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연호 카르벨 2년.
격동의 시기가 지난 지도 꽤 시간이 흘렀으나, 여전히 황궁 내부는 바삐 돌아갔다.
특히나 결혼기념일을 앞둔 황궁에서는 축하 연회가 한창이었다.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가벼운 왈츠곡이 흐르는 그레이트 홀 안에서 엘로니아는 그 어느 때보다 집중력을 영혼까지 끌어모으고 있었다.
[엘로니아. 내가 요즘 말이야. 노움이랑 대화를 해 봤는데…….]
연회에 큰 관심이 없다시피 하던 닉스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녀의 옆에서 어슬렁거렸다.
[이 동그란 돌멩이, 좀 예쁘지 않아? 꼭 엘로니아 눈처럼!]
닉스는 금화 크기 정도 되어 보이는 자수정을 들고는 대단한 발견을 한 것처럼 눈을 반짝였다.
‘보석도 돌이라고 칭한다면 돌이겠지만…….’
저 정도 크기에, 노움이 발견해서 가져왔을 정도면 어지간히 좋은 원석일 터.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엘로니아는 인사를 하러 오려다 말고 멈칫거리는 귀족들을 보며 입매를 늘릴 수밖에 없었다.
“자연의 생명이 에스피디 제국에 함께하기를. 제국의 두 태양께 인사드립니다.”
그제야 귀족들은 머뭇거리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정령의 존재는 이제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엘로니아와 달리 모두 직접적으로 닉스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지금 연회에 참석한 이들의 눈에는 그저,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원석 덩어리만 보일 뿐이었다.
누구보다 남의 눈치를 살피는 귀족들의 눈에 보이지 않다 보니, 대부분 겁을 먹기 마련이었다.
“제국을 수호하시는 정령님들께도 감사를 전해드립니다.”
돌덩이에 꾸벅, 고개를 숙이는 이들을 보고 있자니 조금 우습기도 했다.
정작 닉스는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잘 봐. 이걸 반질반질하게 깎아서 엘로니아 침대 머리맡에 올려두자.]
“그거 저번에도 갖다두지 않았어……?”
[저번 거는 푸른색이 섞인 보라색이었잖아. 이건 좀 더 붉은 기가 돈다고!]
그렇게 모은 돌이 지금 방에 가득한데요.
퍼즐에서 흥미가 바뀌기라도 한 것인지, 요즘에는 자꾸만 돌을 주워다 방에 장식하기에 이르렀다.
엘로니아는 옆에서 인사를 받고 있던 카르벨을 슬쩍 훔쳐보았다.
어떻게 눈치를 챈 것인지 귀신같이 고개를 돌린 그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말을 전했다.
“전에 주문한 장식장이라면, 제록 나무를 가공해서 결혼기념일에 맞춰 오기로 했네.”
묻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안 거지?
제 속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건네는 말에 엘로니아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자연스럽게 말을 이을 뿐이었다.
“그대가 궁금해하는 표정이길래. 이게 아니었나?”
“마, 맞아요…….”
괜히 제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슥 훑은 엘로니아는 미심쩍은 시선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그런 그녀를 향해 큰 목소리로 누군가 인사를 건넸다.
“이야, 폐하. 결혼기념일을 감축드립니다!”
대충 입은 듯한 복색에 로브. 긴 보랏빛 머리를 찰랑이며 다가온 키레일은 여전했다.
엘로니아는 언제 당황했냐는 듯이 싹 표정을 바꿔 웃으며 응대했다.
“키레일 씨, 오셨어요?”
“아무렴, 폐하께서 부르시는데 제가 안 올 수 있습니까.”
예의를 갖춰 그녀의 손에 짤막하게 입을 맞춘 그는 즐거운 듯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물론 선물도 준비했고요.”
“복도에 시종이 하나 있을 터이니 그에게 맡기게나.”
키레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르벨이 단호히 답했다.
워낙 기상천외한 것들을 많이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보니 경계하는 눈치였다.
키레일은 익살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아쉬움을 내비쳤다.
“아, 거참. 협회에서 개발진 모으느라 얼마나 죽을 맛인데. 이거 너무 신뢰가 없으신 것 아닙니까.”
“며칠 전 광장의 분수대에 체리 주스가 쏟아진 것도 그대 짓이 아니던가.”
