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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청혼 장소가 틀렸어요!-232화 (232/234)

외전 5

딜런에게 정령이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방 안이 온통 흥분한 정령들의 외침으로 가득 찼다.

[봐, 봤어? 내가 보여?]

닉스는 믿기지 않는 듯 빠른 속도로 딜런의 주변을 빙빙 돌아다녔다.

어찌나 빠른지, 오히려 엘로니아의 눈에 흐릿한 잔상만 남을 뿐이었다.

흥분한 것은 비단 닉스뿐만이 아니었다.

노움은 기분이 좋은 듯 딜런에게 뺨을 맞대며 비비적거렸다.

[우와, 딜런. 난 노움이야. 노움!]

“늄!”

[닉스, 들었어? 날 불렀어!]

부정확한 발음에도 정령들은 함성을 내질렀다.

우연히 내뱉은 옹알이가 비슷하게 들린 듯했으나, 서로 어떻게든 제 이름을 불리겠다고 야단이었다.

닉스는 제법 진지한 얼굴로 딜런의 가슴팍 부근에 근엄하게 앉았다.

그는 양손을 허리에 올린 채 단호하게 말했다.

[딜런, 너는 똑똑한 아기니까 닉스를 제일 먼저 발음해야지. 자, 따라 해봐. 닉스.]

“먀!”

[닉스.]

“아우응.”

물론 그의 이름은 들릴 리 없었다.

몇 번을 더 시도하던 닉스의 인내심이 떨어질 무렵. 그의 볼살이 분노로 잘게 떨려왔다.

[좋아, 끝까지 내 이름은 안 부르겠다. 역시 정령사라 그런지 영악해. 어디 내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게 만들어주겠다!]

팍 튀어 오른 닉스는 딜런의 침대 위에 장식해 놓은 모빌을 빠른 속도로 돌렸다.

무섭도록 돌아가는 장난감을 보던 카르벨이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딜런의 침대로 다가갔다.

그는 격하게 돌아가는 모빌을 가볍게 손으로 쳐내어 멈추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제 품에 아이를 안아 들며 말했다.

“위험하니 모빌은 치우는 게 좋겠군.”

카르벨의 눈짓에 유모와 함께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빠른 속도로 침대에 붙어 있던 모빌을 제거했다.

이에 정령들은 화가 난 듯 항의했다.

[뭐야, 너만 정령사를 보겠다는 거냐?]

닉스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카르벨을 노려보았다.

[와, 시커먼 인간은 안 되겠네. 엘로니아도 모자라서 딜런도 독점하겠다는 거야?]

하지만 그의 시비가 전혀 들릴 리 없는 카르벨은 아무렇지 않게 딜런을 살필 뿐이었다.

제 부친을 알아보는 것인지 딜런은 작은 손으로 카르벨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공식적인 석상에서는 언제나 딱딱하기만 했던 그의 입매에 미세한 미소가 걸렸다.

매일같이 그에게 혼나고 있는 귀족들이 본다면 믿지 않을 만한 광경이었다.

딜런은 이목구비가 또렷해질수록 카르벨을 닮아가고 있었다.

벌써 감은 눈매가 길쭉한 것을 보면, 분명 크면 한 인상을 쓸 것 같았다.

물론 그와 달리 정령만 보면 방긋방긋 웃는 모습이 그만큼 서늘한 분위기는 아닐 테지만 말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엘로니아의 심정은 복잡하기만 했다.

‘……저렇게 정령들이랑 둬도 되는 걸까.’

아무래도 정령들은 인간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정령사라고 하더라도 수명은 일반적인 사람과 같을 터.

벌써부터 정령에게 익숙해지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할까 봐 걱정되었다.

더군다나 정령사는 남들의 속셈이나 올바르지 못한 계획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위치였다.

‘황궁에는 순수하게 충심을 지닌 사람만 오는 게 아닌데.’

별다른 이견이 없다면 딜런은 황태자로 자랄 것이다.

권력에 눈이 먼 자들이 어디까지 추해질 수 있는지를 엘로니아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너무 사람을 못 믿게 되면 어쩌지.’

정령사라는 사실이 기쁘면서도 동시에 우려스러웠다.

그만큼 세상은 만만하지 않을 테니까.

심각한 엘로니아의 눈앞에 갑작스럽게 쑤욱, 딜런의 동그란 얼굴이 보였다.

