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
그레이터가 헤일튼가에서 일을 하게 된 계기는 사소했다.
유능한 카르벨이라는 상관이 돈을 많이 주기 때문이었다.
아카데미 재학 내내 수석. 졸업할 때쯤에는 황궁 보좌실에서도 러브콜이 왔었다.
하지만 그레이터는 특출나게 출세에 뜻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높은 곳에 있으면 기대감도 높은 법이지.’
황궁에서 일을 실수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모가지가 잘린다는 말이 단순히 백수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정말 제 목이 날아갈 수도 있는 문제였다.
선배들에게 듣자 하니 황궁 업무량이 장난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역시 제국을 좌지우지하는 것보다야 가문 쪽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적당히 소시민으로 살다 소시민으로 죽는 것이 꿈이었기에 딱 적당하게 귀족의 보좌관 자리를 선택했거늘.
“폐하.”
어째서 그는 자신이 황궁, 그것도 황제의 직속 보좌관이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레이터의 조용한 부름에도 눈앞에 있는 유능한 상관은 답이 없었다.
그저 묵묵하게 서류에 집중한 것인지 조용할 뿐이었다.
에스피디 황실로 들어온 지도 벌써 몇 년이 흘렀다.
격동의 시기에서 끔찍한 업무량과 인수인계를 버티고 이제야 좀 한숨 돌리나 했더니.
그레이터는 가만히 답을 기다리다 똑똑, 카르벨의 책상을 노크하며 다시 불렀다.
“폐하.”
“그레이터. 엘로니아는?”
정신을 차리기 무섭게 고개를 든 카르벨이 조건반사처럼 되물었다.
그레이터는 최대한 침착하고 차분하게 답했다.
“황후 폐하께서 진통은 한참 전에 시작되셨는데……. 아직입니다.”
“그래.”
카르벨은 언제나처럼 싱긋, 여유롭게 웃어 보이며 다시 서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서류를 조금 보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고개를 들며 물었다.
“엘로니아는?”
“……질문하신 지 1분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 이상하군.”
오늘도 야근 확정이구나.
그레이터는 제 독한 상관에게 속으로 경의를 표했다.
평소에 검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굴기는 했지만, 그렇게 애정을 쏟아붓던 황후 폐하의 출산에도 일을 처리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후계에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이 굴던 카르벨에게 아이가 생겼다.
엘로니아의 임신은 황실의 기쁨이었다. 렌디먼 선황제 폐하께서는 눈물까지 훔치셨다.
그런 그녀의 출산을 앞두고 야금야금 능력 있는 의원을 황궁으로 불러들인 카르벨이었다.
그래도 여러 번 되묻는 것을 보면 진통이 길어지니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그레이터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냥 들어가 보시지 그러십니까. 굳이 불편하게 옆방에서 이러고 계시는 것보다 나으실 텐데요. 의원도 들어가셔도 된다고 하였는데…….”
“안 돼.”
당연히 붙어 있을 줄 알았더니 의외로 단호하게 나왔다.
카르벨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답했다.
“들어오면 엘로니아가 애를 데리고 도망간다고 그랬거든.”
“……그러시군요.”
“내 얼굴을 보면 머리카락을 다 뽑아버리고 싶을지도 모를 거라더군.”
미혼에 애인도 없는 그레이터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는 바가 없으니 입을 다무는 게 최선이었다.
카르벨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역시 산책하자고 했을 때 안아서 갔어야 했나.”
“……그건 아니지 않을까요. 폐하께서 안아 들려고 하시니 기겁을 하셨잖아요.”
“그렇다면 역시 엘로니아가 사과를 먹고 싶다고 했을 때 그레이터가 늦게 구해 온 게 문제겠군.”
“새벽 3시에 10분 만에 구해왔습니다만…….”
그레이터는 조금 억울함을 담아 답했다.
식료품 창고지기를 꼭두새벽부터 깨워서 가장 최상품을 허겁지겁 가져갔거늘.
세상에 이런 억지가 어디 있나.
하지만 카르벨은 그의 억울함은 아랑곳하지 않고 재차 되물었다.
“그래서 엘로니아는?”
뻔히 따로 누군가 언질을 주지 않았는데 왜 자꾸 묻는 걸까.
