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시선을 돌리면 (2)
허락이 떨어지자 그는 그녀의 옆에 와서 아무 책이나 뽑아 바닥에 깔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매일 여기서 점심 먹어?”
“뭐, 대부분은요.”
“조용해서 좋네. 나도 여기서 먹을까.”
“점심도 삥 뜯기고 싶어요?”
“나도 이제 네 패턴은 파악했어. 호락호락하겐 안 당할 거야.”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진혁을 향해 희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과자가 가득한 진혁의 봉투 속을 보며 표정과 말투를 바꾸고 말했다.
“선생님, 저 과자 먹고 싶어요.”
“……안 당한다니까?”
“배고파요……. 아침도 굶었어요.”
희나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큰 눈동자를 굴리며 쳐다보자 그가 당황했다.
물론 아침은 정말 굶었다. 방금 전에 빵을 두 개나 먹긴 했지만.
진혁은 마른 희나의 팔을 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마음대로 골라 먹으라는 듯 봉투를 통째로 건네주었다.
“바보.”
희나가 제일 비싼 초코 과자를 꺼내면서 혀를 내밀어 보이자 진혁이 혼자 중얼거렸다.
“알아도 진짜니까 당할 수밖에 없잖아. 뭐야, 이거…….”
“선생님은 아직 멀었어요.”
희나는 상자에서 과자를 꺼내 봉투를 뜯으며 물었다.
“근데 단 거 싫어한다면서 웬 과자를 이리 많이 가지고 다녀요?”
“받았어.”
혹시 일부러 사 온 게 아닌가 싶은 희나의 조심스런 물음에 진혁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하긴 여학생들에게 매일 둘러싸여 있으니 간식 같은 건 많이 받을 거다.
바보에 호구 안경 주제에 인기가 많다고 생각하며 희나는 과자를 크게 베어 물었다.
“왜 교실에서 안 먹고 여기서 먹는 거야?”
“다들 모여서 먹는데 혼자 먹기 싫어서요.”
“다른 아이들과 같이 먹으면 되잖아.”
“애들은 다 나 싫어해요.”
그 원인의 8할 이상이 자신의 태도에 있다는 것은 자각하고 있는 희나였지만 진혁이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자 괜히 열이 올랐다.
그때 진혁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내가 본 바로는 너랑 같이 먹고 싶어 하는 애가 있는 거 같던데?”
희나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그가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신지훈?”
“……칠판 봤어요?”
“아니, 아까 쓰레기장 근처에 있는 거 봤어.”
희나는 2교시 쉬는 시간에 지훈에게 불려 나가서 바락바락 화를 냈던 것이 기억나 얼굴이 붉어졌다.
“왜 훔쳐보고 그래요?”
“그냥 보여서 본 거지 훔쳐본 거 아냐. 둘이 사이좋아 보이던데.”
“좋긴 뭐가 좋아요. 진드기처럼 자꾸 귀찮게 해서 미치겠는데. 방금도 문 열리는 거 보고 걔가 따라온 줄 알고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요.”
“꽤 잘생긴 학생이던데 한번 사귀어보지그래?”
“하?”
진혁이 빙긋 웃었다. 남의 일처럼 말하는 게 괜히 밉살스럽게 느껴져 희나는 입을 비죽 내밀었다.
“선생님은 상관하지 마세요.”
희나가 냉정하게 말해도 진혁은 여유롭게 웃으면서 “그래, 그래.” 한다. 정말 패턴을 조금 파악당한 모양이다.
“이사는 언제 할 거야?”
“무슨 이사씩이나. 계약서 쓴 그날부터 이미 거기서 자고 있어요.”
“벌써부터?”
“그래요. 잘 자서 얼굴 뽀송뽀송해진 거 같지 않아요?”
“넌 원래 뽀송해. 피부가 좋잖아.”
태클을 걸 줄 알았는데 태연하게 칭찬을 해 오자 그녀의 심장이 한번 크게 뛰었다. 내려다보니 진혁은 아무 생각 없는 듯 단정한 얼굴로 햄버거를 오물오물 먹고 있었다.
‘저렇게 사심 없는 것처럼 잘해주니 인기가 많은 건가.’
희나는 가만히 그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원래 교생이란 게 인기가 많긴 하지만, 분명히 그냥 주변에도 좋다는 여자가 꽤 있을 거다.
‘물론 이 둔탱이 아저씨는 눈치도 못 챘겠지만.’
희나가 속으로 혀를 차고 있는데 진혁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옮겨야 할 짐은 없고?”
