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단, 그 너머에는-8화 (8/140)

8화. 달갑지 않은 방해자 (1)

“내가 거짓말을 왜 해?”

긴 속눈썹이 드리워진 동그란 눈을 짜증 난다는 듯 찌푸리며 쏘아붙였다.

“다 물어봤어. 너 없으면서 매번 남친 있다고 한다며?”

“있으니까 있다고 하지.”

“누군데?”

“말하면 네가 알아?”

“알지도 모르잖아. 말해줘.”

“니가 모르는 사람이야.”

대답하며 희나는 다시 귀에 커널형 이어폰을 꽂고 턱을 괸 상태로 고개를 숙였다. 의미 없는 문답이 이어지는 것을 무시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귀에서 이어폰이 빠져나갔다. 지훈이 희나의 이어폰을 든 채로 흰 이를 내보이며 웃고 있었다.

“그러지 말고 놀자, 나랑. 학교 끝나면 뭐 해?”

“시간 없어. 알바 가야 돼.”

“알바 어디서 하는데?”

“알아서 뭐하게.”

“놀러 가려고 그러지. 이따 데리러 올 테니까 카톡 보내면 나와.”

끈질김에 희나의 짜증 게이지가 치솟았다.

‘대체 내 번호는 어떻게 안 거야?’

지훈에게 물을 것도 없이 그녀 스스로 답을 찾아냈다.

희나는 시선을 휙 돌려 소영의 자리를 보았다. 소영은 이쪽을 외면하고 있었고, 옆에 앉은 사과머리가 째려보는 중이었다.

다시 눈을 돌려 지훈을 바라보며 희나는 딱딱하게 말했다.

“난 놀러 다닐 시간 없어.”

“알아. 너네 집 힘들어서 매일 아르바이트한다며?”

천연덕스럽게 하는 말에 희나는 순간 얼굴이 화끈했다. 이래서 말 섞기가 싫다.

화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간신히 삼켰다. 차림새로 보나 사과머리의 반응을 보나 일진인 것 같다. 욕하면 피곤해진다.

“알면 나 좀 그냥 내버려 둬.”

“알바 어디서 하는지 말해줘-.”

“싫어.”

“그냥 해줘. 말 안 해주면 모를 거 같아?”

진드기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여유롭게 웃었다. 어차피 소영이 알고 있으니 알려질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희나는 인상을 쓰면서 젓가락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나한테 대체 왜 그러는데?”

“니가 학교에서 제일 이쁘잖아.”

1차원적인 답변이다.

희나는 지훈을 힐끔 쳐다보았다. 살짝 캐러멜 빛이 도는 깨끗한 피부에 높은 코와 작은 얼굴. 일반적으로 잘생겼다는 말을 들을 법한 외모였지만 희나의 취향은 아니었다.

‘저런 것보단 단정한 외모가 훨씬 낫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 희나는 순간적으로 진혁의 단정한 얼굴이 떠올라서 깜짝 놀랐다. 그것을 떨쳐 내려는 듯 희나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흔들었다.

“예쁘다고 하니까 좋은가 보네. 그런 말 많이 들어서 상관 안 할 줄 알았는데.”

붉어진 얼굴을 보고 오해했는지 지훈이 다시 또 생글생글 웃는다. 하지만 희나의 얼굴은 금세 원래의 냉랭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웃기지 마. 그리고 난 너한테 관심 없어. 너 좋다는 여자애나 찾아봐.”

딱 잘라 말한 뒤 희나는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식판을 들어 통째로 버리고 교실을 나왔다.

교실에서 나온 그녀는 매점에서 빵을 사서 별관 4층에 있는 사회과 지도실로 들어갔다. 언제나처럼 아무도 없었다. 천천히 걸어가 창가에 잔뜩 쌓여 있는 책 더미에 걸터앉았다. 희나는 항상 여기서 혼자 빵 같은 걸로 점심을 때우곤 했다.

‘오늘도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괜히 귀찮은 일에 얽힐 필요도 없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언제나처럼 창밖을 내다보면서 사 온 빵을 먹기 시작했다.

운동장에서 남학생들이 축구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태양 아래서 신나게 뛰어 노는 모습들이 생동감이 넘쳐 보기 좋았다. 물론 멀리서 지켜볼 때 한정이지만.

오늘 축구하는 애들은 여물지 않은 체격이 1학년인 것 같았다. 자연스레 희나는 남동생을 떠올렸다.

