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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청혼 장소가 틀렸어요!-229화 (229/234)

외전 2

“입맛에 안 맞니?”

라티에 왕궁, 만찬실의 기다란 테이블 위는 온갖 음식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엘로니아는 오델리아 왕비의 질문에 부른 배를 움켜쥐고는 힘겹게 웃어 보였다.

“너무 맛있어요. 이렇게까지 준비해주실 줄 몰랐는데…….”

“이게 뭐 그리 오래 걸린다고. 그렇지, 카르벨?”

오델리아 왕비는 별소리를 다 듣는다는 투로 카르벨에게 되물었다.

그 역시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라티에 왕국으로 바다를 보러 가자던 카르벨은 정확하게 이틀을 두문불출했다.

여행은 그냥 해 본 소리인가 싶어 엘로니아도 대수롭지 않게 잊어가던 차였다.

하지만 정확하게 이틀이 지난 아침.

라티에 왕국으로 향하는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그녀와 달리, 에이미가 이미 짐마차에 한가득 짐을 실어두기까지 했다.

그렇게 도착하자마자 예의상 라티에 왕궁으로 가 인사를 드리고 가려고 했거늘.

“파이레나 요리를 엘로니아에게 갖다주렴.”

“예, 전하.”

오델리아 왕비는 온갖 산해진미를 그녀에게 먹이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다.

그녀의 명령에 시녀 한 명이 파이레나 생선 요리를 엘로니아에게 갖다주었다.

‘배가 터지겠는데.’

드레스가 터지지 않을까 심히 우려가 될 정도였다.

그렇다고 오델리아 왕비의 권유를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

포크와 나이프를 쥔 엘로니아의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차마 손을 대지 못하고 그릇을 노려보는 사이.

“그만 먹어도 돼, 엘로니아.”

카르벨이 그녀의 앞에 놓인 그릇을 조용히 들었다.

뒤에 있던 시종에게 그릇을 넘긴 그는 엘로니아에게 잔을 슬쩍 밀어주었다.

그런 뒤 한숨을 섞어가며 오델리아 왕비를 나무랐다.

“그만하시죠.”

“얘가 무슨 말을 하는 거라니?”

그녀는 느리게 고개를 저어가며 탄식했다.

“엘로니아가 참 힘들겠어. 카르벨을 데리고 살아야 하니 말이다. 내가 뭘 했다고 저런다니?”

엘로니아 역시 과한 대접을 제외하면 딱히 이상한 점은 느끼지 못한 차였다.

그저 라티에 왕국의 특산물이 조금 더 많다는 것 정도?

평소 이런 날이 아니면 손쉽게 접할 수 없는 것들이니 여행의 묘미로는 딱 알맞은 게 아니던가.

덩달아 동그랗게 눈을 뜨고 오델리아 왕비를 살피는 엘로니아와 달리, 카르벨은 대범하게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과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시종 하나가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아주 자연스럽게 그릇을 돌렸다.

덕분에 원래 그의 의도와 달리 반대편에 있던 엉뚱한 포도를 집을 수밖에 없었다.

포도를 한 알 똑, 떼어낸 그의 입매가 비스듬하게 기울었다.

“이래도 아니라고 하실 겁니까.”

카르벨의 질문에도 오델리아는 뻔뻔하게 부채를 촥 펼치며 입매를 가렸다.

고고하게 눈을 내리깐 그녀는 정색하며 말했다.

“네 손이 포도를 원했나 보구나. 너도 모르는 사이에 몸이 필요로 하고 있던 거야.”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엘로니아에게 은근하게 임신을 돕는 음식들만 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 거였어?

덩달아 놀란 엘로니아는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카르벨은 눈짓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들을 순차적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꽃차는 라티에 왕국의 특산품인 라듀스 지방에서 나는 것이죠. 섭취하면 몸이 따뜻해져서 배가 찬 사람이나 임산부에게 좋기로 유명하고.”

“네 말처럼 특산품이라 내온 것일 뿐이야.”

“파이레나 역시 불임이던 여인이 잡아먹고 아이를 얻었다는 전설까지 있을 정도고.”

카르벨은 찰그락. 가볍게 포크를 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스테이크에 쓴 향신료도. 더 말씀드릴까요.”

