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7
연호 카르벨 8년.
황궁 내부는 오늘따라 잦은 외부인의 입궁으로 어수선했다.
에스피디 제국 막내 황녀님의 첫 번째 탄신일이기 때문이었다.
연회를 앞둔 시종과 하녀들 모두 자신의 일거리를 위해 바삐 움직였다.
그런 가운데 기사들의 표정은 좋은 날과 어울리지 않게 딱딱했다.
꽉 다물린 입매와 예리하게 살피는 시선이 꼭 죄인을 찾아내는 듯이 보였다.
만약 탄신일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암살자라도 들어왔나 싶을 정도로 군기가 바짝 올라 있었다.
살벌한 감시를 참다못한 시녀 중 하나가 트레이 손잡이를 꽉 움켜쥐며 물었다.
“오늘 무슨 일 있대요? 살이 떨려서 일을 못 하겠어요.”
“별일 없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답변에 시녀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걱정을 안 할 수가 있어야지.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기사분들도 평소보다 많아진 게 영 꺼림직해요.”
“소속이 어떻게 됩니까.”
“황녀궁에 있어요. 그러니까 좀 슥 찔러줘 봐요. 침입자라도 있는 거예요?”
시녀의 소속까지 들은 기사는 마른침을 삼켰다.
슬쩍 주변을 살핀 그는 목소리를 줄인 채 속삭이듯 말을 전했다.
“딜런 황태자 전하와 이반 2황자 전하께서…….”
예상치 못한 이름에 겁에 질린 시녀가 주춤, 뒤로 물러서는 것과 동시에 뒤에서 어린 음성이 그들을 불렀다.
“무슨 일이지?”
마치 정령이라도 본 듯 자리에서 튀어 오른 두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빠른 속도로 고개를 숙였다.
“디, 딜런 전하.”
엘로니아 황후를 닮았지만 그녀와 달리 곧은 주황빛 머리카락이 조명을 받아 날카롭게 느껴졌다.
아마도 카르벨 황제를 닮은 매서운 눈매 탓인 듯했다.
연회를 앞두고 정복을 곱게 차려입은 딜런은 매우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말하기 싫으면 됐어. 노움에게 물어보면 되니까.”
딜런의 퉁명스러운 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시녀는 말을 덧붙였다.
“아, 아닙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평소와 달리 황궁 경비가 삼엄하여 호기심에 기사님께 여쭤봤을 뿐입니다. 정말 이게 전부입니다!”
딜런이 정령사라는 사실은 제국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정령과 함께 지내서일까.
다른 이들은 볼 수 없는 정령과 딜런의 유대감이 대단한 듯했다.
농담처럼 정령이 그를 키웠다는 이야기가 나돌고는 했는데, 황궁 시녀들은 그게 과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빠른 실토가 통했는지, 딜런의 눈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그들을 훑었다.
“흐음…….”
그런 그의 뒤에서 자그마한 손이 딜런의 정복을 움켜쥐었다.
“형아. 모야?”
“별거 아닌가 봐, 이반.”
곱슬거리는 주황빛 머리카락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동그란 잿빛 눈동자는 깜빡이며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시종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제2황자 이반 에스피디였다.
이반은 가만히 주변을 살피다 허공을 잠시 빤히 응시하더니 다급하게 딜런의 손을 잡아당겼다.
“형아. 님프가 지금 루디한테 가봐야 한대.”
“알았어, 잠깐만.”
짧게 이반을 달랜 딜런은 제법 진지하게 기사를 향해 말했다.
“어찌 되었든 오늘은 루디 생일이니까, 무슨 일 생기지 않게 꼭 최선을 다해야 해.”
“알겠습니다, 전하.”
“만약 문제라도 생기면 전부 노움에게 과거를 보여달라고 해서 책임을 물을 테니까.”
어린 황태자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 섬뜩했다.
덕분에 시녀와 기사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갔다.
척척, 딜런이 만족스럽게 이반의 손을 붙잡고 걸어갔다.
두 황자의 뒷모습을 보던 이들은 그림자가 사라지고 나서야 힘겹게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정령사였던 엘로니아 황후 덕분인지, 두 황자 모두 정령사였다.
때문에 황궁에서는 그 어떤 거짓말도 통하지 않았다.
