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탐색전 (1)
월요일 아침.
일찍 일어난 희나는 교복을 챙겨 입고 고시원 식당으로 갔다.
원래 아침 같은 건 챙겨 먹은 적 없었지만 고시원으로 온 뒤로 매일 아침 토스트를 한 조각씩 먹게 되었다. 여태껏 집에 토스터 같은 게 없었기 때문에 노릇하게 구워진 토스트를 원하는 때마다 먹는 게 즐거웠다.
흐뭇한 표정으로 레인지 앞에 서 있는데 누군가 식당 안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이 있었다. 입주민들과 친하게 지낼 맘은 별로 없었기 때문에 희나는 시선을 피했다.
“진혜, 잘 잤어?”
남자가 인사를 던지는 소리가 들렸으나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희나는 별생각 없이 토스트가 빨리 구워지기만을 기다렸다.
“진혜야?”
이번에는 좀 더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이상한 느낌이 든 희나가 뒤를 돌아보니 바로 한 걸음쯤 뒤에 느끼한 총무 남자가 서 있었다.
그녀가 흠칫 놀라자 남자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진혜, 왜 그렇게 놀라? 인사하면 대답 좀 해 줘-.”
그 말을 듣고서야 희나는 남자가 자신을 부른 거라는 걸 깨달았다.
‘유진혜’ 진혁의 여동생 이름이다. 이 집을 계약할 때 그의 여동생으로 위장했으니 여기서 희나의 이름은 ‘유진혜’다. 자신의 실수에 좀 당황했지만 희나는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근데 왜 부르세요?”
“왜는, 그냥 인사나 하려고 불렀지. 아침 먹고 학교 가니?”
“네.”
“혼자 나와서 사느라 힘들지? 힘든 일 있으면 오빠에게 얘기해.”
그렇게 말하며 남자가 헤벌쭉 웃었다.
이 남자는 항상 희나와 마주칠 때마다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고 말을 걸어온다. 그리고 자신을 ‘선규 오빠’라고 불러 달라고 강조하곤 했다.
‘오빠는 무슨 오빠. 웃기지도 않아.’
희나는 능글맞아 보이는 그를 훑어보며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싫었기 때문이다.
희나가 짧은 바지나 타이트한 옷을 입고 화장실에 가거나 복도로 나오면 선규는 항상 그녀의 쭉 뻗은 다리나 가느다란 몸을 훑어보곤 했다. 지금도 가슴 언저리를 흘끔거리고 있었다. 음흉해 보이는 시선을 받으니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희나는 몸을 돌리며 딱딱하게 말했다.
“힘든 거 없어요.”
“그래? 그래도 혹시 뭐 맛있는 거 먹고 싶을 때 있으면 그럴 때도 다 말해. 진혜같이 예쁜 여자애가 혼자 나와서 사니까 오빠가 안쓰러워서 그래.”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때마침 토스터에서 칭, 소리가 나자 살았다는 기분이 든 희나는 토스트를 꺼내 든 채 선규에게 대충 고개를 까딱하고 서둘러서 식당을 뒤로했다.
“잘 다녀와-. 이따 저녁에 보자~.”
대놓고 싫어하는 내색을 하는데도 선규는 뒤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런 그를 계속 무시하고 고시원 밖으로 나오니 조금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총무라서 매일매일 입구에 앉아 있는 터라 피할 수도 없다. 희나로선 저 남자와 계속 마주쳐야 하는 게 고시원 생활의 유일한 단점이었다.
‘뭐 어딜 가나 저런 인간들은 있게 마련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주유소나 카페 아르바이트를 몇 년이나 했으므로 집요한 진상 손님들에게는 어느 정도 이골이 나 있었다.
노릇하게 익어 바삭바삭해진 토스트를 입에 물자 그나마 기운이 좀 나는 것 같았다.
아작아작 토스트를 먹으며 걷던 희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 부근에 도착했다.
이전까지 희나에게 학교는 그냥 잠이나 자고 졸업장이나 따기 위해 억지로 가는 장소에 불과했는데, 최근에는 학교 가는 게 좀 즐거웠다.
그 이유에는 고시원에서 살게 되어 가깝고 편한 것도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어떤 바보 호구 교생의 지분이 크다는 걸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뭐 그저 편하게 얘기 나눌 상대가 생긴 것뿐인 정도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희나의 눈에 때 맞춰 멀리서 크고 호리호리한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단정한 슈트에 흰 얼굴. 진혁이다.
그녀의 가슴에서 살짝 ‘쿵’ 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금요일 저녁에 재연과 함께 어딘가로 가는 것을 본 뒤 아무 연락도 주고받지 않았다.
그는 교문 안쪽에 학주와 함께 선 채로 학생들을 보고 있었다. 교문 지도를 나온 모양이었다.
