 모양이었다.
‘체육대회 예선에서 할 건 다 하네.’
희나는 심드렁하게 생각했지만 옆에 있는 여자애들은 사진을 찍고 난리도 아니었다.
“아하하- 귀여워, 신지훈.”
“꺄- 이쪽으로 온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지훈이 점점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왠지 불안한 기분이 들어 희나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벗어나려고 슬쩍 돌아서는 때였다.
빠른 속도로 달려든 지훈의 억센 팔이 뒤에서 희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방금까지 달리던 몸의 후끈한 열기가 그녀의 몸에 훅 끼쳐 왔다.
파격적 골 세리머니에 다들 휘파람을 불고 박수를 치고 난리도 아니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희나는 패닉에 빠졌다. 그녀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로 몸을 감고 있는 팔을 떼어 내려고 몸부림을 쳤다.
“이거 놔! 바보야!”
“나 골 넣는 거 봤어-? 멋지지! 굉장했지?”
지훈은 신이 나서 말했지만 희나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지훈은 놔줄 생각을 하지 않았고, 주변에 잔뜩 있는 교생이나 선생들도 말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저 멀리 스탠드 쪽에서 박수를 치고 있는 재연과 웃음을 참고 있는 듯한 진혁이 보이자 희나는 이를 악물었다.
만족할 때까지 희나를 꼭 안고 있던 지훈은 체육 선생이 돌아오라고 호루라기를 불자 그제야 그녀를 놓아 주었다. 그리고 희나에게 손짓을 하며 달려갔다.
“다음 골 넣으면 뽀뽀하러 올게-.”
“웃기지 마!”
희나는 소리를 질렀지만 주변의 반응이 열렬해서 묻혀버렸다.
평소 그의 행태를 볼 때 저 세리머니 예고는 농담이 아닐 가능성이 농후했으므로 희나는 일단 피신하기로 했다.
때마침 여자 1반과 2반의 피구 예선도 끝난 참이었다. 그녀는 경기에 출전하기 위해 3반 스탠드 쪽으로 갔다. 얼굴이 빨개진 채 으르렁대는 그녀를 보고 진혁은 쿡쿡 웃으며 선수들을 정렬시켰다.
그리고 곧 첫 경기 승리 팀인 1반과 3반의 피구 예선이 시작되었다. 희나는 대충 가만히 서 있기만 했지만 경기는 싱겁게 3반의 승리로 끝났다.
여자부 피구 예선이 끝남과 거의 동시에 남자 5반과 7반의 경기도 끝났다. 당연하게도 7반의 승리였지만 지훈의 추가골 없이 3:0으로 끝났다.
지훈이 멀찍이에서 희나를 발견하고는 털레털레 걸어오며 말했다.
“어디 갔었어~. 너 없어지고 힘 빠져서 그 후로는 한 골도 못 넣었어.”
“나도 피구 예선 나갔어.”
“피구 나가는구나? 난 또 뽀뽀하기 싫어서 간 줄 알았네.”
“당연히 하기 싫지, 바보야!”
희나가 앙칼지게 말했지만 지훈은 들은 척도 안 하고는 그녀의 팔목을 잡고 끌고 가기 시작했다.
“어디 가는 거야?”
“저기 가서 남자 반 시합 보자-. 자리 잡아 놨어.”
“내가 거길 왜 가?”
“나한테 물어볼 거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 말에 희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지훈이 이끄는 대로 따라 걸었다. 곧 7반 아이들이 잔뜩 모여서 경기를 관전하고 있는 앞까지 와버렸다.
“어? 주희나다.”
“신지훈 마누라? 오, 진짜 졸라 예쁘네.”
남학생 반 중간으로 여학생이 밀려들어 오자 웅성웅성 떠들썩해졌다. 이만큼 소란스러운데도 지훈은 넉살 좋게 웃으면서 얼굴을 푹 숙인 채 이를 갈고 있는 희나를 가운데로 이끌었다.
앞쪽에 서 있던 재연은 갑자기 아이들이 시끄러워지자 돌아보다가 희나를 발견했다.
“어머, 지훈아-. 반별로 앉아야 되는데-.”
“재연 샘 한 번만 봐주세요. 인륜지대사가 걸려 있어요-.”
“아하하- 그래그래. 대신 담임 샘한테 걸리면 난 몰라-.”
재연은 서글서글하게 허락했다. 전부터 느꼈지만 희나가 보기에 그녀는 지훈에게 유난히 관대한 느낌이다.
교생의 허락까지 떨어지자 주변에서 지훈에게 야유를 날리기 시작했다.
“우우우- 신지훈. 너만 여자 끼고 보기냐?”
“커플 물러가라- 커플 물러가라-.”
일진이어도 평소에 애들을 괴롭히는 건 아닌지 반 아이들 모두가 스스럼없이 한마디씩 던졌다. 눈만 마주쳐도 버럭대는 사과머리 패랑은 완전히 다른 분위기다.
“야- 왔냐?”
“아, 저 미친놈- 진짜로 데리고 왔네.”
지훈이 사람들 틈을 뚫고 앞으로 가자 맨 앞자리 중앙에 앉아 있던 두 소년이 말을 걸었다.
둘은 지훈에게는 욕설을 날렸지만 희나에게는 눈인사를 해 왔다.
이 두 사람은 희나에게도 구면이었다. 저번에 쓰레기 소각장 쪽으로 불려 갔을 때 지훈이 자신의 베프들이라며 소개해주었었다. 희나를 여자 친구라고 소개하는 바람에 그녀가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갈색 머리에 태닝한 듯 캐러멜 빛 피부인 쪽이 박병태, 그리고 마른 체격에 차분해 보이는 인상을 한 쪽이 7반 반장인 민현상이었다.
저 두 사람은 전교에서도 상당히 유명해서 소개 받기 전부터 희나도 이름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병태는 가벼워 보이는 외모와 다르게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에 시험 끝날 때마다 아침 조회 방송에 나와서였고, 현상은 친구였던 소영이 짝사랑하고 있는 상대였다.
지훈도 교내에서는 꽤나 유명한 아이였다. 그러니 희나에게 다짜고짜 문자를 보내서 ‘나 신지훈이야’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거다. 전교 1등과 반장과 일진의 조합이라니 아이러니하다.
지훈은 성큼성큼 걸어가서 욕하고 있는 둘의 머리를 꾹꾹 눌렀다. 희나도 그 옆으로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좀 덥지? 이거로 얼굴 가려.”
지훈이 부채를 하나 희나에게 내밀며 웃었다. 아까부터 시종일관 싱글벙글이다. 아무래도 희나가 순순히 따라온 것이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부채를 받아 들면서 희나는 슬그머니 본론을 꺼냈다.
“여기까지 왔으니까 일단 말 좀 묻자.”
“응, 그래. 뭔데?”
그녀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진혁의 여동생 사진을 띄운 뒤 지훈에게 내밀었다.
“혹시 이 사람 알아?”
지훈이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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