잠시 눈을 크게 뜨고 깜빡이던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딜런의 허리와 엉덩이를 받쳐 들고 있는 카르벨이 씨익 웃고 있었다.

그는 장난을 치듯 딜런에게 속삭였다.

“딜런. 엘로니아가 인상을 쓰는구나. 얼른 무섭다고 하렴.”

그의 요청과 달리 딜런은 엘로니아를 알아보자마자 방긋방긋 웃으며 품에 꼭 안겼다.

“먀마!”

팔을 쭉 뻗는 그를 본능적으로 안아 든 엘로니아는 입을 삐죽거렸다.

“제가 또 뭘 그렇게 인상을 썼다고…….”

“그대가 앞서나가 생각하는 듯해서. 아닌가.”

언제 제 속을 들여다보았는지 모를 카르벨의 말에 그녀는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딜런에게 검지를 붙잡힌 채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딜런에게 좋은 놈들만 남겨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

“……좋은 놈들이요?”

“그래. 장자가 아니더라도 실력 있고 인성이 바른 후계자를 내세울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중이지.”

“그럼 설마 최근에 플렌스가의 삼남에 대해 물어봤던 게…….”

엘로니아가 경악하여 그를 응시했다.

카르벨은 그저 어깨만 으쓱하며 모른 척 딜런에게 손장난을 하며 답했다.

“대단한 일은 아니었어. 그냥 적절치 못한 놈들이 가문을 넘겨받으면 억울할 테니까.”

분명 저렇게 말하면서 프렌스 가문의 장남과 차남의 주변을 조용히 압박했을 것이다.

권력이 아닌, 스스로 제 덫에 걸리도록.

그래서 결국 삼남이 가문을 물려받을 수밖에 없게.

카르벨은 태연하게 엘로니아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딜런을 사랑하는 이가 많은데, 그대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다.”

그의 한마디에 괜한 걱정이 사르륵 녹아내렸다.

엘로니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소를 짓자, 딜런이 손을 뻗어 엘로니아의 머리카락을 손에 쥐었다.

입을 벙긋거리는 모습이 마치 자신에게도 입을 맞춰달라는 듯했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엘로니아가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자, 카르벨이 황당하다는 투로 딜런을 보며 말했다.

“이런 식으로 내 아들이 혈통을 주장할 줄은 몰랐는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말도 못 하는 애에게.”

“나도 딜런이 그대와 입을 맞추면 부러워 죽겠거든.”

그는 장난스럽게 딜런을 흘겨보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런 그들의 뒤로 달칵, 작은 소리가 났다.

동시에 엘로니아와 카르벨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한때 정령들이 수집했던 돌을 모아둔 장식장이었다.

그 앞에는 우물쭈물하며 장식장 문을 붙잡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님프가 있었다.

“……님프? 장식장은 왜?”

딜런이 태어난 뒤로는 돌을 수집하는 일도 멈췄다.

돌멩이보다는 딜런을 돌보는 것에 전력을 다하던 정령들이었기에, 대부분 하녀들이 쓸고 닦을 뿐이었다.

엘로니아의 질문에도 님프는 그저 배시시 웃으며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

‘뭐지……?’

닉스와 달리 제법 얌전한 편에 속하던 님프였기에 엘로니아는 그저 고개만 갸웃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구석에서 엘로니아를 보며 쑥덕거리는 정령들의 속셈을 말이다.

[님프, 성공했어?]

노움의 질문에 슬그머니 온 님프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세 정령은 머리를 맞대고 소리를 죽여가며 두 손을 불끈 쥐어 보였다.

마치 비밀스러운 일을 진행하듯이 눈치까지 보던 닉스가 음흉하게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좋아. 분명 딜런도 저 돌 덕분에 정령사가 된 걸지도 몰라. 노움, 저게 확실히 정령의 힘을 증폭시키는 거 맞지?]

[응. 내가 이프리트 님에게 물어봤는데 분명 그렇다고 하셨어.]

[그럼 앞으로 꾸준히 더 구해와 봐. 좋은 걸로.]

[알았어. 내가 돌을 구해올 테니, 딜런은 닉스가 봐. 님프는 몰래 엘로니아의 방에 돌을 숨겨두고.]

평소 온순하던 노움까지 제법 비장한 목소리로 계획을 읊어냈다.

이에 정령들은 비밀 결사대처럼 눈짓을 주고받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엘로니아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

“아이고, 딜런.”