“조금 있어요. 라면 박스 두 개 정도?”
“겨우 그거야?”
“대놓고 짐을 다 빼면 좀 그러니까 필요한 거만 들고 나오려고요.”
“집은 가까워?”
“버스로 두 정거장 정도예요. 차 있으면 좀 옮겨주시죠?”
“그럴까…….”
당연히 없을 거라 생각했기에 희나는 조금 놀랐다.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가난한 대학생 주제에 차도 있어요?”
“음……. 좋은 차는 아니지만 일단은.”
“차종이 뭔데요? 나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해서 차종 잘 알아요.”
그 말을 하자 진혁이 멈칫했다.
“음……. 그냥 택시로 옮기는 게 나을 거 같네. 여기까지 몰고 오는 게 더 힘들 거고.”
당연히 도와줄 것 같았는데 뜻밖의 거절에 희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발끝으로 튀어나온 책을 툭툭 차서 밀어 넣으며 말을 돌렸다.
“다음에 올 때는 맛있는 것 좀 사줘요.”
“가난한 고학생이 가엾지도 않아? 잘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네가 나보다 부자인 거 같단 말이야.”
“선생님은 어른이고 난 학생이잖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희나는 속으로 월급을 타면 한 번 밥 정도는 사줘볼까, 하고 생각했다.
“이따가 또 냉면 먹을까요?”
“미안하지만 오늘은 안 돼. 볼일이 있거든.”
“무슨 볼일이요?”
“일이 좀 있어.”
말하면서 진혁은 다 먹은 햄버거 포장지를 접어 봉지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희나는 스마트폰의 시계를 보았다. 아직 점심시간은 30분 정도 더 남아 있었다.
“가게요?”
“그래. 할 일이 많거든.”
정말 점심만 먹으러 온 모양이었다.
그는 과자들을 꺼내 희나 옆에 쌓아 놓더니 말했다.
“그럼 맛있게 먹고 오후에는 공부 좀 해. 그만 졸고.”
“안 자거든요?”
“내가 볼 때마다 자던데.”
찔린 희나가 발끈해서 받아쳤다.
“그러는 선생님도 참관할 때 뒤에 서서 은근히 자잖아요.”
“……난 다 아는 거니까 자도 돼.”
진혁은 팩트에 반박하지 못하고 궁색한 변명을 하더니 지도실을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희나는 혼자 킥킥 웃었다. 그리고 콧노래를 부르며 쌓여 있는 과자를 뜯어 오물오물 먹었다.
***
「희나야-. 이쪽, 이쪽!」
방과 후 희나가 교문을 나서는 것과 동시에 카톡이 도착했다.
그녀가 두리번거리자 교문 왼쪽의 후미진 골목길에서 지훈이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반사적으로 한숨이 나왔다.
터덜터덜 그쪽으로 향하는 희나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한데도 지훈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이었다.
“오늘도 아르바이트 가지? 같이 가자.”
“하아-. 그래.”
아무리 까여도 변함없는 태도에 다소 체념한 희나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지훈이 교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 저기 우리 반 교생이다.”
교문 앞에 영어 교생인 재연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진혁과 함께 있는 것이 자주 눈에 띄는 여자였다.
“저 사람이 너희 반 교생이야?”
“어. 예쁘지? 성격 되게 좋아. 먹을 것도 잘 사주고. 얼굴도 예쁜 데다 부잣집 딸인 거 같더라.”
희나가 심드렁하게 듣고 있는데 지훈이 바이크 시트를 열더니 뭔가를 내밀었다.
“뭐야?”
“같이 타려면 써야 되니까 샀어-. 예쁘지?”
내민 것은 분홍색에 고글이 달린 소녀 취향 헬멧이었다. 희나가 받아 들 생각을 안 하자 지훈이 직접 머리에 씌워주고는 씨익 웃었다.
“생각대로 잘 어울리네. 내 거랑 똑같은 거야-. 커플 헬멧-.”
커플도 아니고, 애초에 사귈 생각도 없는데 이런 데다 돈을 쓰는 게 희나는 부담스러웠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 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그래? 아, 내가 교생 이쁘다고 해서 그래?”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니가 훨씬 예뻐.”
“……빨리 가기나 해.”
희나가 시선을 피하며 볼을 찌르는 그의 손을 까칠하게 뿌리쳤지만 지훈은 빈정 상한 기색도 없이 그저 해맑았다. 아무리 외모에 반했다 한들 이렇게까지 하는 굵은 신경이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
그런 희나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훈은 시원스러운 동작으로 세워 둔 바이크에 먼저 올라탔다. 그러고는 희나에게 타라고 손짓을 하다가 눈을 조금 크게 뜨더니 말했다.