희나의 남동생 희원은 두 살 차이지만 빠른 생일이어서 같은 학교 1학년이었다. 하지만 오늘도 학교에 안 왔을 거다. 입학하고 학교에 오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남동생에 대해 애틋한 감정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지만 가끔 그런 생각은 들곤 했다. 희원이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니고, 점심시간마다 축구를 한다면 그걸 지켜보는 건 꽤나 보기 좋을 거라는 그런 생각.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희나가 다른 보통 여자애들처럼 교실에서 점심을 먹고 수다를 떨며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씁쓸한 기분이 되기 전에 운동장에서 시선을 잡아떼었다.

초점 없이 본관 건물을 보던 희나의 시선이 본관 복도에 꽂혔다.

“어?”

창문 너머로 복도를 걷고 있는 진혁이 보였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인 채 걷고 있었다.

아직 온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벌써부터 인기 폭발이다. 주위의 여학생들은 신나게 웃고 떠들고 있었다. 어찌나 크게 이야기하는지 내용을 분간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 소리가 별관까지 들릴 지경이었다.

그중 한 여학생이 장난치듯 팔짱을 꼈다. 그러자 안경 너머의 단정한 얼굴이 난감해하는 표정으로 변했다.

몸을 빼내려고 그가 창 쪽으로 몸을 돌렸다. 순간 눈이 마주친 듯한 기분이 들어 희나는 반사적으로 커튼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놀래라. 봤을까?’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커튼 틈새로 슬쩍 내다보니 진혁은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여학생들을 피해 복도 끝에 있는 교사 휴게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교사 휴게실의 창문이 커서 내부가 훤히 보였다.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은 뒤 테이블에 앉는 진혁에게 누군가가 접근했다. 자세히 보니 심재연인가 하는 여자였다. 영어 교생으로 희나의 반에 수업 참관을 왔을 때 본 적이 있었다. 둘은 마주 앉은 채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며 음료수를 먹기 시작했다.

희나는 건조한 시선으로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단출한 식사를 끝마쳤다.

***

수업이 끝나고 교문을 나서던 희나의 눈에 검정색의 독특한 모양을 한 바이크가 눈에 들어왔다. ‘예쁜 바이크네’ 하고 멍하니 생각하다가 그 위에 걸터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런 보람도 없이 그가 큰 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주희나!”

지훈이 밝은 목소리로 소리치며 손을 흔들자 주변에 가득한 하교하는 학생들이 이쪽을 힐끔힐끔 보다가 곧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일진인 건 확실한 모양이다.

“태워다 줄게.”

“됐어. 필요 없어. 걸어가면 돼.”

“타라니까?”

“관심 없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난 아직 있어. 그러지 말고 그냥 타.”

진드기는 거절에도 물러설 기색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

희나는 짙은 눈썹 아래의 서글서글해 보이는 눈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뒤에 올라탔다.

시간도 아깝고 이런 실랑이 벌이는 것도 귀찮다. 타주마, 까짓 거.

“어디로 가면 돼?”

“역 앞으로 가.”

“OK~.”

그렇게 말하고 지훈은 희나의 팔을 당겨 자신의 허리에 감았다. 그녀는 잡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어 어색하게 옷자락을 잡았다. 지훈이 쿡쿡 웃는 소리를 내며 바이크를 출발시켰다.

학교에서 역까지는 가까운 편이었기 때문에 2분도 지나지 않아 역에 도착했다. 물론 아르바이트하는 장소랑은 거리가 멀었지만 근처인 척 희나는 바이크에서 내렸다.

“몇 시에 끝나? 데리러 올까?”

“필요 없어.”

그렇게 말하고 희나는 생글생글 웃고 있는 지훈에게 빠른 속도로 덧붙여 말했다.

“너 앞으로도 데려다주고 싶으면 교문 앞 말고 다른 데다 대. 애들이 보는 거 싫어.”

“뭐?”

지훈이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싫으면 말든가. 내일부턴 교문 앞에 대면 뭐라고 난리 부려도 안 타.”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셔 있었지만 희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지금은 지나가는 사람도 많으니 무서울 것도 없었다. 노는 애 같긴 하지만 차였다는 이유로 교실이나 교문 앞에서 때릴 정도로 막 나가는 애는 아닐 것이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희나를 올려다보던 지훈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와, 미친……. 크큭.”

