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악의와 선의 (1)
희나는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앞에 놓인 냉수를 마셨다.
물 잔을 비우자 멀찍이 서 있던 점원이 못마땅한 얼굴로 다가온다. 아무것도 시키지 않고 물만 마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녁 여섯 시인데도 가게 안은 한산했다. 봄이라 빙수가 잘 안 팔릴 시즌이긴 하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대체 왜 안 망하나 의문이 들 정도로 손님이 없다.
‘뭐, 그거 때문에 여기로 장소를 정한 거지만. 그나저나 왜 이렇게 안 와.’
마지막으로 진혁에게 메시지를 보낸 지 15분이 지났다. 어디냐고 묻기에 학교 앞 ‘베리베리 파르페’에 있다고 말했고 그 후로 답장은 없었다.
점원이 다시 물 잔을 채워 주는 동안 조금 뻘쭘해진 희나는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주문 아직 결정 못 하셨나요?”
“일행이 오면 주문할게요.”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 계속 꼼짝하지 않던 유리문이 열렸다. 트렌치코트를 입은 키가 큰 남자가 숨을 헐떡이며 안으로 들어서다가 희나를 보고 곧 안색을 바꾼다.
희나는 ‘거 봐, 왔잖아’ 하는 표정으로 점원을 올려다보았고, 그녀는 곧 카운터 쪽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녀가 물러난 자리로 진혁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런 메시지를 보낸 이유가 뭐죠?”
진혁이 희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앉아 있으니 키가 커서 상당히 올려다보게 된다.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그에게 희나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파르페 먹고 싶어요.”
“네?”
“파르페 사줘요, 저기 카운터에서.”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던 진혁은 곧 어이없는 얼굴이 되었다.
희나가 다시 재촉하듯 탁자를 톡톡 치며 말했다.
“딸기하고 초코 파르페요. 빨리요.”
재촉하자 진혁은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파르페를 사러 카운터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보니 원하는 걸 얻어 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희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계산을 하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점원이 파르페를 들고 이쪽으로 왔다.
그녀는 진혁에게도 뭔가 주문하라고 말하려는 듯하다가 멈췄다. 미묘하게 차별하는 태도가 기분 나빴지만 뭐 아무려면 어떠랴. 희나는 즉시 스푼을 들고 파르페를 먹기 시작했다.
“……파르페 먹고 싶어서 부른 건 아닐 텐데요.”
아무 말 없이 5분 정도가 흐르자 진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희나는 그쪽을 보지 않은 채 계속 파르페를 먹으며 말했다.
“사실 먹고 싶은 건 밥이긴 한데, 이 가게는 음료수밖에 안 팔거든요. 이 근처는 분식점밖에 없고. 분식점 가면 학교 애들 득시글거릴 거고.”
질문의 의도가 파르페 말고 뭐 다른 거 먹고 싶어서 부른 거냐고 묻는 게 아님을 잘 알았지만 희나는 일부러 모른 척했다.
진혁은 더 어이를 상실한 표정이 되어 그녀의 먹는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뭘 봐요? 뭐 먹고 싶으면 따로 사다 먹으세요.”
그녀가 쏘아붙이자 그는 시선을 거두어들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그러건 말건 희나는 우선 파르페를 먹는 데 집중했다.
30분 있으면 아르바이트하러 가야 할 시간이다. 일이 상당히 힘들고 식사 시간도 따로 없었기 때문에 가기 전에 배는 채워 놔야 한다.
그녀는 태연자약하게 파르페를 빠른 속도로 싹싹 긁어 먹은 뒤 포만감을 느끼며 등받이에 편하게 몸을 묻었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린 채 딴 데를 보고 있는 진혁에게 말을 시작했다.
“먹을 만큼 먹었으니까 할 얘기 할게요.”
본론으로 들어가자 테이블 위에 턱을 괴고 딴 데를 보고 있던 진혁이 이쪽을 보았다. 희나는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그쪽 입장에 대해서 알려 줘야 할 거 같은데…….”
그쪽이라는 말에 진혁의 눈썹이 미세하게 치켜 올라갔다.
“선생님이라고 불러 줘요?”
“…….”