특히나 고작 10살도 채 되지 않은 딜런은 데드 경의 밑에서 벌써부터 검술을 배우고 있었다.
실력도 어린 나이치고 출중해서 미래가 기대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온 지도 꽤 오래되었다.
그뿐인가. 어찌나 제 동생에게 끔찍한지. 탄신일 축하 연회에도 저렇게 손수 확인을 하러 다닌다.
기사는 잘못한 것 없이 견제받은 탓에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황궁에서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인간이 아닌 다음에야 그 누가 허술하게 일을 하겠는가.
기사는 왠지 딜런에게 찍혔다는 생각에 씁쓸하게 되물었다.
“루디 황녀님도 정령사라고 하셨더랬죠…….”
“예…….”
힘없는 시녀의 답에 기사는 다시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부디 황녀님의 정령이 좋게 말을 해 주셨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
“루디, 이거 봐. 나 정복 입었어.”
딜런은 침대에 누워 바둥거리는 작은 아기를 보며 잔뜩 부푼 목소리로 자랑했다.
엘로니아는 바람 빠지듯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그러네. 딜런이 정복을 입으니까 더 잘생겨 보인다. 그치, 루디?”
엘로니아는 까르륵 웃는 제 막내딸에게 고개를 숙이며 일부러 딜런을 가리켰다.
하지만 이미 닉스를 잡는 것에 몰두한 루디는 썩 관심이 없었다.
곧 뾰로통해진 딜런이 닉스를 노려보며 물었다.
“정말요? 근데 왜 루디는 반응이 없지?”
하얀 피부와 벌써부터 또렷한 이목구비는 어린 나이에도 귀한 티가 났다.
암만 늠름한 척을 해도 아이는 아이였다.
제 동생에게 잘생긴 모습을 보여 줄 생각에 부풀었다가, 관심이 없다고 시무룩해지는 걸 보아하니 말이다.
‘하지만 너도 어릴 때는 정복 같은 것에 관심 없었단다, 딜런…….’
엘로니아는 이반의 손을 잡고 옹기종기 침대 근처에 모여 있는 아들들을 보며 웃음을 참았다.
정작 아기용 보닛을 들고 이리저리 루디의 손을 피해 도망 다니는 닉스만 곤란하게 되었다.
[저거 봐라. 내가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고, 키워놨더니 노려보는 거 보라고!]
“닉스 노려본 거 아니야.”
[저 저, 시커먼 놈이랑 똑같은 눈매 봐라. 노려봤잖아, 인마!]
워낙 어릴 때부터 함께 지낸 탓에 격의 없는 대화가 오고 갔다.
결국 이반의 어깨 위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님프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닉스가 루디의 시선을 끌며 박수를 치는 사이, 님프가 빠른 속도로 보닛을 씌웠다.
엘로니아는 능숙해진 그들의 솜씨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와, 님프랑 닉스는 이제 거의 프로가 다 되었네.”
[흥. 내가 정령사 몇 명을 키워냈는데. 이 정도는 눈을 감고도 하는 거지.]
씌운 것은 님프였지만 엘로니아는 굳이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설마하니 자신의 아이 세 명 모두 정령사가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쯤 되면 정령들의 단체 기우제 수준이었다.
딜런이 정령사라고 밝혀진 이후. 엘로니아의 방 구석구석에서는 한동안 님프가 숨겨둔 돌멩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베개 밑, 침대 밑, 책상 서랍, 심지어 드레스 끝자락에 매달아두기까지!
‘성공했구나 정령들아…….’
정말 그 돌의 효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저 정도의 바람이라면 안 될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바랐던 만큼, 정령들은 딜런과 이반을 최선을 다해 돌보았다.
[어이, 이반. 전에 님프가 내준 마법분자학의 법칙은 다 외웠어?]
“웅. 그치만 3장부터는 이해가 잘 안 돼…….”
[흠, 오늘 리프리가 올 테니까 그놈한테 풀어서 설명해달라 하면 되겠다. 왜 이해를 못 하나 몰라. 인간은 너무 어려워.]
보다시피 좀 심하게 조기교육이었다.
딜런 때만 해도 셋이 들러붙어 가르치더니, 요즘은 분업을 한 것인지 각자 나뉘어서 행동하는 듯했다.