그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차에 평소보다 빨리 마주치게 되자 희나는 괜히 어색했다. 게다가 여태까지 둘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서로 단 한마디도 나눈 적이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갈수록 왠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진혁은 아직 희나를 발견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제 겨우 몇 미터 앞에 그가 있었다.
이쪽을 눈치채기 전에 희나가 빠른 속도로 교문을 벗어나려고 하는데, 눈이 마주쳤다. 진혁의 눈이 살짝 크게 뜨이는가 싶더니 건조하던 시선이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곧 그는 검지를 들더니 입가를 톡톡 털어 내는 듯한 동작을 했다…….
‘뭐 하는 거지?’ 하고 생각하면서 무의식중에 그를 따라 자신의 입가로 손가락을 가져가던 희나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토스트의 빵가루가 뺨에 잔뜩 붙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치, 누가 말해달랬나.’
손등으로 입가를 거칠게 쓱쓱 문지르며 쏘아보자 진혁이 웃음을 참는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점점 사이가 가까워져 그녀가 그의 바로 앞을 지나치는 순간이었다. 경쾌한 소녀들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꺄- 진혁 샘- 오늘도 멋있어요!”
“……고마워요. 안녕하세요.”
호들갑스러운 인사에 진혁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쪽으로 돌아갔다. 희나는 그사이 그를 지나쳤다.
뒤에서 여학생들이 저돌적인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희나가 슬쩍 시선을 돌려 돌아보니 진혁을 유난히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소녀들이었다.
“명찰은 주머니 밖으로 꺼내주세요.”
“선생님이 꺼내주세요~.”
진혁이 어찌 됐든 교문 지도를 위해 지적을 하자 지적당한 여학생이 대담하게 명찰이 든 가슴 주머니를 내밀었다. 진혁은 당황하고 학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들, 교생 선생님 그만 좀 괴롭히랬지!”
“괴롭히는 거 아니에요~. 선생님 귀여워해 주는 거예요~!”
학주의 호통에도 그녀들은 까르르 웃으며 당돌하게 받아치고는 “선생님, 이따 봐요-.” 하고 진혁의 엉덩이를 툭 치더니 손을 흔들며 빠르게 도망쳤다.
성희롱과 함께 학주의 눈총까지 받게 된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앞에서 보고 있던 희나와 눈이 마주쳤다.
이번엔 희나가 한쪽 입술을 올리고 진혁이 멋쩍은 표정이 되었다. 그가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이긴 기분이 들어 좋았다.
희나는 천천히 돌아서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교실로 향했다.
그러나 희나의 승리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번 중간고사 성적 나왔으니까 밥 먹기 전에 유 선생님한테서 꼬리표 받아 가.”
4교시 화학 수업을 마칠 즈음 화학 선생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 희나는 등골이 싸해졌다.
원래부터 성적이 썩 좋지 않았고, 특히 이번 중간고사는 제대로 답을 썼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분명히 끔찍한 점수를 받았을 것이다.
그냥 받지 않고 교실을 나가고 싶었지만 희나는 망설이다 결국 줄 끝에 가서 섰다. 안 받고 나가면 지는 기분이다. 게다가 꼬리표가 진혁의 손에 고스란히 남게 되니 좋을 것도 없었다.
차례가 되자 희나는 딴 데를 보며 손을 슥 내밀었다. 진혁은 별다른 반응 없이 손 위에 가만히 꼬리표를 올려주었다.
희나의 발걸음은 교실을 나오자마자 빨라졌다. 복도를 거의 달리다시피 주파해 사회과 지도실에 들어서자마자 황급히 꼬리표를 보았다. 예상대로 점수는 형편없었다.
굳이 그를 의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희나의 발길질이 죄 없는 벽에 몇 번 날아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문이 열리고 진혁이 나타났다. 그 의기양양한 표정을 보자마자 희나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쏘아붙였다.
“일하느라 공부 못 한다고 말했잖아요!”
“별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말은 그렇게 하지만 웃음을 참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 표정이 얄미워서 희나는 바람이 일어나도록 휙 걸어서 입구 쪽으로 다가갔다.
“어디 가?”
“빵 사러요.”
꼬리표 확인하느라 매점에 들르지 못했다. 희나의 대답을 들은 진혁은 지도실 문을 닫으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왜요? 진짜 삥 뜯겨주게요?”
물으면서 보니 진혁의 손에 큼직한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뭐지?’
희나는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진혁은 말없이 바닥에 종이를 깔더니 안에 든 것을 꺼내서 펼쳐놓기 시작했다.
“이게 다 뭐예요?”
“주말에 본가에 갔다가 아침에 바로 학교로 왔거든. 어머니가 싸주셨어.”
그러면서 맨 위의 찬합을 열자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진동을 했다. 봄나물 무침들이 잔뜩 담겨 있었다.
찬합을 들여다본 희나가 입술을 내밀며 말했다.
“다 풀밖에 없잖아-. 아저씨 같은 입맛.”