곰곰이 생각하던 그레이터는 뒤늦게 깨달았다.
아, 가보라는 거구나.
다행스럽게도 그레이터가 눈치를 채고 방을 나서기 전.
옆방에서 우당탕,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곧 다급한 노크가 들리고, 황후궁의 하녀 하나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폐, 폐하! 감축드리옵니다!”
복도 너머로 미세하면서도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황자 전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카르벨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당장이라도 달려갈 줄 알았더니, 의외였다.
오히려 당황한 그레이터가 되묻기 전, 그의 낮은 음성이 침착하게 되물었다.
“엘로니아는. 들어가도 된다고 하던가.”
“예? 예. 황후 폐하께서 언질드리라고…….”
“그래.”
그제야 일어난 카르벨은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속도로 덤덤하게 방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냥 단순히 궁금해서 닦달한 것인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괜히 시달렸나 싶은 생각이 들 무렵.
그가 나간 자리에 놓인 서류가 그레이터의 눈에 들어왔다.
1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단 한 장도 넘어가지 않은 채 그대로 놓여 있는 모습이었다.
***
[와, 작아. 노움보다 작은 것 같아.]
닉스는 입을 벌린 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아기 주변을 날아다녔다.
님프는 꽃다발을 한 아름 가져왔지만, 생각보다 작은 아기의 체구는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엘로니아가 받기에도 너무 거대한 꽃다발이었기에 결국 아기에게는 전해지지 못했다.
닉스는 빤히 아기를 들여다보다 엘로니아를 보며 말했다.
[엘로니아. 눈을 안 뜨는데 문제 있는 거 아니야?]
“아직 태어난 지 24시간도 안 됐잖아. 그게 당연한 거야.”
[왜? 엘로니아는 처음 봤을 때부터 눈을 뜨고 있었는데!]
그건 내가 아기가 아니었으니까요.
엘로니아는 몇 번이고 설명했던 일을 다시 말하기 귀찮아서 입을 다물었다.
무엇보다도 그간 태교를 위해 엘로니아가 자는 그 순간까지도 동화책을 귀에 주입하듯 읽어주던 닉스를 생각하면,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진짜 아기를 보다 보면 그도 깨닫는 게 있겠거니 했다.
엘로니아는 제 품에 안긴 자그마한 아이를 내려보았다.
열 달 품고 낳은 아이는 작고 신기했다.
요 자그마한 아이가 저를 그리도 고통스럽게 했었나 싶었다.
똑똑, 노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곧 익숙한 음성이 그녀를 불렀다.
“엘로니아.”
성큼성큼, 단걸음에 그녀의 곁으로 다가온 카르벨은 조금 굳은 얼굴이었다.
차마 다가오지 못하는 그를 보자, 그간 조금 예민하게 굴었던 일들이 미안하게 느껴졌다.
엘로니아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아들이에요.”
그제야 카르벨은 안심하며 다가와 그녀의 이마에 지그시 입술을 눌렀다.
조금 벅찰 정도로 꽉 끌어안은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딜런 어때.”
무슨 뜻인가 싶어 잠시 눈을 끔뻑이던 엘로니아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이름이에요?”
“응. 사랑받으라는 의미에서.”
그건 이미 진행 중이었다.
딜런은 태어나자마자 정령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으니까.
그녀와 카르벨이 가장 아낄 거라는 것 또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제 이름을 알아들었는지, 얌전히 안겨 있던 딜런의 입이 벌어지며 벙긋거렸다.
이에 신기한 듯 노움이 외쳤다.
[이거 뭐라고 말하는 거 아니야?]
[뭐라는지 모르겠어.]
귀를 쫑긋 세우는 닉스를 보며 엘로니아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엘로니아는 가족이 생겼다.
***
딜런은 엘로니아를 닮아 주황빛 머리카락과 보랏빛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그게 또 정령들의 심금을 울린 것인지, 그들은 매일같이 시녀들이 할 일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것 봐, 딜런. 이게 바로……. 딸랑이라는 거다!]
닉스는 자신의 체구에 비해 월등히 큰 장난감을 들고는 딸랑딸랑딸랑, 격하게 흔들어댔다.
