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달갑지 않은 방해자 (2)
오래 걸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역 근처에 있는 8층짜리 빌딩으로 들어갔다.
6층에서 내려 자동문을 통과하자 입구에 붙은 자그마한 창구에서 한 남자가 얼굴을 내밀고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방을 좀 알아보려고 왔는데요.”
그 말을 듣자 남자는 곧 창구에서 밖으로 나왔다. 근육이 덕지덕지 붙은 몸을 자랑하듯이 타이트한 셔츠를 입은 느끼한 남자였다.
그가 작은 눈으로 탐색하듯 두 사람을 살펴보았기에 희나는 조금 긴장했다.
“방은 네 개가 비어 있는데 어떤 방이 좋으세요?”
“글쎄요. 일단 빈방을 모두 볼 수 있을까요?”
“네, 그러시죠.”
남자는 흔쾌히 앞장서서 좁다란 복도로 들어갔다. 그리고 입구 바로 근처에 있는 방문을 열며 말했다.
“여기가 빈방 중에 제일 큰 방입니다.”
희나는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그리 넓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고시원치고는 좀 큰 방이긴 했다.
내부는 새로 리모델링한 듯 깔끔하고 채광이 그럭저럭 잘되어 방이 밝으며 구석에는 유리로 된 부스 안에 샤워기도 달려 있었다.
“여기는 60만 원입니다. 옆방도 같은 사이즈인데 둘이 살고 있어요.”
60만 원이라는 말에 희나는 입을 딱 벌렸다. 방이 괜찮고 역 바로 앞이라 값이 나갈 것은 예상했지만 60만 원은 너무하다.
남자가 그녀의 표정을 보더니 물었다.
“그런데 두 분이 같이 들어오실 건가요? 기본적으로 남녀 혼숙은 안 되는데요.”
“아뇨, 아닙니다.”
혼숙이란 말에 진혁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여긴 제 여동생입니다. 이쪽 혼자 입주할 겁니다.”
상대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설명하는 듯 대답하는 데다가 말투도 어색하고 딱딱한 것을 보고 희나는 혀를 찼다. 거짓말 별로 안 해 본 모양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시군요. 그럼 일단 다른 방도 보시죠.”
두 번째 방은 샤워기는 없었지만 적당한 사이즈에 채광이 좋아 밝았다. 세 번째 방도 괜찮아 보였으나 두 번째 방과 같은 가격이었으므로 아무래도 조금 떨어져 보였다.
마지막 방은 말 그대로 고시원이라는 말에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좁다란 방이었다. 2평 남짓한 공간에는 창문도 없고 아주 작은 침대와 책상만 있었다.
“이 방은 28만 원입니다. 여기가 우리 고시원에서는 제일 싼 방이에요.”
그 말을 듣고 희나는 바로 마음을 정했다. 계약하겠다고 말하려는데 진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죄송하지만 잠깐 상의할 시간 좀 주시겠습니까?”
“네, 물론이죠. 문들은 다 열려 있으니 보시고 결정하시면 말해주세요.”
남자는 시원시원하게 말한 뒤 자리를 피해주었다. 진혁은 입구에 선 채로 마지막 방을 들여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좁네.”
“뭐 고시원이 다 그렇죠.”
“어느 방이 제일 마음에 들어?”
“전 여기로 할 거예요.”
“괜찮을까?”
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안을 바라보자 희나는 손을 저었다.
“이 정도면 좋죠. 잠만 잘 건데요, 뭐.”
“아무리 그래도 창문도 없는데…….”
“그래도 집이랑 다르게 곰팡이도 없고, 침대도 있네요.”
“……대체 어떤 생활을 하고 있었던 거야.”
중얼거리면서 진혁이 안으로 들어섰다. 천장이 낮아서 키가 큰 그의 머리가 거의 천장에 닿을 것 같았다.
“둘이 함께 서기도 힘들 것 같은데.”
“그 정도로 좁지는 않아요.”
희나는 반박하며 안으로 들어섰지만 곧 진혁과 몸이 부딪쳐버렸다.
“좁은 거 같은데?”
커다란 몸이 바로 앞에 있었다. 168cm인 희나가 얼굴을 보려면 한참 올려다봐야 했다.
몸이 가까워지자 셔츠 위로 드러난 흰 목덜미에서 청결감 있는 바디 샴푸와 섬유 유연제 향기가 풍겨왔다. 순간적으로 얼굴이 화끈거려 희나는 화다닥 뒤로 물러서 문 밖으로 나왔다.
교복은 세제로만 대충 빨았고 어제 휴게소에서 자는 바람에 오늘 아침엔 머리도 감지 않았다. 아직 봄이니 하루 정도로 냄새가 나진 않겠지만 좋은 향기가 풍기진 않을 거다.
희나가 이상한 것들을 의식하고 있는 사이 태연해 보이는 표정으로 진혁이 방에서 따라 나왔다. 그는 뒤쪽을 슬쩍 돌아보면서 말했다.
“역시 여기보다는 아까 그 방으로 하는 게 좋겠어.”
“여기면 됐어요. 10만 원이나 차이 나잖아요. 잠자는 데다 쓸데없이 돈 쓰기 싫어요.”
“내가 내줄게.”
“네?”
뜻밖의 말에 희나가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소리예요? 돈 없다면서요?”
“……아르바이트를 구했어.”
그는 주변을 신경 쓰듯 나직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아는 분에게 소개를 받아서 이번 주부터 과외해주기로 했어. 방세 정도는 어떻게든 될 거야.”
희나가 보기에는 멍청해 보여도 교생이면 어쨌든 괜찮은 대학에 다닐 거다. 과외를 한다면 40만 원 정도의 방세는 벌 수 있겠지만 자신도 빠듯하다면서 그렇게까지 희나를 위해줄 이유는 없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희나에게 그는 짧게 말했다.
