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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청혼 장소가 틀렸어요!-230화 (230/234)

외전 3

담백하면서도 끝은 살짝 달콤한 향. 하얀 꽃잎이 끝으로 갈수록 노란색 빛을 띠는 것까지.

엘로니아는 반쯤 확신을 가지고 하녀에게 물었다.

“혹시 오델리아 왕비님께서 주신 꽃이니?”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 왕궁 약사분들도 하나같이 추천하시길래 받아왔거든요!”

모를 수가 없잖아…….

속으로 눈물을 훔친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하녀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저 오델리아 왕비가 몸에 좋은 것이라며 지시하니 그런 줄 알고 받았겠지.

하지만 이번만큼은 오델리아 왕비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차야 마시면 그만이라지만 목욕물에 꽃잎을 띄웠다면 분명 엘로니아의 몸에도 향이 배여 있을 터.

그녀가 목욕을 끝내고 나오기 무섭게 눈앞에 물방울이 빠른 속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물방울은 곧 닉스의 모습이 되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또 이상한 걸 묻혀와서는!]

그는 소리가 나도록 혀를 차며 엘로니아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조금 민망한 듯 아무 생각 없이 답했다.

“글쎄, 자꾸 오델리아 전하께서 추천하셔서 거절하기 그렇더라.”

[이상한 사람 아니야? 알고 보니 에스피디 제국을 노리는 속셈이라던가…….]

“에이, 그런 분 아니야.”

닉스는 잔뜩 날을 세우며 엘로니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순식간에 꽃향기는 맑은 공기로 바뀌었다.

아무래도 아셀리의 일을 겪었다고 제 나름대로 의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꼼꼼하게 그녀의 주위를 돌아다니며 살피는 닉스를 보고 있자니 괜히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툴툴거려도 날 생각해주는구나!’

코끝이 찡해진 엘로니아는 최대한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방긋 웃으며 설명을 더 했다.

“그냥 전하께서 후계가 없으니까 걱정되신 거야. 몸에 나쁠 거 하나 없는…….”

[후계?]

순간 닉스는 그녀의 말 중 한 단어를 곱씹었다.

그런 그의 표정이 묘하게 밝아졌다.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잔뜩 기대감을 담아 그녀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그럼 정령사가 또 생기는 거 맞지?]

“그, 그건 모르지. 반드시 정령사가 된다는 법은 없잖아.”

[그렇지만 엘로니아는 정령사 가문이라고 했잖아.]

불안하다.

엘로니아는 목덜미에 싸한 기운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 나는 잘 모르겠네……?”

그녀는 모른 척 뻣뻣하게 정면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닉스가 쫓아오는 소리가 들리자 그만큼 엘로니아의 걸음도 빨라졌다.

다시 침실로 돌아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카르벨이 그녀를 반겼다.

세상 어느 때보다 닉스가 싫어하는 그가 반가웠다.

“카르벨!”

엘로니아는 그의 품 안으로 거의 뛰어들 듯 몸을 던졌다.

침대에 앉아 있던 그는 예상이라도 한 사람처럼 능숙하게 그녀를 받아냈다.

하지만 이어진 낮은 음성은 미세한 긴장감을 담고 있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행동만 민첩했을 뿐. 그는 침대 옆에 세워진 검을 향해 슬그머니 손을 뻗고 있었다.

엘로니아는 멀찍이서 빙빙 맴도는 닉스를 보며 그의 품으로 파고들며 말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닉스가 좀…….”

“정령?”

카르벨의 음성에 닉스의 눈매가 사납게 위로 치솟았다.

[왜! 난 정령사가 둘이면 두 배로 재밌겠다 싶은 것뿐이었는데!]

“정령사가 되는 건 확실하지 않다니까!”

[왜? 엘로니아가 둘이라며. 그게 아니라면 대체 아기는 어떻게 생기는 건데?]

닉스의 질문에 엘로니아는 경악하며 카르벨의 팔을 당겨 방패라도 되는 것처럼 자신의 앞을 막았다.

정말 몰라서 물어본 걸까.

‘솔직하게 다 가르쳐줘야 하는 거야?!’

갈등하는 엘로니아와 달리, 닉스는 정말 순수하게 정령사를 원하는 듯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답을 기다리는 듯한 시선에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심각하게 답했다.

“……다, 다리 밑에서 주워오는 거야.”