다소 굳은 표정으로 그는 오델리아 왕비를 직시했다.

“에스피디 황실의 이름으로 대하지 않게 해주시죠, 전하.”

더 했다가는 사적인 관계가 아닌 공식적인 관계로 발전시키겠다는 협박이었다.

엘로니아는 다급하게 그의 허벅지에 손을 올려 토닥이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달랬다.

“카르벨. 괜찮아요. 맛있기도 했고, 몸에 좋은 거라면서요. 그럼 됐죠.”

험상궂은 그의 눈매가 일순 작게 움찔거렸다.

비록 오델리아 왕비를 향한 시선은 여전했으나, 이전보다는 아주 미세하게 누그러진 모양새였다.

이에 부채가 방패막이라도 되는 듯 시선을 피하며 꼿꼿하게 있던 오델리아는 아쉽다는 듯이 촥, 부채를 접으며 말했다.

“일부러 들키지 않으려고 잘 접한 적 없을 라티에 왕국의 재료로 준비하라고 일렀는데. 눈치 빠르기는.”

“어렸을 적부터 오가며 본 것이 있는데. 너무 무르게 생각하십니다.”

“네가 후계를 빨리빨리 만들었으면 내가 이렇게까지 했겠니.”

그녀는 심통이 난 듯 콧잔등을 작게 우그러트렸다.

이참에 참고 있던 말을 쏟아낼 생각인지,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빠른 속도로 말을 이어갔다.

“남자가 여우같이 굴어야 엘로니아도 아이를 생각하지 않겠니. 대체 여태까지 뭘 한 게야.”

“아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엘로니아가 원한다면. 그때 생각해도 충분합니다.”

오델리아 왕비의 토로를 그는 단칼에 정리했다.

다소 살벌한 음성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난 뒤, 조금 흥분을 가라앉힌 오델리아 왕비의 침착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내 동생을 보렴. 그 흔한 아이 하나 남기지 않아서 더는 그 아이를 추억할 무엇 하나 없지 않니.”

장난기 속에 감춰진 쓸쓸함이 미세하게 묻어나왔다.

엘로니아는 그제야 오델리아 왕비가 왜 그리도 아이를 바랐는지를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자신의 동생이 남긴 것 하나 없다는 사실에 많은 안타까움을 반복했으리라.

그녀의 이야기만 나오면 카르벨은 할 말이 없어질 수밖에 없었다.

“……가족 계획은 엘로니아와 알아서 하겠습니다. 조언만 감사히 받도록 하죠.”

사실상 화해나 다름없는 답이었다.

이를 알아들은 오델리아 왕비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활발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엘로니아를 보며 물었다.

“그래서, 제국의 신하들은 후계 얘기를 안 하든?”

“아, 가끔 들리기는 하는데 그리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분위기는 아니어서요.”

“얘, 그거 충신 아니다. 얼른 주변에서 없애버려.”

아니, 고작 그 이유로요?

에스피디 제국에 있는 귀족들은 알까.

고작 그들이 황궁 내부를 다지는 일에 몰두했다는 이유로 옆 나라 왕국에서 치워질 존재로 조언을 받았다는 걸 말이다.

최근 황궁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싶었으나,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엘로니아가 입을 뻐끔거리는 사이, 폭풍 같던 식사 시간이 지나갔다.

***

별장에 오자마자 엘로니아는 풀썩, 침대 위로 몸을 날렸다.

엎어진 채로 가만히 있는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아이를 가지면……. 사랑해 줄 수 있을까?’

부모다운 부모를 겪어본 적이 없었다.

데브니 남작 부부는 그녀를 방치하다시피 하였고, 부모라는 존재가 무얼 하는지는 어깨너머로 본 것들이 전부였다.

엘로니아는 자신이 없었다.

‘정령들은 외모만 어린 거잖아. 실제 아이는 다를 거야.’

자식은 부모를 따라간다고 하던가.

결국 제 부모와 연을 끊고 가문을 넘겨받은 이는 엘로니아였다.

카르벨이 조용히 처리하였어도 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는 없는 법.

귀족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퍼진 말은 뒤에서 몰래 한다 한들 엘로니아에게도 이따금 들리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제 부모를…….’

