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시선을 돌리면 (1)
2교시 수업 참관을 마친 진혁은 프린트를 반별로 정리하고 날인을 하기 위해 교사 휴게실로 들어갔다.
벌써 교생 실습이 시작된 지 5일째. 오늘만 지나가면 주말이었다. 하지만 안도감보다는 오히려 피로가 몰려왔다. 오늘 저녁에도 어김없이 본가에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가볍게 하품을 하며 커피를 뽑기 위해 무심코 지갑을 열던 진혁의 눈에 카드 칸에 꽂혀 있는 포스트잇이 들어왔다. 언제나 들어 있던 거지만 갑자기 눈에 밟힌다.
진혁은 포스트잇을 꺼내 펼쳐 보았다.
동글동글한 귀여운 글씨체와 토끼 그림. 그리고 그 아래에는 「방문 감사합니다-」라고 쓰여 있다.
희나가 아르바이트하는 주유소에서 이벤트하던 시기에 생수와 함께 손님들에게 나눠준 것이다.
그 주유소에서 일하는 사람 중 여자는 그가 알기로는 희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쓴 것이라고 생각하고 보관했던 모양이었다.
이런 사소한 걸 보관할 정도로 빠져 있었나, 하고 생각하며 진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투명할 정도로 흰 피부에 빨간 입술, 기묘할 정도로 커다란 눈동자, 확실히 객관적으로 예쁘긴 하다.
하지만 자신이 딱히 여자 외모에 약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인기가 없던 것도 아닌데 여태까지 사귄 여자 친구들은 객관적으로 볼 때 예쁘거나 인기가 많은 외모는 아니었다.
왜 그렇게까지 열심히 보러 다닌 걸까. 첫사랑에 빠진 어린애도 아닌데. 진혁은 자신이 여러 모로 지쳐 있었기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공부를 하고, 여동생을 찾고, 거기에다 매주 지방에 내려가 과수원까지 돕느라 심하게 피로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무리해야 하는 걸까, 편해지고 싶다- 하는 회의가 몰려오는 중이었다.
그럴 때 그녀를 발견한 거다. 나보다 더 어린데 새벽부터 굉장히 열심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서 보기 좋았다.
하지만 결국, 겉만 보고 판단했던 거다.
진혁은 씁쓸한 듯 들고 있는 포스트잇을 만지작거렸다.
알고 보니 원조교제를 하는 데다가 약점을 잡아 협박까지 하는 소악마 여고생이다.
원래부터 그냥 바라만 볼 뿐 어떻게 해보려는 생각은 없었지만 이제는 아예 그런 시선을 가져서는 안 되는 사이다.
진혁은 포스트잇을 버리려다가 그냥 다시 접어 지갑에 넣었다. 그리고 자판기 출구에 아까부터 떨어져 있는 커피를 들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두고 본연의 업무로 복귀하려는데 교사 휴게실에 재연이 들어섰다. 그녀 역시 프린트를 정리하러 들어왔는지 손에 종이 뭉치를 잔뜩 들고 있었다. 재연은 진혁을 발견하자 밝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유 선생님, 같이 앉아도 돼요?”
“물론이죠.”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앉으라는 듯 맞은편 의자를 손짓했다. 재연은 지적인 데다가 일도 잘하고 똑똑한 좋은 여자였다.
“유 선생님 건 체육대회인가요?”
“네. 그건 현장학습인가 보군요.”
“현장학습이랑 졸업 앨범 촬영도 있어요. 5월은 학사 일정이 정말 빵빵하네요-.”
그녀는 두툼한 프린트 뭉치를 톡톡 두들기며 붙임성 있게 말했다. 한동안 두 사람은 간간이 대화를 나누며 맡은 일에 집중했다.
상대적으로 양이 적었던 진혁이 먼저 끝나 그는 계속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그러자 창밖으로 본관과 별관 사이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진혁의 시선이 구석에 있는 쓰레기장 근처에 닿았을 때였다. 희나가 웬 남자애 세 명에게 둘러싸여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지메 같은 건 당하지 않을 만만치 않은 성격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저런 장면을 보니 걱정스러웠다.