“뭐, 좋아요. 일단 선생님이라고 부를게요.”
건방지게 굴어도 그는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듣고 있었다.
희나는 여유롭게 보이려고 일부러 건들건들 말을 이어 갔다.
“무슨 일이 있었건, 내가 그런 문자를 가지고 있는 이상 얘기가 새어 나가면 곤란해지지 않겠어요?”
“……하고 싶은 말이 뭐죠?”
“조금 날 도와주면 선생님 입장을 배려해 줄 생각도 있다는 말이에요.”
희나는 양손으로 턱을 괸 채로 웃었다. 충격을 받은 듯 잠시 멈춰 있던 진혁의 보기 좋은 입술이 힘없이 열렸다.
“대충 예상은 했지만…….”
“그래요? 그럼 얘기가 빠르겠네요.”
안경 속의 부드러워 보이는 눈빛이 딱딱하게 변한 채 희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꽤 날카로운 시선이었지만 희나는 여유롭게 모두 받아 내며 안색 하나 바꾸지 않았다.
깊이 생각에 잠긴 듯 한동안 말없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던 진혁의 손이 멈췄다.
“좋아. 굳이 돌려서 말할 필요 없겠지.”
그의 말투가 갑자기 변했다. 희나의 예쁜 입술이 ‘호오-’라고 말하는 듯 동그랗게 모였다.
처음 만났을 때 쩔쩔매던 모습을 떠올리고 이번에도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만큼 순둥순둥하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너도 알겠지만…… 난 정식 교사가 아니라 교생이야.”
“그런 거 굳이 말 안 해 줘도 아는데요.”
“그러니까 난 대학생이고…… 돈 같은 거 없어. 생각 잘못한 거야.”
희나는 갑자기 돈 이야기가 나오자 벙쪘다.
돈을 노리고 있던 게 아니다. 도리어 그가 말을 꺼내고 나서야 돈도 요구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돈이 왜…….”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정말 없어.”
그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부유한 집에서 귀한 대접받고 자란 도련님 같은 비주얼인데 돈이 없다고?
희나가 그를 훑어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진혁이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협박당할 바엔 바로 경찰에 가겠어. 난 어찌 됐든 결백하니까.”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이다. 희나는 오해를 풀려다가 문득 그의 손을 보았다. 말은 단호하게 하고 있었지만 컵을 꽉 쥔 손이 하얬다.
착각한 주제에 강한 척하는 게 괜히 기분 나빠서 심술을 부리고 싶어졌다.
“그래요. 경찰에 가요. 난 협박 꽃뱀 원조교제녀로, 선생님은 제자랑 원조교제하다 협박당한 교생으로 뉴스 한번 같이 타 보죠. 어디 결백을 증명해 보세요.”
블러핑을 던졌다.
사실 그가 결백하다는 건 증명할 방법이 많을지도 모른다. 일단은 사과머리 패거리가 그 증인이었다. 물론 그 녀석들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협박에 동참할 확률이 훨씬 높았지만 말이다.
희나는 여유를 잃지 않은 채 가방을 집어 들며 말했다.
“내일 재미있어지겠네요. 잘 먹었어요. 그럼 이만.”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진혁을 뒤로한 채 희나는 태연스럽게 일어섰다. 그리고 걸어 나가려고 할 때였다.
“잠깐만.”
떨리는 목소리가 뒤에서 불렀다.
‘됐다, 넘어왔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희나는 내색하지 않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왜요?”
“……역시 학교에 얘기하는 건 곤란해.”
진혁은 난처한 표정을 지은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그런 구설에 휘말리는 건 싫겠지.
희나는 다시 맞은편에 앉으며 시계를 보았다. 5분 후에는 출발하지 않으면 아르바이트에 늦는다. 구구절절 원하는 걸 설명할 시간은 없고.
“나도 궁지에 몰아넣을 정도로 뜯어먹을 생각은 없어요. 요컨대 서로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보자는 거죠.”
“타협…… 이라면?”
“글쎄요? 내일까지 생각해봐요. 바라던 대로 학교에서 얘기하죠.”
말은 들어 보지도 않고 돈 뜯어내려는 꽃뱀으로 생각한 복수다. 내일까지 실컷 고민해보라지.
