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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그 너머에는-7화 (7/140)

7화. 악의와 선의 (2)

“뭐하는 거예요? 만지지 말아요!”

“미안. 네가 녹음기 같은 거 가지고 있을까 봐.”

그냥 어리바리한 숙맥인 줄 알았는데 이젠 만만치 않게 나온다.

그가 노려보고 있는 희나에게서 한 걸음 더 물러난 뒤 팔짱을 낀 채로 말했다.

“녹음기는 없나 보군. 집에 들어가기 싫다고?”

“그래요.”

“그래? 그럼 같이 있을까? 뭐 그런 말을 기대한 거라면 무린데.”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희나는 내뱉듯이 말을 이어갔다.

“우리 집 시궁창 같아요. 지긋지긋해서 집 나가고 싶어요. 밖에서 살 집이 필요해요.”

“가출하는 걸 도울 생각은 없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단호한 답변이 날아왔다. 예상대로였기에 희나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녀는 짜증 섞인 어조로 말했다.

“집이 집 같아야 가출이지. 내가 지금 어떻게 사는지 알아요?”

희나는 그에게서 몸을 틀어 먼지가 잔뜩 쌓인 뒤쪽 책장에 기대며 말을 이었다.

“어두컴컴한 지하 월세방에서 셋이서 산단 말이에요. 아빠라는 작자는 며칠씩 사라졌다가 술 마시고 들어와서 때리는 게 취미고 남동생은 눈 마주치면 욕이나 하지. 뼈 빠지게 아르바이트해도 태반은 털려요, 그 망할 인간 술값으로.”

이 부분은 여과 없는 사실이어서 얘기를 하다 보니 어금니가 꽉 깨물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아직 어린 네가 집을 나오는 건 위험해. 네가 안 들어오면 아버지께서 찾으실 거 아냐?”

희나의 진심이 전해졌는지 진혁이 다소 누그러진 태도로 말했다. 희나는 코웃음을 쳤다.

“찾기는 무슨. 남동생은 얼굴 본 지 두 달이 넘었는데 어디 갔냐고 물어본 적도 없어요. 그리고 어차피 지금도 일주일에 2, 3일은 밖에서 자는걸.”

“밖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데에 있는 휴게실에서 자요.”

평일에도 달리 갈 곳이 있으면 최대한 집에 가지 않았다. 그리고 금요일은 정해 놓고 밤마다 주유소에 미리 가서 휴게실에 있는 소파에서 새우잠을 잔 다음 새벽 아르바이트에 나갔다.

돈을 더 많이 주는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지만 미성년자라서 그러지도 못한다.

“주유소 아르바이트 하면서 그 휴게실에서 잔다구요. 겨울엔 춥고 여름엔 미친 듯이 더운 데다가 잘 곳이 따로 마련돼 있는 것도 아니라 피곤하고 죽을 거 같아요. 그래도 거기가 집보다 훨씬 낫다고 하면 좀 알아먹겠어요?”

거기까지 말하자 진혁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보아하니 그녀의 이야기를 믿는 눈치였다.

이용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동정하는 시선은 받고 싶지 않았기에 희나는 그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네가 있을 곳을 마련해줄 능력이 없어. 청소년 보호 시설에 들어가고 싶은 건 아니잖아.”

진혁의 말투는 이제 상당히 부드러워져 있었다.

당연히 앞으로 2년만 참으면 성인인데 이제 와서 고아원 같은 데 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별거 아니에요. 고시원에 들어가고 싶은데 미성년자는 안 되잖아요. 돈은 내가 낼 테니 계약하는 데 보호자로 같이 가 주세요.”

이게 희나의 진짜 목적이었다.

그녀는 호의를 품고 있는 사람일수록 신세 지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 사정 설명하고 동정 받으며 부탁하는 것도 질색이었다.