노움은 딜런을 맡았고, 님프는 이반을. 그리고 최근 루디가 태어난 이후로는 닉스가 맡은 모양이었다.
툴툴거리던 그가 이제는 제 아이들에게 붙어 있는 걸 보니 신기하기도 했다.
엘로니아가 새삼스럽게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때쯤.
똑똑, 가벼운 노크와 함께 낮은 음성이 넘어왔다.
“다들 여기 있을 줄 알았네.”
“아버지!”
“아바마마!”
정복을 차려입은 그를 보자마자 두 아들이 반색했다.
여전히 세 아이의 부모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근사한 그였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엘로니아는 숨기지 않고 답했다.
“멋있네요. 역시 카르벨은 정복이 잘 어울려요.”
“그래? 그럼 환복할 걸 그랬군.”
“왜요? 멋있다니까요.”
“그대에게만 잘 보이면 되니까.”
그는 장난스럽게 엘로니아에게 입을 맞췄다.
딜런과 이반은 익숙한 듯 그저 루디를 보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 틈을 타 그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놀란 엘로니아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자 피식, 웃음을 흘린 그가 그제야 떨어졌다.
엘로니아는 샐쭉해진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애들 앞에서 못 하는 짓이 없어.”
“내 아내가 예쁜데 이 정도도 안 되는 건가……. 오랜만에 근사하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설렜는데.”
카르벨은 대놓고 시무룩하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제는 통하지 않았다.
엘로니아는 밉지 않게 코를 찡긋하며 제법 엄격하게 답했다.
“상처받은 척하지 마요. 아닌 거 다 아니까.”
“이런.”
그는 아쉽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엘로니아는 모른 척 루디를 안아 들었다.
두 아들과 달리 칠흑 같은 흑발에 보랏빛 눈동자를 지닌 아이가 모친을 알아보고 방긋거렸다.
“마!”
“응, 루디. 오늘 생일 연회 전에 초상화를 그려야 해요.”
“아웅!”
“예쁘게 보여야 하니까, 잠깐만 쓰고 있자. 알겠지?”
엘로니아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인지, 보닛을 쓰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던 루디가 방긋방긋 웃었다.
카르벨은 능숙하게 두 아들에게 갈 길을 터주듯 고개를 까닥이며 물었다.
“딜런. 초상화를 그릴 때까지 잘 참을 수 있나.”
“물론이죠, 아버지. 그럼 연회 끝나고 루디한테 책 읽어줘도 돼요?”
“그건 내일 저녁 훈련이 끝나고 하도록. 오늘은 피곤할 거다.”
“약속했어요. 내일은 제가 루디랑 놀 거예요.”
딜런은 잔뜩 기대되는 투로 답을 건넨 뒤 힘차게 이반의 손을 이끌고 걸어 나갔다.
***
저녁이 되고 황궁의 모든 불이 환히 켜졌다.
루디 에스피디, 막내 황녀를 위한 축하 연회를 위해서였다.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오케스트라의 음악은 황궁 복도에까지 넘쳐흘렀다.
아름다운 드레스와 아기 황녀님을 위한 선물을 챙겨 온 이들은 그레이트 홀로 향하던 중 걸음을 멈췄다.
황궁 복도. 역대 황가의 초상화가 걸린 그곳은 여전히 길고 웅장했다.
다른 곳보다 아치형인 천장이 심리적으로 훨씬 드높게 느껴지게 만들었다.
그저 부모님의 등쌀에 떠밀려 온 어린 영애들은 신기한 듯 훑어보며 제 부모에게 물었다.
“와아, 예쁘다……. 아버지, 왜 이 초상화만 사람이 많아요?”
“그야 선황후 폐하는 일찍 돌아가셨거든. 그 뒤로도 황비랍시고 들어온 이들이…….”
“여보.”
아내의 일갈에 귀족 남성은 입을 다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는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내 호명되는 이름에 노래가 흐르는 곳으로 향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 아이가 지나가는 곳에는 거대한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카르벨과 엘로니아. 그리고 두 황자와 막내 황녀까지.
유일하게 복작복작한 초상화 속 사람들은 모두 복도에 넘치는 웃음소리에 걸맞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공작님, 청혼 장소가 틀렸어요! 외전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