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
티타임을 끝내고 돌아온 엘로니아는 제 방을 어수선하게 돌아다녔다.
“뭐라고 말해야 카르벨을 놀라게 할 수 있을까.”
딜런의 임신은 그녀보다 카르벨이 먼저 알아챘다.
평소와 다름없이 정령들과 지내던 평범한 날.
갑자기 카르벨이 티타임을 가지자더니 대뜸 의원에게 그녀를 데려갔다.
님프에게 케이크를 가져다주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엘로니아는 자주 본 황궁 의원을 보고 당황해 눈만 끔뻑였더랬다.
그대로 놀랄 틈도 없이 검진을 받은 엘로니아는 처음으로 딜런의 임신 소식을 들었다.
엘로니아는 두 주먹을 꽉 움켜쥐며 벽에 걸린 혼인식 초상화를 노려보았다.
“분명 전조증상이랄 것도 없었는데 말이지…….”
대체 어떻게 본인보다 눈치가 빠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첫 임신 때 카르벨을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었는데, 오히려 본인이 놀라게 됐다. 이게 말이 되는가!
“이번에는 모르고 있을 거야. 그렇지, 이프리트?”
[…….]
엘로니아는 멀찍이 서서 그녀를 구경하고 있는 이프리트에게 확신에 차 되물었다.
원체 말이 없는 그는 그저 무표정하게 그녀를 볼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카르벨이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황궁도 일 때문에 비웠고, 비우기 전에도 행동에 신경 썼으니까. 그러니까 이번에는 놀랄 거야.”
[……시커먼 인간이라면 아마도……. 예. 놀랄 겁니다.]
“이프리트가 그렇게 얘기하니 조금 확신이 생기네.”
엘로니아는 힘을 모으듯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때마침 똑똑, 에이미의 언질도 넘어왔다.
“황후 폐하. 전하께서 정원까지 도달하셨다 합니다!”
“예정보다 빠르네?”
“반나절이라도 당기셨다고 해요.”
“좋아, 오시면 환복하고 테라스로 오라고 전해줘.”
“알겠습니다. 그럼……. 예정대로 진행하면 되는 거지요?”
문틈에서 고개만 든 에이미가 비장하게 목소리를 내리깔며 물었다.
엘로니아도 덩달아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딜런은 나와 정령들이 준비시킬 테니까, 유모에게 입단속만 주의시켜줘.”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기민하게 움직이는 그녀가 문을 조심스럽게 닫는 사이, 뒤에서 이프리트의 희미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눈치 하나는 좋은 인간이니 생각이 있다면 놀란 척이라도 하겠죠.]
“미안, 뭐라고 했어? 에이미랑 대화하느라 못 들었어.”
[아닙니다.]
어째서인지 눈 밑이 그늘진 그는 고개를 뒤로 내빼며 입을 다물었다.
중요한 말이라면 다시 건네주겠거니 한 엘로니아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환복을 하면 카르벨은 제일 먼저 그녀를 찾아올 것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엘로니아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꼼꼼하게 훑어보았다.
아직 티도 안 나는 배에 슬쩍 손을 얹어보았다.
우리에게 찾아온 선물처럼 여겨주었으면 했다.
딜런을 너무 덤덤하게 넘기는 바람에 꼭 계획된 아이처럼 느껴지는 게 더 컸다.
‘물론 계획한 건 맞지만…….’
딜런을 가졌다는 소식에 유독 입에 미소를 걸고 다니던 카르벨을 떠올려보면, 둘째 소식도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거라 믿었다.
엘로니아는 바로 옆에 있는 딜런의 방으로 막힘없이 자리를 이동했다.
정령들이 어느새 정복까지 말끔하게 입혀둔 뒤였다.
닉스는 땀이 흐르는 이마를 닦아내며 거친 호흡으로 외쳤다.
[이 자식이. 머리 좀 정리하게 가만히 좀 있어 봐!]
“아바마마 와써!”
신이 나는지, 다칠까 봐 침대 주변에 쳐 둔 울타리를 붙잡고 딜런이 덩실거렸다.
그 틈을 타 닉스와 노움이 빠르게 딜런의 결 좋은 머리카락을 이마 위로 올려주었다.
곱슬거리는 엘로니아의 머리카락과 달리, 우습게도 딜런은 카르벨을 많이 닮았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를 많이 따르기도 했다.
엘로니아는 혹여 계획이 어그러질까 싶어 딜런을 가볍게 안아 들며 물었다.
“딜런, 엄마가 했던 말 기억하지?”
“아바 선물!”
“그렇지. 아바마마가 오시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그랬어?”