그는 희나와는 상관도 없는 사람이고, 한 달만 있으면 실습이 끝날 테니 다시 볼일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신원은 확실하니 믿을 만하고 희나에게 다른 맘을 품을 만한 사람이 아니다. 여러 모로 최적의 인물이었기에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네 가족도 아닌데 보호자가 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선생님 여동생 있잖아요.”

물론 그런 문제에 대해서도 다 생각해두었다. 희나는 막힘없이 술술 말을 이어 갔다.

“나랑 나이 비슷하죠? 등본 떼서 가져가서 내가 여동생이라고 하면 돼요.”

“……벌써 꽤 계획을 세워놨나 보군.”

그렇게 말한 뒤 진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희나는 초조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미안하지만 그런 건 곤란해.”

난처한 목소리를 듣고 희나의 표정이 변했다.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자애 혼자 고시원 같은 데서 사는 건 위험하잖아. 좀 더 좋은 방법이…….”

“좋은 방법 같은 건 없어요!”

희나는 살짝 언성을 높여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자신을 한참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흰 얼굴을 진지하게 올려다보았다.

어떻게든 그를 잘 이용해서 집에서 나와야 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내키지 않지만 최후의 방법을 쓰기로 했다.

“지금 집에서는 버틸 수가 없어요. 제대로 잠도 못 자고 내 공간은 책상 하나 없다고요. 이대로는 차라리 가출해버리는 게 나아요!”

“…….”

“어차피 말로만 도와준다고 하는 거죠? 도와줄 생각도 없으면서…….”

그렇게 말하며 희나는 그를 외면하듯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무 말 없이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알았어. 그렇게 하자.”

결국 진혁의 입에서 기다리는 말이 나왔다.

“정말이죠?”

“그래. 그런데 정말 같이 방 구하러 가주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래요. 방세도 내가 낼 거예요.”

방을 구할 수 있다면 그깟 방세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기쁜 표정을 짓는 희나를 보며 진혁의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앞으로도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말해. 최대한 도울게.”

이제 그녀가 방금 전까지 협박을 하던 원조교제 여고생이라는 걸 잊었는지 그는 정말로 돕고 싶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희나는 동정을 받고 싶지도, 연민으로 끈적끈적하게 엮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럴 바엔 차라리 협박하는 발라당 까진 애로 생각하는 게 더 나았다.

“그래요? 그러면…….”

희나는 태도를 싹 바꿔서 어깨에 얹힌 손을 치워 내고 가방을 집어 들었다.

“먹을 거 사줘요, 배고프니까.”

“어?”

“뭐해요? 빨리 가요.”

희나는 재촉하며 먼저 지도실을 나갔다. 진혁은 돌변한 그녀의 모습에 잠시 멍하니 서 있다 그녀의 뒤를 따랐다.

***

「등본 가져왔어요?」

조례를 마친 진혁이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희나는 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휴대폰을 교실에 가지고 오지 않았는지 답장이 온 것은 점심시간이었다.

「그래. 혹시 알아본 곳은 있어?」

「내가 다 알아봤어요. 가서 계약만 하면 돼요.」

「알았어. 그러면 방과 후에 같이 가.」

진혁과 사회과 지도실에서 대화한 지 3일이 지났다.

희나는 바쁜 틈틈이 여기저기 고시원을 가 보아서 대략 마음을 정했고, 남은 건 계약뿐이었다. 오늘 계약하려고 아르바이트 시간도 미뤘다.

희나의 얼굴에 드물게 미소가 떠올랐다. 지긋지긋한 집에서 탈출할 수 있다니, 꿈에 그리던 일이다. 거기다 다른 덤도 있었다.

‘이렇게 되면 오늘 저녁도 공짜로 먹겠군.’

최근 희나는 진혁을 은근슬쩍 불러내서 밥을 얻어먹고 있었다.