살짝 흥분한 듯 붉어진 얼굴이 인내의 임계점을 넘은 모양이었다. 모양 좋은 이마가 찌푸려져 있었다.

“너 보자보자 하니까 진짜 말하는 거 대박이다?”

지훈은 일어나 바이크에서 내리더니 성큼 희나 앞에 섰다. 배 째라는 심보로 막 나갔지만 여자치고도 마른 체격인 희나가 한 뼘이나 키가 큰 남학생이랑 싸워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왜, 때리게?”

하지만 희나는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 어차피 애들끼리 싸움은 기세가 반이다.

‘그래, 쳐라. 증인도 많은데 맞고 깽값이나 벌자.’

무서웠지만 도리어 앞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지훈이 내려다보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너 진짜 싸가지 없다.”

그렇게 말하며 지훈이 손을 쭉 뻗어왔다.

‘맞는다’ 하는 생각에 희나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러나 예상했던 때리는 느낌 대신 뺨을 가볍게 꼬집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뜨니 지훈이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볼을 당기고 있었다.

“근데 진짜 더럽게 이쁘긴 이쁘네.”

“……뭐야-! 이거 놔!”

희나는 볼을 잡은 손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났다. 뜻밖의 접촉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좋아. 내일부터 그렇게 하자. 대신 너도 괜히 튕기지 말고 타는 거다?”

“…….”

“그럼 간다. 아르바이트 잘해-. 아, 그리고 내 카톡 씹지 마~.”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흔들더니 지훈이 바이크를 출발시켰다.

‘뭐야, 대체. 원래 좀 이상한 애인가?’

어떻게 된 녀석인지 정신 상태가 궁금해졌지만 물어보고 싶어도 물어볼 데도 없다.

잠시 멍하니 서서 멀어져 가는 바이크를 쳐다보던 희나는 곧 정신을 차렸다. 지금 중요한 건 지훈이 아니었다.

지금쯤 진혁이 학교 앞 베리베리 파르페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뜻밖의 방해를 받아 역 앞까지 와 버렸다.

희나는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보냈다.

「역 쪽으로 오세요.」

어차피 알아본 곳이 역 근처였기 때문에 그렇게 보냈다. 읽음 표시는 금방 떴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희나는 더 재촉하지 않고 그냥 역 앞의 골목길 쪽에 선 채로 진혁을 기다렸다.

그가 도착한 것은 20분쯤 뒤였다.

“왜 이렇게 늦게 와요? 거기서 5분도 안 걸리는데.”

“……불평하지 마. 이럴 거면 처음부터 역으로 오라고 했으면 좋았잖아.”

그의 하얀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티 하나 없는 뺨에 아이스크림이 묻은 것이 눈에 띄었다.

“파르페 먹고 온 거예요?”

“…….”

그는 어물거리며 대답하지 않았다.

“입가에 아이스크림 묻었는데요.”

“난 단 거 싫어해.”

“누가 물어봤어요?”

“네가 안 오는데 그냥 나올 수도 없고……. 아깝게 그냥 버릴 순 없잖아.”

희나가 오지 않아서 허겁지겁 주문해 먹고 달려오느라 늦은 모양이었다. 입가를 손가락으로 살짝 훑으며 진혁이 중얼거렸다.

“하필 오늘따라 손님도 있었어……. 맨날 없더니.”

얼굴이 빨개진 이유는 창피해서였던가 보다. 하긴, 슈트 입은 키 큰 남자가 혼자 앉아서 파르페를 먹고 있는 걸 상상하니 그녀도 웃음이 나왔다.

“뭐, 손님이 있었다니 거기서 안 만나길 다행이네요.”

“그렇긴 하지만. 학교 학생들이어서 나 보고 막 웃었어.”

쑥스러워하는 표정이 왠지 우스웠다. 그의 입가에는 지워지다 만 아이스크림이 아직도 조금 묻어 있었다.

“아직 안 떨어졌어요.”

희나가 손가락을 뻗어 입가를 닦아 주며 킥킥 웃었다. 그러자 그가 움찔하며 뒤로 살짝 물러서더니 웃고 있는 희나를 쳐다보다 고개를 획 돌렸다.

그 반응에 머쓱해진 희나는 다시 냉랭한 표정으로 돌아가 쌀쌀맞게 말했다.

“가요.”

휙 돌아서서 앞장을 섰다. 갑자기 돌변한 태도에 진혁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