딜런은 자그마한 손을 꼬물거리며 자신의 입을 만지작거렸다.
한참 침음을 삼키던 그는 드디어 생각이 났는지 그녀의 품에서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딜런이 드릴 선물이 이써요.”
“아휴, 잘한다. 누굴 닮아서 이렇게 똑똑해?”
“아바마마!”
“……그치. 카르벨이 똑똑하지…….”
엘로니아는 조용히 눈동자를 굴려 정령들을 훑었다.
님프와 노움은 고개까지 힘차게 저어가며 자신들이 가르친 말이 아니라고 온몸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닉스만이 그 모습이 웃기는지 배를 붙잡고 웃을 뿐이었다.
[어쩌냐, 엘로니아. 푸하하!]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뭔가 묘하게 억울해 입술을 씰룩이는 사이, 작은 손이 엘로니아의 뺨을 가볍게 건드렸다.
시선을 내리자 딜런이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마!”
“엄마도 닮았어?”
“넴.”
배시시 웃는 미소가 어찌나 환한지, 감동을 받은 엘로니아는 자그마한 제 아들의 뺨에 입술을 문질렀다.
여린 살냄새가 괜히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아직도 이렇게 예쁜데, 둘째가 태어나면 얼마나 더 이쁘려고.
엘로니아는 사뿐하게 테라스로 걸음을 옮겼다.
정령들과 노닥거리는 사이, 하녀들이 제법 화사하게 꾸며둔 뒤였다.
테이블 가운데에 놓인 꽃병하며, 케이크까지. 평소에 쓰던 플레이트보다 꽃잎이 살짝 흩뿌려진 모습이 풍경과 잘 어울렸다.
너무 화려하지도, 수수하지도 않게. 딱 엘로니아가 부탁한 그대로였다.
달콤한 냄새에 눈이 번쩍 뜨인 님프가 우물쭈물하며 엘로니아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녀는 작은 소리로 그녀에게 묻고 있었다.
“아, 님프 기억력도 좋네? 맞아. 처음 헤일튼가에 갔을 때 카르벨이랑 먹었던 케이크야. 일부러 황궁 파티시에 말고 헤일튼가에 있던 분으로 부탁했거든.”
꽃도 헤일튼가의 정원에서 직접 공수해 온 것이었다.
과연 카르벨은 알아볼까.
자꾸만 레이스 테이블보를 움켜쥐는 딜런을 가볍게 어르고 있을 때.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엘로니아, 많이 기다렸나.”
뒤를 돌자 환복을 하자마자 온 것인지 머리까지 빳빳하게 올린 그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 아버지를 보자마자 딜런은 이리저리 몸을 꼬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눈치였다.
슬그머니 바닥에 내려두자, 그는 두 팔을 뻗어 우다다다 하고 카르벨에게 달려들었다.
“아바마마!”
“딜런, 엘로니아의 말은 잘 듣고 있었나.”
“네! 선물 준비도 열심히 해써요!”
아, 안 돼 딜런! 벌써!
순간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엘로니아의 손이 움찔했다.
하지만 딜런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끝내기 위해 빠른 속도로 테라스에 놓인 테이블로 뛰어왔다.
발뒤꿈치까지 든 그는 짤막한 팔을 쭉 뻗어 테이블 위에 있던 편지 한 장을 기어코 손에 쥐었다.
그러고는 다시 바쁘게 카르벨에게 뛰어가 척 건네며 말했다.
“딜런이 썼어요!”
“내게 주는 건가.”
“마마가 쓰라고 해써요.”
아, 아……. 딜런……. 그런 얘기는 안 해도 돼.
엘로니아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편지지 위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아바마마께’라고 적혀 있었다.
이제 막 글을 배우고 쓰는 터라 그리 달필은 못 되었지만 마음의 눈으로 보면 알아볼 수는 있었다.
카르벨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딜런의 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어트렸다.
이를 지켜보던 닉스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 자식이! 내가 오늘 얼마나 고생해서 만든 머리인데! 이건 결투 신청이 분명하다!]
“아니야, 닉스. 그런 의도가 아닐 거야…….”
씩씩거리는 닉스도 모른 채 카르벨은 태연하게 서신을 펼쳤다.
그 안에는 제각기 크기를 지닌 글자들이 간신히 문장을 완성하고 있었다.
<아바마마, 딜런은 동생이 생겼어요!>
엘로니아는 슬쩍 뒤에 놓인 테이블에 시선을 두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케이크를 먹으며 딜런이 건네는 거였는데, 이미 틀어진 지 한참이었다.
‘뭐, 전해만 지면 됐지.’
