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프롤로그
희나는 그날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일어나자마자 눈이 침침하고 머리가 어질어질하며 으슬으슬 오한도 일고 있었다.
‘감기 기운이 있는 건가.’
심상치 않은 몸 상태였지만 그녀는 마스크로 무장한 채 무리해서 방을 나섰다.
학교 수업을 절대 빼먹지 않는 주의이기도 하고, 여럿이서 쓰는 기숙사에서 쉬고 싶은 기분도 들지 않았다.
괜찮아지겠거니 믿고 강의에 출석했으나 몸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악착같이 정신력으로 버텨 보았지만 결국 오후 무렵에는 쓰러질 지경이 되었다.
화장실에서 잠시 마스크를 벗었다가 열꽃을 발견한 그녀는 결국 자체 휴강을 선택했다.
당연히 병원에 가야 하겠지만 시골구석에 있는 학교라서 버스를 타고 나가야 한다. 도저히 그럴 만한 체력이 없어서 그녀는 그냥 5분쯤 걸어가면 있는 버스 정류장 앞의 약국으로 향했다.
‘이러다 정말 쓰러져서 죽는 거 아냐…….’
금방이라도 바닥에 고꾸라져 버릴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재촉했다. 그녀는 남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딱 질색이었다.
다섯 시간 같은 5분이 지나고 드디어 낡아빠진 버스 정류장과 그 뒤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는 2층짜리 상가 건물이 보였다.
이 근처는 유동 인구라고는 하루에 몇 대 안 지나가는 버스에서 내리는 승객들과 희나가 다니는 대학교의 학생들뿐이었다. 이런 빈곤한 상권에 약국이 있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가 힘없는 손으로 1층에 위치한 허름한 유리문을 밀었다.
입학하고 벌써 1년이 지나 2학년이 되었건만 학교 바로 앞에 있는 이 약국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갑갑할 것 같은 외관과 다르게 내부의 공기는 그다지 퀴퀴하지 않았다. 바깥의 간판에는 뽀얗게 먼지가 쌓여 있었지만 내부는 깔끔하고 정결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예상보다 넓었다.
정작 중요한 것이 없었지만…….
‘대체 뭐 하는 약국이야? 왜 아무도 없어?’
아무도 없이 텅 빈 카운터 내부를 보고 희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인기척조차 없었지만 돌아갈 기운도 없었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풀린 다리를 이끌고 카운터로 다가갔다.
카운터 앞에 섰을 무렵, 뭔가가 다리 부근을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아래를 내려다본 희나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하마터면 놀라서 졸도를 할 뻔했다. 인기척도 없었는데 어느 결에 다가왔는지 창백한 얼굴에 아주 작은 아이가 다리를 잡은 채로 빤히 그녀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기운이 없어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열이 올라서 헛것이 보이나.’
귀신이고 뭐고 이제는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들었다.
현기증이 나서 비틀거리며 탕 소리가 나도록 카운터에 몸을 기댔다. 그러자 그때서야 비로소 약국 안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안쪽에서 허둥지둥 뛰어나온 것은 하얀 가운을 입은 약사가 아니라 작업복을 입은 남자였다.
그는 카운터에 기댄 채로 숨을 몰아쉬고 있는 희나에게 다가와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괜찮으세요? 많이 불편하신가 봐요?”
들려온 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꺼져 가는 희나의 의식이 희미하게 반응했다.
어딘가 아주 익숙하고도 그리운 목소리였다.
희나는 힘을 쥐어짜 내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움직임이 멎었다.
뿔테 안경과 그 너머의 다정해 보이는 선이 가는 이목구비.
5년 만의 재회였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사람이야.’
항상 다시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런 장소에서 이런 식으로 재회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굳어버린 그녀와 달리 그는 희나를 알아보지 못한 눈치였다. 그 사실이 좀 충격이었으나, 그녀는 곧 자신이 마스크를 쓰고 있음을 상기했다.
“저기…… 괜찮으세요? 제 얘기 들리시나요?”
굳어진 채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는 그녀를 보며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변함없는 다정한 목소리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희나의 입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변한 게…… 거의 없네요.”
“네?”
“오랜만이에요, 선생님.”
희나는 천천히 쓰고 있던 마스크를 내려서 얼굴을 내보였다.
그러자 걱정스러운 듯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그가 굳어졌다. 곤란한 표정을 보니 희나는 강렬한 데자뷔가 머릿속을 가득 메우는 것 같았다.
그래, 저 얼굴이다. 그녀가 심한 말을 할 때마다 항상 짓던 표정.
그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저 곤란한 듯한 표정이었다. 저 표정을 지난 5년간 수도 없이 떠올렸다. 만나면 하고 싶은 말도 잔뜩 생각해 두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5년 만의 재회를 만끽할 수가 없었다.
열에 들뜬 희나의 몸이 크게 휘청하는가 싶더니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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