학교를 마칠 때쯤 카톡을 보내 놓으면 곤란해하면서도 항상 나와서 먹을 것을 사줬다. 그러면 희나는 만나서 밥을 얻어먹고 고맙다는 말도 없이 아르바이트를 간다. 슬슬 피하려고 할 법도 한데 진혁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반쯤 졸면서 어영부영 수업 시간을 보내다 눈을 뜨니 점심시간이 되어 있었다. 이미 아이들은 배식을 받은 채 삼삼오오 모여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희나는 함께 점심 먹을 친구가 없다. 작년까지 함께 먹던 소영은 사과머리 패들과 함께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밥을 먹고 있었다.

혼자 밥을 먹기도 뭐해서 항상 교실 밖에서 먹었지만, 오늘은 기분도 좋고 귀찮아서 그냥 먹기로 했다.

희나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웹툰이라도 볼까 하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때 맞추기라도 한 듯 카톡 알림 창이 떴다.

「뭐 해?」

진혁인 줄 알았는데, 모르는 사람에게서 온 카톡이었다.

정말 어지간하지 않고서야 전화번호를 남들에게 가르쳐 주지 않는 희나이기에 카톡도 거의 오지 않는다. 잘못 온 카톡이겠거니 하고 읽씹한 후 웹툰 창으로 돌아가는데 또다시 카톡 알림이 떴다.

「나 신지훈이야-.」

‘신지훈인데 뭐 어쩌라고. 누군데.’

전혀 모르는 이름이다.

역시 잘못 왔겠거니 생각하고 희나는 알림 창을 꺼 버렸다. 그러자 세 번째 알림창이 떴다.

「지금 교실에 있지? 밥 먹고 있어?」

카톡을 읽은 희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내용을 보니 잘못 온 카톡이 아닌 듯했다. 하지만 제게 카톡을 보낼 만한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던 희나는 그냥 차단을 누른 뒤 다시 웹툰을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5분쯤 지났을까. 앞에 누군가 와서 서는 기척이 있었다.

“야, 너무하네.”

이어폰 너머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희나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앞에 낯선 소년이 서 있었다.

진혁 정도는 아니어도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아주 뚜렷했다. 교복을 보니 같은 학교인 거 같은데 머리 모양이 가관이다. 귀걸이에, 목덜미에는 문신까지 보였다. 무슨 텔레비전에 나오는 아이돌 같은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그가 말을 걸자 주변에서 이쪽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이 신경 쓰였다. 희나는 이목을 끄는 건 질색이었다.

“뭔데.”

희나는 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주희나지? 나 몰라?”

“내가 널 어떻게 알아.”

“나 7반 신지훈이야.”

“근데 어쩌라고.”

보통 이쯤 쌀쌀맞게 굴면 가는데, 그는 도리어 앞의 빈 의자에 앉더니 웃으며 말을 건다.

“어쩌긴 뭘 어째, 그냥 같이 놀자고.”

희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눈에 띄는 외모 탓에 1학년 때나 학기 초에는 이리저리 얽히려 드는 애들이 많았다. 하지만 학교 친구 같은 거에 신경 쓸 시간도 없고 친해지고 나서 자신의 가정 사정을 알면 하나같이 동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싫었다.

그리고 더 싫은 것은 감추고 싶은 비밀들이 어느 결에 모두가 아는 사실이 되고 만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깨닫고 난 뒤 접근하는 애들에게 모두 냉랭한 반응을 보여서 이젠 더 이상 말 거는 애들도 없었는데, 이 녀석은 다른 반이라서 그런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희나는 웃는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어들이며 젓가락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놀긴 뭘 놀아. 밥 먹는 거 안 보여?”

“다 먹고 놀면 되지.”

“싫어. 피곤해. 잘 거야.”

“그럼 학교 끝나고 나서 놀자.”

희나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올려보자 눈이 마주쳤다. 지훈은 전혀 위축된 기색도 없이 눈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로 싸가지 없게 말하는데 접근하는 건 단순히 친해지자는 의미일 리가 없었다. 뭔가 원하는 게 있거나 그게 아니면 한 가지밖에 없다.

“나 남친 있어.”

희나는 일부러 딱 잘라 말했다. 그러나 웃는 얼굴은 표정의 변화가 전혀 없었다.

“거짓말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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