‘……저게 저, 저렇게 흔드는 거였나?’
정작 딜런은 즐거운 듯 꺄르륵, 웃음을 흘렸다.
아이라 그런 건지 허공에 장난감이 둥둥 떠다니는 것일 텐데도 놀란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매일같이 보는 광경일 테니, 익숙한 걸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옷은 노움이 얼마나 야무지게 갈아입히는지, 유모가 따로 없었다.
단지…….
[딜런, 잘 들어. 재산 상속은 반드시 2촌 내에 있는 사람이 1순위야. 황실뿐 아니라 너는 헤일튼가의 지분도 있어. 이건 절차가 어떻게 되냐면…….]
“대체 아기에게 뭘 가르치는 거야……!”
엘로니아는 <재산 상속법>이라는 두꺼운 책을 들고 딜런에게 설명하고 있는 세 정령을 보며 외쳤다.
일단 정령들의 목소리가 들리는지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애초에 들려도 저걸 이해하기에는 말조차 못 하는 갓난아기였다.
하지만 닉스와 노움, 님프는 무엇이 문제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엘로니아를 동시에 쳐다보고 있었다.
노움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답했다.
[인생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걸 알려주고 있어.]
“그래, 그게 필요하기는 한데……. 지금은 너무 이르지 않니?”
당황한 엘로니아의 답에 정령들은 예상치 못한 듯 쑥덕거렸다.
[어쩌지, 닉스. 그럼 상속법 말고 ‘마법학의 기초 이론’ 쪽이 나으려나?]
[아냐, 님프의 말이 일리가 있어. ‘누워서도 마스터하는 검술 기초’가 적당해. 제목부터 누워서 마스터한다고 하잖아.]
회의가 끝난 것인지 그들은 상속법 책 대신 검술 기초를 들었다.
대체 이걸 어디부터 설명을 해야 하는지도 이제는 알 수 없었다.
엘로니아는 이마를 짚으며 옆에 있던 카르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카르벨, 어떻게 좀 해 봐요. 정령들이 자꾸 이상한 걸 가르치려고 해요.”
아기 침대 주변에 놓인 책의 제목을 슥 훑더니 싱긋 웃으며 답했다.
“‘누워서도 마스터하는 검술 기초’보다는 유명한 검술학자 가이론 경이 쓴 저서가 훨씬 실용적이야.”
“그게 아니잖아요! 아직 어리니까 좀 더, 딜런의 자아 개발에 도움이 될 만한 그런, 그런 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엄청난 속도로 말을 뱉었지만, 이미 정령들은 검술책을 펼치고 있었다.
책 표지를 본 딜런은 누운 채로 눈을 끔뻑이더니 방긋 웃었다.
뽀얀 볼살이 기쁜 듯 잘게 흔들렸다.
자그마하고 통통한 두 팔을 쭉 뻗어 닉스와 정령들이 든 책을 잡기 위해 허우적거리기까지 했다.
이를 본 닉스가 신기한 듯 말했다.
[와, 누가 시커먼 인간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할까 봐 검술에 반응하는 것 좀 봐.]
“우연이겠지.”
그래도 내심 검술에 재능이 있는 걸까 싶어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제 아이라도 팔불출 같다는 생각에 엘로니아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딜런은 책을 들고 요리조리 움직이는 정령들을 향해 정확하게 손을 뻗었다.
“꺄아-!”
[이것 봐! 검술을 좋아하는 거라니까?]
닉스가 확신에 가득 차 외쳤다.
엘로니아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닉스, 일단 그 책을 좀 내려놔 봐. 혹시 딸랑이로 오해한 거 아니야?”
[아닌 것 같은데…….]
의심스럽다는 듯이 책을 내려놓자, 딜런은 정확하게 위를 향해 팔을 뻗었다.
이에 엘로니아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것 봐. 분명 장난감인 줄 알고…….”
하지만 차마 답을 이을 수 없었다.
딜런의 손은 정확하게 정령들을 향해 있었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님프와 노움이 있는 방향을 향해 허우적거리던 그는 잡히지 않자 커다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우우…….”
당황한 님프와 노움이 어영부영 그의 볼에 달라붙자, 그제야 기쁜 듯 자그마한 품에 정령을 꽉 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