“나물 싫어해?”
“음…….”
싫다기보다 먹어본 적이 없었다. 희나가 그렇게 말하자 진혁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안 먹어 봤어? 집에서…….”
뭔가 말하려던 진혁은 거기서 말을 멈췄다. 집밥을 챙겨줄 사람이 없다는 걸 상기한 것이다.
그는 나무젓가락을 반으로 갈라서 내밀더니 부드럽게 권했다.
“먹어봐. 맛있어.”
내키지 않았지만 권하는데 안 먹기도 좀 그래서 희나는 머뭇거리며 고사리나물에 손을 뻗었다.
생긴 것도 이상하고 맛도 없을 것 같아 오만상을 찌푸리며 입에 넣자 진혁이 옆에서 쿡쿡 웃었다.
“맛이 어때?”
“아저씨 맛 나요.”
“어허, 네가 어린이 입맛인 거지. 어머니가 직접 무치신 거야.”
“나쁘지는 않네요.”
사실 참기름 향이 고소하고 짭짤해서 입맛이 돋았다. 인상을 쓰면서도 젓가락을 내려놓지 않는 그녀를 보고 웃으며 진혁이 나머지 찬합을 열었다.
나물들과 밥, 그리고 각종 먹음직스러운 밑반찬도 맛있어 보였지만 마지막 찬합을 열었을 때가 클라이맥스였다.
희나의 입이 헤, 하고 벌어졌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아주 싱싱해 보이는 딸기였다.
“딸기까지 사 온 거예요?”
“아니. 우리 본가가 과수원을 하거든. 어머니가 직접 재배하신 거야.”
희나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진혁을 돌아보았다. 흰 피부에 어딘지 귀티가 나서 도회적인 인상이 강했는데 본가가 과수 농가라니 의외였다.
“흐응……. 근데 과수원에 딸기도 심어요?”
“군데군데 자투리땅에 이것저것 여러 가지 같이 심거든. 이 나물들도 심어서 재배한 거야. 지금 철이라서 맛있어. 먹어봐.”
보기만 해도 색도 좋고 예쁘게 통통한 것이 맛있을 것 같았다. 못 박힌 듯 쳐다보는 희나에게 진혁이 딸기를 하나 집어 내밀었다.
덥석 베어 물자 진혁이 손을 살짝 움찔했다. 왜 그러나 하던 희나는 자신이 진혁의 손에서 그대로 음식을 받아먹었다는 걸 곧 깨달았다.
‘손으로 받았어야 했는데 왜 그랬지.’
엉뚱한 행동을 한 것이 민망해지는데 진혁이 곧 태연한 표정으로 돌아와 부드럽게 물었다.
“맛있지? 너 딸기 좋아하잖아.”
“어떻게 알았어요?”
“베리베리 파르페에서 딸기 초코 파르페만 먹잖아.”
‘별 사소한 걸 잘도 기억하네’ 하고 생각하던 그녀는 단정한 흰 얼굴이 바로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의식했다. 언젠가 맡은 적이 있는 바디 샴푸 향이 순간적으로 확 끼쳐 오는 것 같아서 희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휙 뺐다.
“왜 그래?”
“아니에요. 빨리 밥이나 먹어요.”
어색함을 감추려고 희나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찬합 하나를 집어 든 채 책 더미에 주저앉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진혁은 그런 희나를 보며 미소를 짓다가 그녀의 옆 바닥에 나란히 앉아 같이 먹었다.
“잘 먹네. 남은 건 가져갈래?”
“아니요. 필요 없어요.”
희나가 딱 잘라 말하자 진혁이 잠시 멈칫했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딱딱하게 말을 했다 싶어서 그녀는 빠르게 덧붙였다.
“가져가도 집에선 먹을 데가 없어요.”
“별로 강요하려는 건 아니지만, 식당 있잖아?”
희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사실대로 말해 버렸다.
“식당 갈 때마다 그때 총무 아저씨가 느끼하게 굴어서 짜증 나요.”
“총무 아저씨? 그 사람이 왜?”
“그냥요. 자꾸 친한 척하면서 도와준다고 하고, 먹을 거 사 준다고 하고…….”
“호의로 그러는 걸까?”
‘음흉한 눈빛이 없다면 몰라도 그냥 호의일 리가.’
희나는 그가 자꾸 음흉하게 쳐다본다는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도끼병처럼 보이기도 싫고 그런 말을 남자인 진혁에게 하기가 좀 민망했다.
“몰라요. 호의든 말든 짜증 나요. 자꾸 아저씨 주제에 오빠라고 부르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음, 그래?”
“스물일곱 살이나 먹은 아저씨 주제에, 무슨 오빠. 웃기지도 않아.”
“그 말은 좀 서글프네.”
희나가 코웃음을 치며 한 말에 진혁이 데미지를 입은 표정이 되었다. 희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요? 선생님 몇 살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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