[거짓말하지 마. 나도 그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

닉스는 픽, 하찮다는 듯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비웃었다.

그럼 왜 물어본 거야!

왜인지 닉스에게 한 방 먹은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당황하여 카르벨의 팔을 더욱 꽉 끌어안자, 순간 카르벨의 남은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그제야 엘로니아는 그의 품에 갇혔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곧 뒤에서 그의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정령에게서 도망친 건가.”

“그게, 닉스가 자꾸 약을 올려서요. 정령들이 카르벨은 좀 싫……, 가 아니라 무서워하니까요.”

“응. 그러니까 내게 도망친 거잖아.”

목소리가 작게 울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웃고 있는 듯했다.

어디서 그의 기분이 좋아졌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엘로니아가 바르작거리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그럴수록 늪에 빠진 것처럼 더욱 그의 품으로 파묻힐 뿐이었다.

고개를 숙인 그는 엘로니아의 목덜미 부근에 입을 맞추며 웃었다.

“기뻐.”

“정령이랑 거리 두는 거요……?”

“아니. 엘로니아가 도피할 때 제일 먼저 나를 찾는다는 사실이.”

차마 닉스에게 답을 하기 곤란해서 도망쳤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진정으로 기뻐하는 그가 등 뒤로 고스란히 느껴져서였다.

실제로도 위험한 일이 생긴다면, 제일 먼저 카르벨을 찾을 테니까.

문득 엘로니아는 그런 자신을 보며 깨달았다.

‘나는 생각보다 카르벨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었구나.’

막연하게 느꼈던 앞날을 아주 살짝 엿본 것 같았다.

엘로니아는 조금 편히 그에게 기대며 제 무릎을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막상 얼굴을 보면 입이 떨어질 것 같지 않아서였다.

“그럼 아이가 생기면……. 내가 혹시 아이를 올바른 길로 안내하지 못해도, 그때도 지켜줄 건가요?”

“그럴 때 내게 오면 돼. 그대를 숨겨두는 동안 길은 내가 찾아둘 테니 그때 같이 가.”

유치하게도 그의 말에 안심이 되었다.

카르벨이라면 그녀가 늘 꿈꾸던 이상적인 가족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를 침대에 턱받침을 한 채로 엎드려서 듣고 있던 닉스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나도 잘할 수 있어! 엘로니아도 키웠는데, 아기도 당연히 잘 키우지!]

일단 이쪽은 닉스에게서 키워진 게 아닙니다만.

목구멍 끝까지 그 말이 나올 듯 말 듯 달랑거렸다.

하지만 닉스의 의욕적인 모습이 어째서인지 싫지 않았다.

그는 좋은 생각이라도 난 듯, 허공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분명 노움이 그 돌이 정령사의 힘을 강하게 만들어 준다고 했는데. 내가 다시 물어보고 올게!]

“……돌? 내 침대 머리맡에 있던 그거?”

[다시 엘로니아가 우리를 못 보면 안 되니까. 미리 대비책을 세워놨지. 걱정하지 말라고!]

믿음직스럽게 엄지까지 척 들어 보인 그는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졌다.

아마도 노움을 찾으러 간 듯했다.

그냥 퍼즐 대신 새로운 취미가 생겼겠거니 했는데, 제 나름대로 대비책이었던 모양이었다.

‘그 돌이 약간 그……. 주술? 기원 같은 거였나.’

전혀 체감되지 않았기에 생각조차 못 하고 있던 차였다.

모두가 이렇게 사랑해주는데, 아이도 당연히 그렇게 자랄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엘로니아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살며시 고개를 내린 채 내려다보고 있던 그의 얼굴이 위로 보였다.

날렵한 턱선과 즐거움으로 슬쩍 늘어진 입매. 그리고 곧은 눈매를 훑은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에게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놀란 듯 잠시 그녀를 들여다보던 카르벨의 눈빛이 미묘하게 묵직함을 담았다.

그는 빙긋 웃으며 되물었다.

“이게 뭘까.”

“음. 아이를 갖고 싶다는 작은 신호라고 할까요?”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자, 단단하게 붙잡고 있던 그의 팔이 느슨해졌다.

거친 손이 느릿하게 허리를 쓰다듬었다.

볼에서 시작한 입맞춤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카르벨은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듯 답했다.

“조금 설레는 말이군.”