“저건, 괴롭히는 건가?”
“어머, 정말요?”
진혁의 중얼거림에 놀란 재연이 창밖을 내려다보더니 곧 웃음을 터뜨렸다.
“아, 지훈이네요.”
“지훈이요?”
“네, 저희 반 애예요.”
그렇게 말하며 재연이 킥킥 웃었다.
“어떤 애인가요?”
“글쎄요. 아마 소위 일진이라는 것 같긴 한데…….”
재연은 태연스럽게 말했지만 일진이라는 말에 진혁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일진요?”
“네. 그런데 걱정하실 거 없어요. 고등학생쯤 되면 대놓고 애들 괴롭히고 그런 짓은 잘 안 하죠. 특히 쟤네 셋은 나쁜 애 아니에요. 아마 쟤가 희나죠?”
재연의 입에서 희나의 이름이 나오자 진혁은 괜히 속으로 움찔했다.
“네, 아마도…….”
“그럼 더 걱정하실 거 없어요. 지훈이가 저 여자애 좋아해서 쫓아다니는 거잖아요.”
그리고 처음 듣는 뜻밖의 얘기에 놀라 입이 약간 벌어졌다. 재연은 몰랐냐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보다가 가볍게 손뼉을 치고는 말했다.
“아, 오늘 아침에 교문 지도 나가셨었죠? 그래서 모르시나 보다.”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지훈이가 오늘 아침에 ‘주희나 내 거’라고 각 반 칠판에 다 써 놨어요. 그래서 아침에 난리도 아니었어요~.”
희나가 그 까칠한 성격에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상상하니 웃음이 나왔다. 진혁이 킥킥 웃자 재연이 신나게 말을 이었다.
“3학년 교실에까지 써놓는 바람에 다들 주희나가 누구냐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선생님들도 재미있어서 그냥 놔두더라고요.”
“제가 돌아왔을 땐 없던데요. 희나가 지웠을까요?”
“아뇨. 하하. 희나가 반마다 뛰어다니면서 지울 줄 알았는데 신경도 안 쓰더라구요. 희나가 너무 무반응이어서 지훈이가 찾아가서 봤냐고 물어봤다가 된통 깨지고 직접 지웠어요.”
보통 여고생답지는 않지만 지극히 희나다운 행동이었다.
창밖의 희나는 남자애 셋을 세워 놓고 조금도 기가 죽은 기색 없이 손까지 흔들면서 뭐라고 훈계를 하고 있었다.
“희나한테 또 혼나고 있나 보네요. 지훈이 성질 장난 아니라고 들었는데 한마디도 못 하네. 하하하.”
“선생님들이 말리지 않으시다니 의외네요. 저희 때라면 엄청나게 혼났을 텐데…….”
“이 학교 선생님들이 좀 개방적이신 거 같아요. 뭐, 재미있잖아요. 유치하고 나중에야 이불 킥 하겠지만 지금이야 저럴 나이죠.”
재연은 말하면서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깥을 보았다.
“아무것도 거리낄 거 없이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게 부럽네요-. 아- 나도 그런 거 받아보고 싶다-.”
창밖을 보던 재연이 턱을 괴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녀에게 가볍게 미소를 지어주고 진혁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지훈을 보았다. 요즘 아이들답게 키도 크고 얼굴이 작았다.
“아주 인기가 많을 것 같은 학생이네요.”
“하하. 그러는 유 선생님이 학교 인기는 꽉 잡고 계시잖아요. 우리 반에서도 선생님 카톡 알려달라고 난리예요-. 네이버에 팬 카페도 생겼어요.”
“그런가요…….”
쑥스럽게 웃으며 진혁은 재연을 쳐다보았다. 정장을 입은 모습이 단아해서 아나운서처럼 보였다. 그러는 재연도 아마 굉장히 인기가 있을 것이다.
진혁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재연이 눈웃음을 짓더니 불쑥 물었다.
“유 선생님, 여자 친구 있다는 말 거짓말이죠?”
“네?”
당황하는 진혁의 반응을 보고 재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역시 그런가 보네요.”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그렇게 보였어요.”