“어? 저 사람 너네 반 교생 아냐?”
그 말을 들은 희나의 시선이 빠르게 그쪽으로 돌아갔다. 어느 결에 왔는지 진혁이 재연에게 아는 척을 하고 있었다.
둘은 뭔가 이야기를 나누는가 싶더니 곧 함께 걷기 시작했다.
“재연 샘 왜 저기 서 있나 했더니 저 사람 기다리고 있었나 보네. 둘이 사귀나?”
“…….”
“저 사람 인기 쩔던데. 흠……. 나도 안경이나 써볼까-?”
재잘재잘 말하던 지훈은 희나의 불쾌한 얼굴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래?”
지훈의 물음에 머쓱해진 희나가 먼저 바이크에 올라타며 작게 중얼거렸다.
“난 안경 쓴 남자 별로야.”
“그래? 그럼 안 써야지.”
그렇게 말하고 지훈은 희나의 팔을 잡아 자신의 허리에 둘렀다.
“좋았어-. 그럼 간다.”
지훈이 바이크를 출발시켰다. 그와 동시에 희나의 입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야! 왜 이쪽으로 가?”
바이크가 교문 앞쪽의 큰길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러면 으슥한 골목길에서 탄 의미가 하나도 없다.
희나가 학생들 사이를 뚫고 요란하게 달려가는 바이크 위에서 민망해하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교문 근처 횡단보도의 신호에 걸렸다.
하필 그 앞에서 진혁과 재연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희나는 당장이라도 내려서 도망쳐 버리고 싶었지만 그 속을 모르는 지훈은 쾌활하게 그 옆에 서 있는 재연에게 인사를 했다.
“쌤~ 안녕히 가세요-.”
“어머, 지훈아.”
웃으며 진혁과 뭔가 얘기를 나누느라 바이크가 온 줄 눈치도 채지 못한 듯 재연은 지훈의 부름에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곧 뒤에 타고 있는 희나를 보더니 박수를 쳐가며 웃었다.
“아하하하하- 지훈이 너 소원 성취했네?”
“네-. 이제 데이트하러 갈 거예요!”
“웃기지 마! 내가 너랑 데이트를 왜 해!”
지훈의 큰 소리에 얼굴이 빨개진 희나가 그의 널따란 등을 팡팡 쳤다.
“아야, 아파, 아파.”
웃으면서 엄살을 부리던 지훈은 희나의 양팔을 잡아당겨 자기 허리를 안게 하더니 한 손으로 그녀의 두 손목을 잡았다.
졸지에 지훈의 허리를 안은 채로 결박당한 꼴이 된 희나는 발버둥 쳤지만 지훈의 힘이 어찌나 센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야! 이거 안 놔!?”
희나가 언성을 높이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지훈은 화를 내고 있는 희나를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웃으며 재연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선생님도 데이트하는 거예요?”
“어머, 얘는! 데이트는 무슨…….”
희나는 얼굴을 살짝 붉히는 재연을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진혁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서 있었는데 희나는 지금 처한 상황이 민망해서 차마 그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럼 먼저 갈게요! 데이트 재밌게 하세요!”
엄청나게 길게 느껴지는 신호 대기가 지나고 지훈의 바이크가 출발했다.
희나는 그제야 바이크 백미러로 진혁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는 작게 미소를 띤 채로 재연과 함께 걷고 있었다.
‘역까지 같이 가는 걸까……? 아니면…….’
10분도 안 걸리는 역까지 가기 위해 굳이 교문 앞에서 기다렸을 리가 없다. 희나는 볼일이 있다고 하던 진혁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일은 무슨. 거짓말쟁이. 사실대로 말하면 누가 잡아먹나.’
별것도 아닌데 괜히 짜증이 났다. 희나는 잡고 있는 지훈의 허리를 더 세게 잡았다. 그러자 지훈이 소리 내어 웃더니 큰 소리로 물었다.
“아르바이트 빼먹고 놀러 가면 안 돼?”
“……당연히 안 되지. 빨리 가기나 해.”
“네, 네. 알겠습니다.”
희나는 지훈에게 정말 아르바이트하는 장소를 가르쳐줬다. 신이 난 지훈이 속도를 높이자 두 사람이 탄 바이크가 빠르게 달렸다. 곧 희나의 시야에서 진혁과 재연은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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