“그 대신 그런 일 하는 건 그만둬.”
“무슨 일요?”
“그거, 알잖아.”
무슨 소리를 하나 생각하다가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는 모습을 보고 희나는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는 희나가 아직 원조교제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오해라고 밝히려다가 희나는 그만두었다. 잘 보이려는 듯한 말을 일부러 하고 싶지도 않고, 엇나가고 싶었다. 대신 희나는 쌀쌀맞게 말했다.
“또 참견하려는 거예요?”
“네가 그만둔다면 참견할 정도의 가치는 있지.”
“대가도 없이 그냥 도와준다는 말을 믿으라고요?”
“믿어서 손해 볼 일은 없잖아.”
“생판 모르는 사이에…….”
그때 진혁이 ‘쉿-’ 하고 말하는 듯한 입 모양을 했다. 그제야 인기척을 느낀 희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예의 느끼해 보이는 총무가 뒤에 서 있었다.
“어떻게 방은 좀 마음에 드십니까?”
“네. 두 번째 본 방이 괜찮은 것 같군요.”
“아, 그렇죠? 그 방이 제일 인기도 많아요. 다른 방에서 옮기고 싶다고 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그럼 빨리 계약하는 게 낫겠군요. 바로 하죠.”
진혁은 희나에게 눈짓을 하고는 멋대로 계약을 진행시켰다. 총무 남자가 앞에 있어서 희나는 뭐라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계약이 끝나버렸다.
고시원을 나온 두 사람은 역에 인접해 있는 시장 안의 냉면집으로 들어갔다.
토라진 듯한 얼굴로 턱을 괴고 딴 데를 보고 있는 희나에게 진혁이 타이르듯 말했다.
“걱정하지 말고 받아도 돼.”
“……누가 신경 써달랬어요?”
“먼저 계약하는 거 도와달라고 한 건 너잖아.”
“부탁한 건 거기까지죠. 동정 받는 건 싫단 말이에요.”
“어차피 매번 빈대 붙고 있잖아. 이제 와서 양심 있는 척하지 마.”
냉면 계산서를 툭툭 치며 진혁이 말하자 희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대신 그 일은 확실하게 그만둬. 그리고 성적 좀 올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성적을 언급하자 조금 부끄러워졌다. 희나는 똑똑해 보이는 진혁의 안경 쓴 얼굴을 쳐다보았다.
분명히 고등학교 때 공부 잘했을 테니 나 같은 건 멍청이로 보일 거다, 하는 생각이 들어 아주 조금 주눅이 들었다. 그런 창피함을 감추려고 그녀는 툴툴거렸다.
“남이야 성적이 나쁘든. 그보다 맘대로 계약해버리면 어떻게 해요? 한 달만 있으면 어차피 교생도 아니잖아요. 나 몰라라 하면 난 그 방 유지하기 힘들단 말이에요.”
“네가 졸업할 때까진 도와줄게.”
“매달 40만 원씩 2년이면 얼마나 큰돈인지 알 텐데요.”
“알고서 하는 말이야.”
흔들림 없이 말하며 진혁은 아주머니가 때마침 가져온 냉면 그릇을 받아 희나의 앞에 놓아주었다.
“한입 가지고 두말은 안 할 테니 걱정 말고 냉면이나 먹어. 아르바이트 갈 거잖아.”
“……정말 다른 속셈 있는 거 아니에요?”
“무슨 속셈?”
“몸을 요구한다든가…….”
희나가 조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진혁이 크게 웃었다. 그 반응에 괜히 자존심이 상해 희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왜 웃어요-! 나보고 예쁘다고 했잖아요!”
생각한 거보다 말이 크게 나와 주변의 이목이 쏠렸다.
희나는 당황해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고 진혁은 좀 더 웃더니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 몸 요구 안 할게.”
“장난치는 거 아니란 말이에요.”
“나도 아니야. 내가 그럴 거 같아?”
희나는 고개를 들어 진혁을 보았다. 안경 너머의 눈이 웃음을 멈춘 채 진지하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건 그녀도 알 것 같았다.
“바보 같아. 한 달 보고 말 사이인데. 원래 그렇게 호구 같아요?”
“글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심한 말을 해도 진혁은 신경 쓰지도 않는 태도였다. 그는 잠시 텀을 두고 생각하는 듯하더니 조용히 말했다.
“……내가 너한테 잘해주는 만큼…….”
“…….”
“다른 사람도 내 동생에게 그렇게 해줄지도 모르지.”
희나는 처음 봤을 때 그가 가출한 여동생을 찾고 있었다는 것을 떠올려 냈다.
그녀는 그 이상 묻지 않고 냉면을 먹기 시작했다. 진혁 역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식사를 시작했다.
긴 손가락으로 능숙하게 냉면을 비빈 뒤 한 젓가락 입에 가져가려던 그는 식사를 하기 불편한지 입고 있던 상의를 벗었다. 깨끗하게 다려진 흰 셔츠가 드러났다.
희나는 무심결에 그것을 쳐다보았다. 상의를 입고 있을 때는 그냥 마른 듯이 보였지만 의외로 탄탄해 보이는 팔에는 핏줄이 돋아 있었고 어깨도 넓었다.
그는 깔끔하게 먹기 힘든 음식인데 소리도 없이 먹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느끼고 있는 거지만 참 정갈하게 음식을 먹는다.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바라보던 희나는 시선을 느낀 진혁과 눈이 마주쳤다.
“왜? 안 먹어?”
“별로 아무것도.”
희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은 뒤 다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괜히 의식이 되어서 희나는 진혁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로 식사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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