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최악의 첫인상 (1)
“그러니까 그냥 모텔까지만 들어가면 된다니까?”
갈색 앞머리를 사과처럼 올려 묶은 동그란 얼굴이 바로 눈앞에서 말했다. 얼마나 가깝게 가져다 댔는지 입 안에 씹고 있는 풍선껌과 좀 전까지 피우던 담배 냄새가 확 풍겨 왔다. 그 불쾌함에 희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려버렸다.
그것을 거부의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사과머리가 소리를 빽 지른다.
“아, 너한테 피해는 안 가게 해 준다고!”
‘웃기고 있네.’
희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눈앞의 조그마한 사과머리 같은 건 무서울 것도 없지만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희나는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을 쭉 둘러보았다. 가까이에만 세 명의 여자, 그리고 멀찍이 미끄럼틀 주변에 앉아서 이쪽을 보고 있는 네 명의 불량해 보이는 남자애들.
그리고 그 뒤에 이쪽을 외면하고 서 있는 한 여자. 그녀는 희나의 친구인 소영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봄방학.
매일 아르바이트로 바쁘다가 간만에 휴일이라 집에 있던 희나는 친구 소영의 놀자는 전화를 받고 나왔다.
아무 의심 없이 그녀가 불러낸 대로 인적이 드문 놀이터에 접어들었을 때에야 학교 일진들이 모여 있는 걸 보았다. 바로 뭔가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내 말 이해한 거 맞아? 알아들었으면 들어 처먹었다고 말을 하든가.”
눈앞에서 사과머리가 답답한 듯 재차 희나를 재촉했다. 물론 희나는 그녀의 말을 모두 이해했다.
봄방학을 맞아 한가해진 불량소년, 소녀들은 자신들의 유흥을 위해 범죄의 계획을 세우고 희나를 이용해 먹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진짜 원조교제 하라는 게 아니라니까. 그냥 우리가 말하는 모텔까지 들어가서 전화하면 우리가 방으로 가서 돈만 받을 거야. 어차피 당해도 신고도 못 해. 원조교제 하려고 했다가 돈 뜯겼다고 경찰에 어떻게 가겠어?”
아주 클래식한 꽃뱀 사기였다. 막 나가는 애들인 줄은 알았지만 이따위 짓거리까지 하고 다니는 줄은 몰랐다. 뭐 이런 양아치들이 뭘 하고 다니든 알 바 아니지만, 저만치 서서 모른 척하고 있는 소영에게는 심히 유감이었다.
아니, 아무 의심도 없이 어슬렁어슬렁 기어 나온 스스로가 더 유감이다. 최근 소영이 학교에서 일진들에게 기웃거리며 잘 보이려고 굽실거리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희나는 한숨을 내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굳이 내가 안 해도 되잖아. 너희들끼리 하지그래?”
“직접 할 거였으면 불러내지도 않지. 시간 없어. 개수작 부리지 말고 그냥 까라면 까.”
소심한 반항은 역시 씨도 안 먹혔다.
희나가 뒤에 서 있는 소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사과머리가 킥킥 웃으면서 말했다.
“왜, 쟤 시키라고? 시키면 다 처하긴 하지만 쟤로는 안 돼. 나왔던 아저씨 도망가겠다.”
아이라인에 힘을 주었어도 감출 수 없는 가느다란 눈에 여드름이 드문드문 난 가무잡잡한 피부.
소영은 소위 장사가 안 되는 얼굴이긴 했다.
못 들은 척 가만히 서 있는 소영을 바라보며 희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말을 듣고도 어울리고 싶을까. 이해가 안 되네.’
속으로 한심하다 생각하다가 이쪽의 눈치를 보고 있던 소영과 눈이 마주쳤다. 시선이 닿기가 무섭게 그녀는 눈을 돌려 버렸다.
뭐 이 상황에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일이지만 소영은 희나 대신 사과머리 패거리를 선택한 셈이다. 이제 저런 애는 친구도 아니다.
희나는 기대를 접고 사과머리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아, 이제야 말 좀 통하네. 그럼 휴대폰 좀 내놔 봐.”
“휴대폰은 왜?”
“내놓으라면 좀 내놔. 꼬박꼬박 말 진짜 개 많네.”
싸가지 없는 말투에 희나의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성질 같아서는 쪼그만 사과머리와 사생결단이라도 내고 싶지만 상황이 불리하다. 희나는 참을 인을 새기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사과머리는 자기 휴대폰을 봐가면서 번호를 찍더니 희나의 폰으로 천연덕스럽게 문자를 보냈다.
「기다렸죠? 제가 깜찍이고딩냥이에요. 채팅한 사람 맞아요?」
「네, 맞습니다.」
「이거 제 번호니까 여기로 전화하면 돼요. 아까 천호동이라고 했죠?」
「네, 지금 천호동이에요.」
「바로 나올 수 있어요? 내가 아는 모텔 있으니까 거기로 가요.」
일사천리로 연락을 진행시키는 것을 보니 이미 호구를 물색해놓은 모양이었다.
오가는 문자를 옆에서 내려다보며 희나는 낭패감을 느꼈다.
남자에게 알려 준 휴대폰 번호도 그녀의 휴대폰이고 만나러 나가야 하는 것도 희나였다. 혹시라도 남자가 망신을 무릅쓰고 경찰에 피해를 알리러 간다면 결국 걸려 들어가는 건 그녀인 것이다.
‘이런 저급한 범죄에 걸려들다니. 하아.’
이제 와서 연루되고 싶지 않아도 피할 방법이 없었다. 피해자가 나중에 경찰에 신고할지 모른다는 불확실한 위험보다는 당장 눈앞의 위협을 모면하는 게 중요했다.
“야, 됐다. 나온대. 가자.”
희나는 체념한 채로 사과머리에게서 휴대폰을 받아 들고 그녀들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야상 재킷에 청바지 입었대. 너 생긴 거랑 뭐 입었는지 이미 말했으니까 지가 먼저 말 걸 거야. 여기서 그냥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 아, 너 아이디는 ‘깜찍이고딩냥’이다!”
대로변에 있는 배스킨라빈스 앞으로 희나를 데려온 후 사과머리는 주절주절 떠들어댔다.
희나는 주변을 휙 둘러보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계속 아무도 말 안 걸면? 보고 도망가면 어떻게 해?”
“분명히 올 거야. 거기다 일단 오면 눈 뒤집어져서 말 걸걸.”
사과머리는 청순해 보이는 희나의 예쁜 얼굴과 이미 완전하게 성숙한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자신만만하게 말하고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어쨌든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우린 가 있는다. 어딘지 알지?”
“알아.”
“안 오면 진짜 너 뒈지는 줄 알아. 피곤해지기 싫으니까 튈 생각은 아예 처하지 마.”
희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망칠 생각 같은 건 애당초 하지도 않았다.
소영은 희나의 집을 아니까 도망가 봤자 찾아올 것이다. 집에는 그녀를 도와줄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
얌전해진 그녀를 보고 사과머리는 만족해서 발길을 돌렸다. 곧 희나는 길거리에 혼자 남았다. 그녀는 배스킨라빈스 벽에 기댄 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멍하니 생각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빨리 끝나라. 왜 이렇게 안 와?’
길거리에 가만히 서 있으려니 추위도 조금 몰려오는 것 같았다. 아직 봄이라기엔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그녀는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에 상대를 찾아서 열심히 눈을 굴렸다. 원조교제나 하는 아저씨가 웬 야상 재킷이냐고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그렇게 5분쯤 흘렀을까. 조용한 목소리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부름에 희나는 긴장한 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 희나의 입이 헤-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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