“뭐, 덕분에 축제 분위기가 나지 않았습니까. 맛도 괜찮던데.”
순간 카르벨의 눈매가 더욱 환하게 접히는 것을 확인한 엘로니아는 능숙하게 둘의 대화를 끊어냈다.
이는 위험한 전조증상이었다. 미미하게 짜증이 올라왔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궁 개발에 참여할 연금술사들은 대충 선출이 되었나요?”
“서로 하겠다고 아주 난리입니다. 뒷골목에서 별짓 다 하던 놈들이 연구가 막혔으니 안달이 나지 않았겠습니까.”
그는 닉스가 어린 영애들의 머리 위로 자수정을 들고 약을 올리듯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며 가볍게 말을 이었다.
“보급할 만한 물건을 만들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다만, 뭐. 못할 건 또 아니죠.”
뒷골목에서 불법적으로 연금술을 하던 이들 중, 죄질이 나쁜 이들은 메티카로 수감 되었다.
그들 중, 실력은 있으나 제대로 스승을 만나지 못한 이들을 따로 모았다.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물건을 개발하는 데에 황실에서 지원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가끔 물을 주스로 만드는 등의 이상한 물건도 나오기는 했지만 말이다.
결혼 축하 연회였지만, 한번 이야기가 진척되자 어느새 앞으로의 일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가 되어버렸다.
세 명 모두 한참을 논의하던 끝에 정신을 차렸을 때는, 꽤 시간이 지난 뒤였다.
키레일은 아쉽다는 듯이 목을 스트레칭하며 말했다.
“이런. 좋은 날에 너무 오래 붙잡았군요?”
“괜찮아요. 어차피 언제고 얘기해야 했을 일이잖아요.”
뒤늦게 몰려온 피로감에 적당히 미소를 지어 보이자, 그가 과장되게 눈을 크게 떴다.
“아직 후계도 없으신데. 이렇게 일을 좋아하시면 어찌합니까.”
카르벨에 비하면 그리 엄청난 일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엘로니아는 부끄럽다는 듯이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아직 후계는 생각 없는 걸요.”
그녀의 답에 키레일의 시선이 힐끔, 그녀의 옆에 있을 카르벨을 향했다.
덩달아 고개를 돌린 엘로니아는 묘하게 정적인 그의 표정을 보고야 말았다.
뭔가, 실수를 한 기분이 들었다.
***
연회가 끝난 뒤, 환복을 마친 엘로니아는 에이미에게 머리를 줴뜯기고 있었다.
“후계를 안 보겠다고 하셨다고요?!”
“아, 안 보겠다는 게 아니라 아직 생각이 없, 없다고……. 에이미, 아파…….”
긴 머리를 붙잡고 빗으로 퍽퍽 빗질을 하던 그녀는 화들짝, 움켜쥔 머리칼을 놓은 뒤 사과했다.
“에구머니나,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너무 놀라서 그만.”
“그렇게 놀랄 일이야?”
“당연하죠! 이거 폐하랑 합의된 얘기예요?”
“카르벨도 대충 알고 있지 않을까?”
먼저 후계에 관해서 말을 건넨 적이 없었다.
그동안 당장 넘겨받은 황궁 내부를 다지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이따금 그레이터나 다른 가문의 귀족들이 넌지시 이야기를 꺼내는 것 같았지만 대부분 카르벨의 선에서 끝났다.
그래서 내심 그도 같은 생각이겠거니 했을 뿐이었다.
에이미는 빗의 손잡이를 손톱으로 꾹꾹 누르며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이게 다 정령님들이 늘 곁에 계셔서 육아에 지쳤다던가…….”
“에이미……?”
“아니에요. 잘 됐어요. 아무래도 키레일 씨에게 상담을 좀 해 봐야겠어요.”
무슨 상담이냐고 묻기도 전, 달칵. 그녀의 방문이 열리고 여전히 정복을 입은 카르벨이 들어왔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와 에이미를 보고는 그는 짧게 고개를 까닥했다.
나가라는 신호를 알아들은 에이미는 기회다 싶었는지 빠른 속도로 방을 나가버렸다.
나가기 전, 엄지를 척 하니 세워 보여준 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뭐, 뭘 잘하라는 거야!’