‘잘 되니까 바로 내친 거겠죠. 굳이 범법자의 자식으로 있으면 책잡힐 일밖에 더 되겠어요?’

‘키워준 은혜란 게 있는데 생각보다 냉정하신 분이었구먼.’

‘카르벨 폐하께서 괜히 마음에 두신 게 아닌 게지. 닮은 구석이 있는 게야.’

그런 잡음이 엘로니아의 마음에 큰 생채기가 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구나 싶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 그녀가 아이를 낳는다라.

‘상상이 잘 안 돼.’

한숨 섞인 생각 사이로 끼익, 침대의 옆이 기울었다.

빼꼼 고개를 들어보니 카르벨이 옆에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델리아 전하의 말은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틀린 말은 아니죠, 뭐.”

엘로니아는 조심스럽게 제 속마음을 내비쳤다. 그녀로서는 꽤 용기를 낸 말이었다.

“나는 사실……. 좋은 부모가 될 자신이 없어요. 나중에 아이가 저를 원망하면 어떡하죠?”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을까. 카르벨의 놀란 듯한 눈이 잠시 엘로니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턱을 가볍게 쓸어내며 답했다.

“왜 그대 혼자 되려고 하는 거지.”

“네?”

“부모라면 둘이잖아. 엘로니아가 모자란다면, 내가 나머지를 채울게.”

“제가 1인분도 못 하면요?”

“그럼 내가 3인분 하면 되겠군.”

왜 세 배가 된 거지?

이상한 계산법에 엘로니아는 무슨 헛소리냐는 듯이 그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는 듯, 그는 다정한 웃음으로 화답할 뿐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척하던 엘로니아는 힐끔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카르벨은 어때요?”

그러고 보니 그에게는 후계가 필요하냐고 물어본 적이 없구나.

매번 그는 다른 이들의 독촉을 막아내기만 했지, 정작 자신의 의견을 내비친 적은 없었다.

카르벨은 상사로도, 황제로도, 남편으로도 훌륭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아이란 퍽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기도 했다.

‘정령들도 카르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고…….’

빤히 그를 들여다보며 이리저리 아이와 어울려 줄 그를 상상해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카르벨은 눈이 마주치자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게 전부예요?”

막상 또 저렇게 건조한 답을 건네니 묘하게 심통이 났다.

저도 어쩌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엘로니아의 미묘한 심리를 눈치챈 카르벨이 그녀의 뺨을 가볍게 쓸며 답했다.

“엘로니아를 닮은 아이라면 행복하겠지.”

“근데 왜 여태 말을 안 했어요?”

“그야…….”

카르벨의 고개가 기울고, 그녀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떨어지는가 싶더니 그는 다시금 입을 맞추며 깊게 숨을 마셨다.

가볍게 시작했던 입맞춤이 조금씩 호흡을 더 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엘로니아는 불규칙적으로 숨을 헐떡이며 그의 옷을 그러쥐었다.

셔츠가 작은 그녀의 손에서 구겨져도 카르벨은 크게 개의치 않아 했다.

한참 만에 입술을 뗀 그는 발개진 엘로니아의 얼굴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딱히 확고한 답은 없었지만, 그녀만 볼 수 있는 그 표정을 마주할 때면 엘로니아는 약해지고는 했다.

그녀가 입을 열려던 찰나. 똑똑, 가벼운 노크와 함께 하녀의 음성이 넘어왔다.

“황후 폐하, 목욕물 준비되었습니다.”

“왕국까지 오느라 피로했을 텐데. 다녀와.”

카르벨까지 등을 떠미니 엘로니아는 어영부영 하녀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욕조 안에는 처음 보는 꽃잎들이 가득했다.

에이미라면 향과 관련된 것을 엘로니아에게 해 주어도 의미 없다는 사실을 알 테지만, 라티에 왕국의 하녀는 잘 모르고 있던 모양이었다.

구태여 물을 두 번 받아야 할 일도 아닐 터.

엘로니아는 대충 웃어넘기며 시중을 받기 위해 발을 내밀었다.

순간, 물에 떠다니는 꽃잎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째 오델리아 왕비님이 낮에 주셨던 꽃차랑 비슷한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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