거짓말하면 얼굴에 티가 난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런 모양이다. 그런 생각에 멋쩍어진 진혁이 목덜미를 긁적이는데 재연이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작은어머니는 만나보셨어요?”
“아, 아뇨. 오늘 만나기로 했습니다.”
재연의 질문에 대답한 뒤 진혁은 덧붙여 말했다.
“과외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 오히려 이쪽이 감사하죠. 서울대생이라는 말을 듣고 얼마나 좋아하시던지. 동생 잘 좀 부탁드려요.”
희나를 돕기 위해 진혁은 요 며칠간 학교에서 과외 정보 사이트를 보고 있다가 재연에게 들켜버렸다. 민망했는데 도리어 과외를 소개해주겠다고 말해서 생각지도 못하게 좋은 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제가 도움이 된다면 좋겠네요.”
“유 선생님이라면 분명히 도움이 될 거예요. 수업은 오늘부터 시작하나요?”
“아뇨. 오늘은 일단 간단하게 인사만 하고 진도만 확인할 생각입니다.”
“그래요? 그럼 저도 같이 갈까요? 오랜만에 동생도 보고.”
뜻밖의 제안이었지만 진혁으로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시겠습니까?”
“네. 아, 가는 김에 저녁 식사라도 할까요? 저희 작은어머니가 음식 솜씨가 그만이시거든요.”
“아닙니다. 그렇게 폐를 끼칠 수는…….”
“폐가 될 것 같으면 권하지도 않아요! 분명히 작은어머니도 기뻐하실 거예요. 잠시만요! 연락해놓을게요!”
그렇게 말하고 재연은 바로 문자를 적기 시작했다. 말려도 들을 것 같지 않아 진혁은 그냥 포기하고 시선을 다시 창밖으로 돌렸다.
아래에서는 교실로 들어가려는 희나를 지훈이 뒤에서 덥석 끌어안다가 사정없이 맞고 있었다.
재연이 메시지를 다 보냈는지 진혁이 보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맞추고는 웃음을 지었다.
“둘이 참 귀엽네요. 하하-. 저러다가 사귀게 되지 않을까요?”
“글쎄요, 어떨까요.”
“둘 다 아주 예뻐서 잘 어울리죠.”
진혁은 맞으면서도 신나게 웃고 있는 지훈과 얼굴이 새빨개져서 화를 내고 있는 희나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학교에서는 항상 무표정한 희나가 저렇게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렇군요.”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대답하는 순간 뒤를 돌던 희나와 눈이 마주쳤다. 당황한 진혁은 바로 시선을 피했다.
얼마 전에도 별관 쪽을 보다가 이렇게 창문 너머로 눈이 마주쳤던 것 같다. 그러나 아주 찰나였고, 다시 봤을 때는 희나가 없었기에 그는 잘못 본 것이 아닌가 했다.
진혁이 눈을 돌린 사이 희나는 지훈을 밀치고 총총 걸어서 본관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와 동시에 3교시 시작을 알리는 수업 종이 울렸다. 진혁은 창밖으로부터 시선을 거둬 재연의 일을 돕기 시작했다.
***
점심시간이 되자 희나는 언제나처럼 사회과 지도실로 갔다.
책 더미에 앉아서 운동장을 내려다보며 매점에서 사 온 빵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혼비백산해서 그쪽을 쳐다보니 진혁이 서 있었다.
“깜짝이야. 여긴 왜 왔어요?”
쿵쿵 뛰기 시작한 심장을 들키지 않으려고 희나는 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왠지 너 여기 있는 거 본 거 같아서.”
담담한 그의 말에 어제 점심시간에 본관에 있던 그와 눈이 마주쳤던 것을 상기해낸 희나가 툴툴거렸다.
“그런 거면 그냥 카톡으로 물어보면 되지 뭘 굳이 확인하러 와요?”
“니가 또 여기서 누구 협박하고 있을까 봐.”
희나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사람 봐가면서 협박하거든요? 날이면 날마다 하는 줄 알아요?”
“어, 그래. 영광이네.”
진혁은 장난스럽게 말하며 킥킥 웃었다. 그러고는 먹을 것이 든 봉지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들어가도 되지?”
“……맘대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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