혼란 속에서 슬쩍, 시선을 돌리니 귀족들에게 시달렸는지 조금 피곤해 보이는 카르벨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한 손으로 정복 재킷의 단추를 가볍게 풀어내며 다가왔다.
고개를 숙인 그는 짧게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며 물었다.
“혹시 자고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피곤하지는 않나.”
“제가 반대로 물어야 할 것 같은데. 아니에요?”
“음. 별로.”
그는 피식 웃음을 삼키며 이번에는 입을 맞춰왔다.
익숙한 애정 표현에 엘로니아는 팔을 뻗어 그를 감싸 안았다.
그는 꼭 하루를 마무리할 때면 그녀를 찾아왔다.
엘로니아는 그에게 이마를 맞대며 작게 웃음을 흘렸다.
“새벽에 찾아오는 것만 아니면 괜찮다고요.”
“어쩔 수 없었어. 그렇다고 그대를 깨울 수는 없잖아.”
정복 재킷을 벗어 그녀의 의자 등받이에 대충 걸쳐놓은 그가 말을 막아버리듯 다시금 입술을 머금었다.
한창 바쁠 때는 얼굴을 보는 것도 힘들었다.
렌디먼 황제에게 밀려 있던 제왕학을 속성으로 배워야만 했고, 정세부터 시작해서 그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탓이었다.
그런 때에 그는 밤에 잠든 그녀를 몰래 보고 갔다고 했다.
새벽의 어둑한 방 안에 그림자를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그 뒤로는 그녀가 잠들기 전, 꼭 와서 얼굴을 비치고는 했다.
“정령들은.”
짧게 입을 맞추고 떨어진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옅은 숨이 그녀의 얼굴 위로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슬쩍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펴본 엘로니아는 조용히 답했다.
“없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가볍게 그녀를 안아 올렸다.
짧은 비명을 삼키며 그녀가 그의 목을 꽉 끌어안자, 카르벨은 기분이 좋은 듯 입매를 늘리며 침대에 살며시 그녀를 내려놓았다.
눈, 코, 뺨까지. 가볍게 쪽, 입맞춤을 흩뿌리던 그의 행동에 결국 엘로니아는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등을 가볍게 쓸었다.
간질거리는 감각에 몸을 들썩이자, 그녀의 위에 드리워진 카르벨이 기분 좋은 듯 목덜미에 미소가 섞인 숨을 내뱉었다.
엘로니아는 그의 품에 파묻혀 바르작거리며 되물었다.
“카르벨, 피곤하다면서요.”
“그런 기억 없는데.”
“분명 얼굴에 쓰여 있었거든요.”
“착각이야.”
카르벨은 뭐가 문제냐는 듯 팔에 힘을 줘 상체를 일으켰다.
다시 마주 본 그의 눈동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열기를 띠고 있었다.
그를 보는 순간 엘로니아도 서서히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고개가 기울고, 다정한 손이 그녀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쓰다듬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엘로니아는 발가락이 멋대로 굽는 기분이었다.
“엘로니아.”
곁에 있으면서도 저를 애타게 찾는 카르벨의 음성이 좋았다.
엘로니아는 제 사랑스러운 남편을 꽉 끌어안았다.
조금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에 맞춰 그가 움직였다.
얼굴을 배회하던 그림자는 어느새 전신을 삼키듯 천천히 그녀를 감쌌다.
뜨거웠던 공기가 어느새 눅진하게 눌어붙었다.
엘로니아는 그의 젖은 앞머리 끝이 제 얼굴을 찌르는 이 순간을 버겁게 눈에 담았다.
흐릿하게 그와 눈을 맞췄을 때, 그는 여전히 엘로니아 하나를 온전히 눈에 담고 있었다.
그는 밭은 숨을 뱉는 그녀에게 입을 맞추며 물었다.
“……결혼기념일이니까, 라티에 왕궁에 여행이라도 갈까.”
“시간 낼 수 있어요?”
바르작거리며 힘겹게 답을 건네자, 그가 그녀의 젖은 머리칼을 정리해주며 답했다.
“바다 좋아했잖아. 며칠 가서 푹 쉬다 오자.”
그는 다시금 짧게 입을 맞췄다.
엘로니아는 답할 힘이 없어 그저 눈을 감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