인생이 어디 계획대로 흘러가던가.
이 정도는 오히려 즐거운 추억이 될 것 같았다.
가볍게 웃음을 내뱉은 엘로니아는 멋쩍게 카르벨의 안색을 확인했다.
놀랐을까? 기왕이면 그녀가 딜런의 임신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처럼 느꼈으면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조금 놀란 듯 편지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이거, 딜런 네가 직접 쓴 건가.”
“네. 어마마마가 도와줘써요.”
“훌륭하군. 곧 있으면 내 일도 돕겠어.”
한참 모자란 실력인 것을 알면서도 그는 딜런을 칭찬했다.
카르벨은 다시 한번 딜런의 머리를 토닥인 뒤, 허리를 숙여 그의 작은 손을 맞잡았다.
안주머니에 소중히 서신을 넣은 그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혼자 준비한 거야?”
“준비라고 할 것도 없는걸요. 놀랐어요?”
“매우.”
그는 기분 좋은 듯 가볍게 엘로니아의 볼에 입을 맞췄다.
테이블 위에 놓인 꽃과 케이크를 보더니 크게 웃음을 터트리기까지 했다.
“이런 귀여운 생각은 어디서 하는 건지 모르겠네. 헤일튼가까지 다녀온 건가.”
“에이미에게 부탁했죠. 아주 의욕적이던데요.”
“그럴 만도 하지.”
카르벨은 자신의 손을 잡아당기며 올려달라는 딜런의 신호를 듣고는 번쩍 안아 들었다.
그는 미리 준비된 의자에 딜런을 앉히며 말했다.
“일을 열심히 한 보상이 너무 크군. 심장이 떨려.”
“성공했네요. 카르벨을 떨리게 만들었으니. 그거 한 번 해보겠다고 얼마나 고민했는데요.”
“그냥 툭 던져도 설렜을걸. 난 아직도 그대만 보면 떨리거든.”
슬그머니 늘어지는 그의 입매에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덩달아 엘로니아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가 딜런의 앞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끌어다 주는 것을 보는 순간. 문득 그녀는 깨달았다.
‘둘째를 가지고도 걱정이 없었구나, 나…….’
카르벨에게 어떻게 알릴 것인지만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기뻐할지, 이름은 무엇으로 할지. 딸일지 아들일지.
그 고민 속에 이전의 엘로니아라면 했을 망설임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전의 그녀라면 둘째를 더 예뻐하던 자신의 부모를 떠올렸을 것이다.
둘째가 딸이라면 아들만 예뻐하면 어쩌나. 아들이면 아들인 대로 둘째만 더 예뻐하면 어쩌나.
하지만 지금은 그리 걱정되지 않았다.
‘다 소중한걸.’
둘째 임신 소식을 의원에게 들었을 때 얼마나 행복했던가.
딜런은 눈에 보이지도 않으면서 동생이 생겼다고 엘로니아의 배에 심심하면 귀를 대기까지 했다.
이따금 자신이 배운 것을 손가락도 채 다 생기지 못한 아이를 위해 설명해주기도 했다.
어느 아이가 태어나든 다치면 마음이 아플 것이고, 잘 되면 누구보다 기뻐할 것이 분명했다.
엘로니아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그녀를 보던 카르벨이 대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침 잘됐네. 내가 안 그래도 오면서 그대에게 줄 선물을 준비했거든.”
늘 그가 가져오는 선물이라면 대충 예상이 되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의 종소리에 시종들이 들고 들어온 것은 영 다른 종류였다.
작은 아기 신발, 옷, 펜…….
심지어 딜런이 쓰기에는 또 너무 작았다.
‘뭐지……?’
이 위화감은 무엇인가.
당황한 엘로니아와 달리 카르벨은 태연하게 딜런의 몫을 챙길 뿐이었다.
“딜런, 전부터 갖고 싶다고 했던 오크나무로 만든 목검이다. 내 리프리에게 부탁해 방어 마법을 걸어두었지.”
“와아!”
엘로니아는 제 손바닥만 한 아기의 신발을 보며 물었다.
“이건 뭐예요?”
“아, 슬슬 우리 둘째를 준비해야 하지 않나 했거든. 때마침 엘로니아가 이렇게 좋은 소식을 보내줄 줄은 몰랐지.”
하긴. 펠런 백작 부인도 둘째를 낳으려면 지금이 적기라고 했으니. 그라고 다른 생각을 했을 리 없다.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카르벨이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싱긋 웃고 있는 걸 보니 괜한 생각인 듯했다.
엘로니아는 그가 준비한 작은 옷가지들을 보며 마주 웃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