희나는 속으로 쿡쿡 웃으며 망연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그를 내버려 둔 채 베리베리 파르페를 나왔다.
***
다음 날 방과 후.
희나는 사회과 지도실에서 진혁과 마주 서 있었다. 낮에도 이곳에 오는 학생은 아주 드물었으니 방과 후라면 아무도 오지 않을 테지만 진혁은 신경 쓰이는 듯 출입구 쪽을 계속 흘끔거렸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아서 블라인드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그의 얼굴에 독특한 빛을 만들었다.
그는 어제보다는 훨씬 침착해져 있었다. 그 단정한 얼굴이 어쩐지 오래된 일본 멜로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켰다.
“돈은 줄 수 없어.”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멜로 영화에 영 안 어울리는 대사였다. 희나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야. 지금 교생 실습 때문에 아르바이트도 못 해서 빠듯해.”
단호한 그의 말에 희나는 귀티 나는 그의 흰 피부와 단정한 차림새를 훑어보며 틱틱댔다.
“그럼 여기로 왜 불러낸 거예요? 서로 피차 얼굴 보기도 싫을 텐데.”
“돈은 없지만 네가 학교에 알리는 것도 싫어.”
어제의 창백한 모습은 사라지고 그는 자기 할 말을 확실하게 하고 있었다.
“뻔뻔스럽네요.”
“너보단 아니지. 아무 일도 없었는데, 아니 오히려 돈까지 줬는데 협박하고 있는 건 너잖아.”
창백하게 굳어서 말도 제대로 못하던 어제보단 제법 날카로운 일침이다. 밤새 좀 생각을 하고 온 모양이었다.
“너도 그 고생해가면서 학교 다녔는데 밝히고 싶지 않을 거야.”
“선생님이 뭘 알아요?”
“난 모르지만 다른 선생님들한테 들었어. 생각보다 평판이 아주 좋던데.”
희나의 몸이 움찔했다. 입술을 앙다물고 째려보았지만 그의 표정은 어제와 비교도 안 되게 태연했다.
그는 20cm는 높은 시선을 이용해 그녀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내려다보는 표정이 정말 마음에 안 든다.
“하나같이 입을 모아 칭찬하더군. 불우한 형편에도 열심히 사는 기특한 학생 그 자체던데. 문제도 일으킨 적이 없대고. 원조교제를 하고 협박을 하는 지금의 너와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이미지가 달랐어.”
“…….”
“너도 놓치기 싫은 게 있을 거야. 그리고 너도 내가 결백하다는 걸 알잖아. 이쯤에서 서로 얌전히 물러나는 게 옳아.”
희나는 그를 묵묵히 올려보았다. 어쩐지 어제랑 입장이 상당히 역전되어 있었다.
시간 같은 거 주는 게 아니었는데, 계산 미스다. 이 사람이 학교 사람들에게 태연자약하게 내 일을 묻고 다닐 거란 생각을 못했어.
그는 생각에 잠긴 희나에게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한 행동은 나쁘지만…… 네가 정말 어렵다는 건 알아. 혹시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있으면 돕지.”
그녀는 속으로 돈을 뜯어내는 건 이제 물 건너갔음을 절감했다. 저쪽에서도 이쪽이 꺼려하는 걸 아는 이상 할 수 없었다. 사실 원조교제녀 따위로 알려지기 싫은 건 희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본론이나 빨리 꺼내는 게 낫겠네.’
사실 희나도 그를 협박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일단 원하는 거라도 확실히 확보해 두는 것이 중요했다.
“나 집에 들어가기 싫어요.”
희나가 대뜸 그렇게 말하자 진혁의 표정이 볼만해졌다. 입을 벌린 채 멍청한 표정으로 잠시 굳어 있는 그를 희나는 조금 통쾌한 기분으로 쳐다보았다.
잠시 후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실례-.”
그렇게 말하며 그가 손을 뻗어 주머니에 넣고 있는 희나의 양팔을 잡아 뺐다.
커다란 두 손이 팔을 감싸오자 놀란 희나가 거칠게 뿌리치며 뒤로 물러났다.
“뭐하는 거예요? 만지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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