“하라부지!”

말문이 트이기 시작한 딜런의 말에 렌디먼 선황의 얼굴이 헤벌쭉하게 늘어졌다.

그는 제법 무게가 나가는 딜런을 번쩍 들어 안으며 다정하게 물었다.

“오냐. 오늘은 이 할아비와의 약속에 조금 늦었구나. 무슨 일이더냐?”

딜런을 예뻐하는 렌디먼 선황제와는 주기적으로 식사와 티타임을 가졌다.

일선에서 물러났으나, 카르벨과는 가끔 업무에 관련된 의견도 주고받는 듯했다.

이제는 건강을 완벽하게 되찾은 렌디먼 선황제의 질문에 엘로니아가 조심스럽게 답을 건넸다.

“정령들이랑 놀다가 조금 늦었어요. 죄송합니다.”

“아니다. 정령이 이리도 예뻐해 주니 감사할 따름이지.”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쿠키를 들어 보였다.

먹여도 되냐고 묻는 것이었다.

엘로니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렌디먼 선황제는 곧장 딜런의 손에 쥐여 주었다.

하지만 딜런은 고개를 뒤로 쭉 빼내며 거부했다.

“시러.”

“허어, 밤톨만 할 때는 케이크도 홀 채로 손으로 집어 먹었던 것 같은데. 쿠키보다 케이크가 좋더냐?”

기어 다니며 아무거나 입에 넣을 때쯤, 님프와 함께 케이크를 맨손으로 쑤셔놓았던 일화를 꺼내자 딜런이 고개를 돌렸다.

렌디먼 선황제의 어깨에 얼굴을 묻는 것을 보아하니 답을 하기 싫은 듯했다.

엘로니아는 곤란한 듯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게, 요즘은 단 음식은 입에 안 맞나 봐요.”

“카르벨 고놈 입맛을 똑 닮았구나.”

렌디먼 선황제는 껄껄 웃으며 사과를 들어 다시 딜런에게 건넸다.

고개만 슬쩍 돌려 과일을 확인한 그는 그제야 받아 들었다.

야무지게 먹는 그의 허리춤에는 달그락거리는 작은 목검이 달려 있었다.

이를 본 렌디먼 선황이 신기한 듯 되물었다.

“벌써 검술을 배우느냐? 이제 걸음마를 막 뗀 듯하더니.”

“아뇨. 아직 배우기는 이른데 정령들이 자꾸 뭘 쥐여 줘서……. 근데 검 모양으로 된 걸 좋아해요.”

손에 쥐고 제 나름대로 휘두르기는 했다.

이를 볼 때면 카르벨은 아주 훌륭한 재능을 지녔을 것 같다며 벌써 테드 경을 검술 선생으로 미리 지목까지 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릴 때의 호기심이 재능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딜런이 원한다면 카르벨은 지원을 아끼지 않겠지만, 아니라고 하면 강요할 사람은 아니었기에 그저 엘로니아는 지켜만 볼 뿐이었다.

적당히 웃는 그녀에게 렌디먼 선황제가 기쁘게 화답했다.

“그렇다면 내 선물이라도 줘야지.”

“괜찮아요. 목검은 정령들이 종류별로 선물을 해서 엄청 많거든요.”

“아니, 나는 엘로니아. 네게 줄 선물을 말하는 거다.”

예상치 못한 답에 엘로니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렌디먼 선황제는 큰 소리를 내어 웃었다.

“내게 할 말이 있지 않느냐.”

“어, 어떻게 아셨어요?”

“카르벨이 그러더구나. 네가 할 말이 있을 때는 입술을 자주 꾹 다문다고.”

그런 말을 했단 말이야?

엘로니아는 민망함에 자리에 없는 카르벨을 대신해 빈 곳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저도 모르는 습관을 듣고 나니 괜히 행동이 의식되었다.

뻣뻣하게 드레스 자락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엘로니아는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게……. 둘째를 임신한 것 같아요.”

소식을 들은 렌디먼 선황제는 기쁜 듯이 얼굴의 주름이 확 펴졌다.

“그래, 카르벨은 알고 있고?”

“아뇨. 요 며칠 리프리 왕국이랑 연금술 협회 관련해서 일이 있어서 궁을 비웠거든요. 그래서 제일 먼저 말씀드렸어요.”

렌디먼 선황제는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딜런을 안은 팔을 가볍게 흔드는 모양새가 들뜬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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