목소리에 섞인 숨결이 뜨겁게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간지러움에 어깨가 작게 움츠러들었다.

그는 능숙하게 손을 얽어가며 그녀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조금은 욕망이 실린 그의 음성이 재차 되물었다.

“이제 참지 않아도 되는 건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으나, 되묻기에는 익숙한 감각에 서서히 몸이 녹아내리는 중이었다.

그의 말수가 적어지는 것과 동시에 숨소리가 불규칙적으로 퍼졌다.

아직도 엘로니아는 그의 열정을 따라잡기가 버거웠다.

그의 팔을 무심코 붙잡을 때면, 오히려 촘촘하게 잘 짜인 근육들이 반응하듯 움직였다.

그럴 때면 놀리듯 엘로니아에게 가볍게 코를 비비다 호흡을 섞었다.

오늘따라 길게 들이마시는 숨이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늘 붙어 있어도 카르벨은 어딘가에 몰려 있는 것 같았다.

이름 모를 무언가를 확인하듯 입을 맞추고, 눈을 확인하던 그였다.

정처 없이 흔들리는 생각을 간신히 붙잡은 엘로니아는 밤이 끝나갈 무렵 물었다.

“왜 그래요?”

카르벨과 달리 체력이 좋지 못한 엘로니아는 간신히 그에게 붙어 누워 있었다.

식지 않은 체온 덕에 추울 리 없거늘.

그는 자신의 팔 한쪽을 희생하여 엘로니아를 꽉 붙들며 말했다.

“그냥. 그대라서 다행이라는 생각.”

“뭐가요?”

엘로니아는 조금 쉰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정답을 알려줄 생각이 없는지, 카르벨은 도톰한 그녀의 입술을 훑어내며 물었다.

“엘로니아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가족의 수는 몇 명이지.”

“으음……. 다섯 명……?”

생각해본 적 없는 질문에 엘로니아는 그와 입을 맞추며 홀린 듯 답을 건넸다.

“그럼 세 명이겠군.”

그는 엄지로 엘로니아의 턱을 가볍게 문지르며 고개를 기울였다.

어느새 등에 틈 하나 없이 밀착된 침대가 느껴졌다.

그는 정복욕이 가득한 눈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엄지로 문지르며 답했다.

“노력해볼게.”

순간, 서서히 뜨거워지는 공기가 느껴지는 탓에 엘로니아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엘로니아가 눈을 떴을 때는 정오도 한참 지난 시간이었다.

눈을 뜨자 카르벨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물었다.

“일어났나.”

흐려진 초점이 느리게 그를 잡아냈다.

분명 밤은 같이 지냈는데, 또 저만 지쳤다.

괴물 같은 그의 체력에 엘로니아는 밉지 않게 발로 그의 다리를 걷어찼다.

그래 봤자 힘이 거의 실리지 않은 탓에 카르벨에게는 타격감조차 없는 듯했지만 말이다.

비척비척 상체를 일으키자 카르벨이 슬쩍 침대 기둥에 등을 기대었다.

그는 침대 옆에 거대하게 자리하고 있는 창문을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그제야 엘로니아의 눈에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에메랄드빛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와……. 예쁘다.”

“그래, 예뻐.”

정작 카르벨은 바다가 아닌 그녀를 보고 있었다.

입까지 벌린 채 그 풍경을 바라보던 엘로니아는 그런 사소한 부분까지는 알아채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바다로 달려가 발을 담그고 싶었으나, 해가 뜨기 전까지 시달린 탓인지 온몸이 무거웠다.

엘로니아는 원망이 섞인 시선으로 카르벨을 노려보았다.

그는 익숙하게 자신의 품으로 그녀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시간은 많아. 앞으로 자주 오면 되지.”

“언제 또 올 줄 알고요.”

“왜. 그대랑 시간을 즐기려고 일도 몰아서 끝냈는걸. 그레이터가 조금 고생하고 있겠다만.”

고생하는 사람이 있는 시점부터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엘로니아는 왠지 죽어가는 그레이터의 얼굴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카르벨은 본인이 평범한 사람과 좀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만 해요.”

“유념하도록 하지.”

제대로 들었는지 의심이 되어 그를 노려보자, 카르벨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돌렸다.

“나중에 아이를 데리고 오면 좋겠어.”

그 말이 싫지는 않아서 엘로니아는 결국 눈매에 힘을 풀고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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